AD 235 3월 22일-238년 6월 24일경 막시미누스 트락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락스"(트라키아인)의 아버지는 총독의 회계사였으며, 후대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결국 그들의 오래된 거주지(다키아)에서 몰아내어 판노니아로 이주하게 되는 카르피족(다키아 부족)을 조상으로 두었다. 막시미누스는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자신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암살되었을 때 제4군단 이탈리카의 지휘관이었다. 판노니아 군대는 막시미누스를 황제로 선출했다. 238년(여섯 황제의 해로 알려짐) 원로원의 반란이 일어나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연이어 막시미누스에 대항하는 황제임을 선포하였다. 막시미누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로 진격했으나 아퀼레이아에서 저지당했고, 그곳에서 제2군단 파르티카의 불만을 품은 무리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소위 3세기의 막사 황제였다. 그의 치세는 종종 3세기 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막시미누스는 원로원 계급도 기사 계급도 아닌 최초의 황제였다.
막시미누스 치세의 로마 제국. 그는 귀족을 싫어하고 알렉산데르의 측근이었던 고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제거하려는 여러 음모가 실패로 돌아갔다. 235-236년에 알레만니를 시작으로 게르만 부족들을 물리쳤으며 다키아족과 사르마티아족과 싸웠다.
AD 238년 3월-4월경 고르디아누스 1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는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와 함께 6 황제의 해인 238년, 21일간 황제였다.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의 억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프로쿠라토르를 살해했다. 반란에 휘말려 황제가 된 그는 막시미누스에게 충성하는 누미디아의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여 그의 아들이 전사한 후 자결했다.
AD 238년 3월-4월경 고르디아누스 2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는 자신의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와 함께 6 황제의 해인 238년, 21일간 황제였다.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를 타도하려던 그는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외곽에서 누미디아의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여 전사했다.
아프리카 속주의 반란 당시 로마 제국. 천한 배경과 원로원의 반대에도 황제에 오른 막시미누스의 억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품은 속주 엘리트는 막시미누스의 프로쿠라토르를 살해하고 고르디아누스 1세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요구했다. 고령으로 인해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주도했으며 제국 대부분과 원로원이 이들 부자를 황제로 인준했다. 막시미누스를 지지한 누미디아 총독의 군대와 맞서 싸웠지만 민병대 수준의 병력으로는 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들은 전사하고 아버지는 자결했다.
AD 238년 4월 22일-7월 29일경 푸피에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는 6 황제의 해인 238년에 3개월 동안 발비누스와 함께 황제였다. 이 시기의 출처가 부족해서 황제에 대한 지식은 한정되어 있다. 대부분의 당대 문헌에서 그는 그의 코그노멘 "푸피에누스"가 아니라 노멘 "막시무스"로 언급된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비공개회의를 통해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기로 의결했다. 두 황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도 함께 맡았다. 4월 말 발비누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라벤나로 진군한 푸피에누스는 아퀼레이아를 포위 중이던 막시미누스가 병사들에게 암살되자 막시미누스의 군대에 상당한 증여금을 주고 속주로 돌려보냈다. 그동안 발비누스는 수도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두 황제 간에 불화가 생겼다. 원로원이 임명한 황제 밑에서 일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가 황제들을 근위대 막사로 끌고가 그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AD 238년 4월 22일-7월 29일경 발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는 6 황제의 해인 238년에 3개월 동안 푸피에누스와 함께 황제였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비공개회의를 통해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기로 의결했고 두 황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도 함께 맡았다. 푸피에누스가 라벤나로 진군하여 막시미누스에 대한 원정을 이끄는 동안 그는 로마에 남았지만 공공질서를 유지하지 못했다.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가 자신을 제외하기를 원한다고 의심하여 황궁의 서로 다른 곳에서 지냈다. 불만을 품은 근위대가 그들을 끌고 가기 위해 왔을 때도 두 황제는 말다툼을 했고 곧 암살당했다.
AD 238년 7월 29일-244년 2월경 고르디아누스 3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는 13세의 나이에 최연소 로마 황제가 되었다. 고르디아누스는 238년 이전에 사망한 유니우스 발누스와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아들이다.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이자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이다. 그가 황제가 되기 전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르디아누스는 238년에 그의 외할아버지 이름을 받았다. 막시미누스에 적대감을 가진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가문을 지지했고 이후에는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선출했지만 그들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고르디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승격시켰다. 막시미누스가 휘하 병사에게 살해되었지만 238년 6월에 일어난 민중 폭동, 로마 화재가 일어난데 이어 근위대의 불만으로 두 황제가 사망하고 7월 29일 고르디아누스가 황제로 선포되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 치세의 로마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가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하자 젊은 황제는 동쪽으로 대군을 보냈다. 243년 황제와 그의 장인 티메시테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레사에나 전투에서 승리했다. 캠페인 성공 후 페르시아 침공을 계획하고 있을 때 티메시테우스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고르디아누스가 페르시아를 향해 캠페인을 시작할 때 가이우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와 나중에 필리푸스 아라브스로도 알려진 그의 형제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가 합류했다. 244년 2월경 페르시아군은 크테시폰으로 진격하는 로마군을 막기 위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고르디아누스의 운명은 불확실하다. 사산조 사료에 따르면 오늘날 팔루자(이라크) 근처에서 미시케 전투가 벌어져 로마군이 대패하고 황제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좌절한 로마군에 의해 고르디아누스가 자이타(Zaitha)에서 살해당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AD 244년 2월-249년 9월경 필리푸스 아라브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라브스'는 오늘날 시리아에 위치한 도시인 아라비아의 아우란티스에서 태어났다. 244년 2월 고르디아누스 3세가 사망한 후, 근위대장이던 필리푸스는 권력을 잡았다. 그는 재빨리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평화를 협상하고 원로원에 승인받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오스로이네와 메소포타미아 속주는 유지했지만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 세력권에 속한다는 것을 동의하고 50만 데나리의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고향 샤흐바를 필리포폴리스로 이름을 바꾸고 거대한 건축 계획을 지시한 그는 전쟁 배상금과 군대 증여금 등 재원 마련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국경의 평안을 위해 필수적인 다뉴브 강 북쪽의 부족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보조금 지급이 중단되자 245년 카르피족이 다키아 속주를 지나 모이시아에 침입하여 246년 여름 필리푸스는 그들을 제압했다. 한편, 아르사케스 왕조의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245년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 247년 8월 로마에 돌아온 그는 248년 4월에 도시의 1,000주년을 기념했다. 248년 말, 카르피족에 대한 전쟁 결과에 불만을 품은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의 군단이 반란을 일으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파카티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이로 인해 콰디족과 게르만 부족들이 판노니아를 습격하고 고트족이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 카르피족은 다키아와 모이시아를 침공했다. 동방에서는 마르쿠스 요타피아누스가 프리스쿠스의 억압적인 통치와 과도한 세금에 대응하여 봉기를 이끌었다. 필리푸스는 원로원의 지지로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데키우스에게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의 전권을 위임하여 파견했다. 간신히 반란을 제압한 데키우스는 249년 봄, 불만이 커진 다뉴브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고 로마로 진군하여 여름에 오늘날 베로나 근처에서 필리푸스의 군대와 마주했다. 패배한 필리푸스는 249년 9월 휘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AD 247년 여름-249년 9월경 필리푸스 2세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는 소 필리푸스로도 알려져 있으며 황제 필리푸스 아라브스의 아내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그의 아버지가 244년에 황제가 되었을 때, 소 필리푸스는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 247년에 그는 집정관이 되었고, 후에 그의 아버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와 공동 통치자로 승격되었다. 고대 역사가들은 필리푸스 아라브스와 필리푸스 2세가 모두 249년 데키우스에 의해 전사했다고 말한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필리푸스 아라브스의 사망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필리푸스 2세가 12세의 나이에 근위대에게 살해되었다고 말한다. 필리푸스 2세는 249년 가을에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였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12세도 되지 않았다.
AD 249년 9월-251년 6월경 데키우스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이아누스 데키우스, 때로는 트라야누스 데키우스로 번역되기도 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치세에 뛰어난 정치가였던 데키우스는 모이시아에서 반란을 진압한 후 그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249년, 그는 베로나 근처에서 필리푸스를 물리치고 죽였고 그 후 원로원에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의 치세 동안, 그는 로마 국가와 종교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데키우스의 박해로 이어졌으며 그곳에서 많은 저명한 기독교인들(교황 파비아누스를 포함한)이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통치 마지막 해에, 데키우스는 그의 아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공동 통치를 했고, 그들은 둘 다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죽임을 당했다.
AD 251년 6월경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는 251년 그의 아버지 데키우스와 공동으로 통치한 황제였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250년에 카이사르로 승격되었고, 251년 5월에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었다. 크니바 휘하의 고트족이 다누비우스 속주를 침공했을 때,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선봉대와 함께 보내졌고, 데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본대가 뒤따랐다. 그들은 250년 니코폴리스 아드 이스트룸 전투에서 크니바를 매복 공격하여 그를 격파한 후, 베로이 전투에서 매복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다음 해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다. 두 황제의 죽음 이후, 모이시아의 총독이었던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로마군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다.
AD 251년 6월-11월경 호스틸리아누스
가이우스 발렌스 호스틸리아누스 메시우스 퀸투스는 알려지지 않은 날짜에 데키우스와 헤렌니아 에트루스킬라 사이에서 태어나 251년 5월 데키우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승격되었다.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고트족의 매복 공격으로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한 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거의 즉시, 그는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자신의 아들 볼루시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승격시켰다. 호스틸리아누스는 251년 11월에 전염병으로 사망했거나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 살해되었다.
필리푸스 아라브스와 데키우스 치세의 로마 제국.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재정난에 빠진 필리푸스는 안토니니아누스의 가치를 하락시켰으며 로마의 밀 공급에 지장이 생겨 인기가 하락했다. 반란을 진압한 데키우스는 불만이 커진 휘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어 베로나 부근에서 필리푸스에게 승리를 거두고 그를 죽였다.
크니바가 이끄는 고트족이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베로이(오늘날 스타라자고라)에서 로마군을 습격하여 승리하고 필리포폴리스(오늘날 플로브디프)를 점령했다. 고트족은 전리품과 포로를 싣고 고향으로 향했으며 포로 중에는 원로원 계급도 많았다. 데키우스가 그의 아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장군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었다. 251년 6월 둘째 주, 아브리투스 소규모 정착촌 근처 루도고리에의 늪지대에서 크니바가 이끄는 고트족이 로마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고 기록되며 데키우스 역시 늪에 발이 묶여 군대가 전멸당하고 황제도 전사했다.
AD 251년 6월-253년 8월경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와 함께 공동 통치한 황제였다. 데키우스 부자가 전사한 후 즉위한 그는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세웠다. 다뉴브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트족과 평화 협정을 맺어 약탈품과 포로를 데리고 떠날 수 있도록 했고 연간 보조금도 지급하기로 했다. 동방 속주의 안티오키아 귀족 마리아데스가 반란을 일으켜 시리아와 카파도키아를 약탈했고 그 후 페르시아로 도주했다. 로마군이 공세에 나섰지만 샤푸르 1세의 페르시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253년 바르발리소스에서 로마군을 기습했고 무방비 상태의 시리아 속주를 침공하여 모든 군단 주둔지를 점령하고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도시들을 파괴했다. 이듬해에도 침공이 반복되었지만 에메사 왕가의 후손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원래 삼프시케라무스라고 불린 사제)가 샤푸르를 물리쳤다. 그는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다. 다뉴브에서는 고트족이 251년 체결된 조약을 깨뜨리고 소아시아를 해로로 침공하여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우고 약탈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낮은 모이시아도 253년 초 침공당하여 모이시아 수페리오르와 판노니아의 총독 아이밀리아누스가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군단은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고 그는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갈루스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를 갈리아에서 소환했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 인테르암나(오늘날 테르니)에서 갈루스는 붙잡혔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패배 후 휘하의 군대에 살해되었는지, 아니면 황제의 군대가 이탈하여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어쨋든,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253년 8월에 살해되었다.
AD 251년 11월-253년 8월경 볼루시아누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는 251년 11월부터 253년 8월까지 그의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함께 통치한 황제이다. 갈루스는 데키우스의 작은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공동 황제)로, 볼루시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승격시켰다. 251년 11월 호스틸리아누스가 죽은 후, 볼루시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었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의 짧은 통치는 전염병의 발발로 유명했는데, 일부는 이것이 호스틸리아누스의 죽음, 사산 제국의 침공, 그리고 고트족 습격의 이유라고 말한다. 볼루시아누스는 253년 8월 로마로 진격하던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를 두려워한 휘하 병사들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다.
AD 253년 7월-9월경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253년에 3개월 동안 황제였다. 그는 고트족의 침략에 맞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고, 이러한 이유로 그의 군대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재빨리 이탈리아로 가서, 253년 8월 인테르암나 나하르 전투에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를 물리쳤다. 하지만 한 달 후에 또 다른 장군 발레리아누스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 더 큰 군대를 이끌고 아이밀리아누스에게 맞서 이동하자, 그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 치세의 로마 제국. 전염병으로 황폐화된 제국을 관리해야 했던 갈루스는 251년 고트족과 시리아를 공격한 샤푸르와 체결한 굴욕적인 조약 때문에 군부에서 인기가 없었다. 253년 크니바는 로마로부터 공물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소아시아를 침공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공물을 지급하겠다고 방심시킨 뒤 군대를 이끌고 고트족을 습격하여 대부분을 죽이고 그들의 영토를 약탈하고 포로를 해방했다. 휘하 군단은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칭송했다. 신속히 이탈리아로 진군한 그는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에게 승리했다.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의 인준을 받았지만 발레리아누스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의 부하들이 그를 살해했다.
AD 253년 9월-260년 6월경 발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나중에 에데사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황제 샤푸르 1세에게 포로로 잡힌 최초의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 전체에 충격과 불안정을 초래했다. 전례 없는 사건과 포로가 된 황제의 알려지지 않은 운명은 다양한 반응과 "다양한 맥락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갈루스 황제가 살해된 뒤에도 발레리아누스는 계속 로마로 진군하였고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단은 그들의 황제를 죽이고 그에게 귀순했다. 9월 말에 로마에 입성하자 원로원은 두려움과 함께 그들의 일원이었던 그를 재빨리 황제로 인정했다. 253년 10월 22일 발레리아누스는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했다. 그의 치세 초, 유럽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동방의 안티오키아와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그는 아들에게 서방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다. 257년 그는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고 시리아 속주를 회복했다. 259년 에데사로 이동했지만 전염병으로 많은 수의 군단병이 사망했고 도시는 페르시아군에 포위되었다. 260년 초, 발레리아누스는 에데사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남은 생을 보냈다.
AD 253년 9월-268년 9월경 갈리에누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는 그의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253년부터 260년까지 그리고 260년에서 268년까지 단독으로 재위한 황제였다. 그는 제국의 붕괴를 초래할 뻔한 3세기 위기의 대표적인 통치자이다. 그는 황제를 참칭한 자들과 게르만 부족들에 맞서 많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중요한 지역의 분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15년간의 통치는 반세기 만에 가장 긴 기간이었다. 발레리아누스는 253년 9월에 황제가 되었고 로마 원로원은 갈리에누스를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제국을 자신과 아들 사이에 나누었고, 발레리아누스는 동쪽을, 갈리에누스는 서쪽을 담당했다. 갈리에누스는 258년 찬탈자 인겐누스를 물리쳤고 259년 메디올라눔에서 알레만니 군대를 격파했다. 260년 에데사에서 사산 제국이 발레리아누스를 패배시키고 사로잡으면서 로마 제국은 내전의 혼란에 빠졌다. 전체 제국의 지배권은 갈리에누스에게 넘어갔다. 그는 261-262년에 동부의 찬탈자 대 마크리아누스와 루키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를 물리쳤지만, 포스투무스 장군 휘하의 갈리아 제국의 형성을 멈추지는 못했다. 또 다른 찬탈자 아우레올루스는 268년 메디올라눔에서 황제를 자칭했지만, 갈리에누스에게 도시 밖에서 패배하고 내부에서 포위되었다. 포위가 계속되는 동안, 갈리에누스는 음모의 일환으로 장교 케크로피우스에게 칼에 찔려 죽었다.
AD 260년 1월-260년 가을 살로니누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살로니누스 발레리아누스는 260년에 황제였다. 살로니누스를 보좌하던 실바누스는 포스투무스의 군대가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만 군대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내놓을 것을 명령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포스투무스의 부하들이 폭력적으로 나서며 공격을 하자 살로니누스와 실바누스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나(쾰른)로 도피해야 했다. 포스투무스의 군대가 콜로니아 아그리피나를 포위한 지 한 달이 되자 시민들이 살로니누스와 후견인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포스투무스는 휘하의 군대가 이들을 죽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실 병사들을 저지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58-260년 사이 프랑크족이 라인 강 하류를 돌파해 히스파니아의 타라코까지 도달하여 약탈했다. 알레만니족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와 라이티아를 지나 이탈리아로 침공했지만 원로원의 급하게 소집한 군대에 격퇴된 뒤 후퇴하던 중 갈리에누스의 군에 패배했다. 고트족이 흑해를 통해 소아시아의 폰투스 해군을 급습하고 그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카파도키아로 진출한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안티오키아에서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전염병으로 심각하게 약화되어 실패했다. 260년 이른 봄 에데사에서 로마군이 페르시아군에 패배했고 발레리아누스는 포로가 되었다. 샤푸르는 킬리키아와 카파도키아의 도시들을 약탈했고 남아있던 병력을 집결시킨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다. 이후 마크리아누스가 황제를 선포하고 서쪽으로 향하자 판노니아의 군단이 그에게 합류했다.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를 보내 반란군 진압에 성공했고 마크리아누스 부자는 살해되었다.
분열된 로마 제국. 반란의 여파로 포스투무스의 갈리아 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페르시아 원정에서 승리한 오데나투스는 둑스 로마노룸의 칭호를 받고 에메사의 찬탈자 퀴에투스와 발리스타를 진압했다. 포스투무스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나에 있던 황제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죽이고 260년 9월 황제로 선포했다. 267-269년에 고트족과 다른 야만인들이 흑해에서 내려와 그리스의 많은 도시(아테네와 스파르타 포함)를 황폐화시켰고 헤룰리족의 함대가 주요 해군을 이끈 것으로 보인다. 268년 오데나투스가 암살되고 제노비아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AD 268년 9월-270년 1월경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또는 클라우디우스 2세는 치세 동안 알레만니족과 성공적으로 싸웠고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그는 제국의 여러 지방을 황폐화시킨 키프로스의 역병일 가능성이 있는 "악성 전염병"에 굴복한 후 사망했다. 메디올라눔 포위 중 갈리에누스가 살해된 뒤 클라우디우스가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가 즉위할 당시 제국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고트족과 알레만니족을 격퇴하고 갈리아 제국으로부터 히스파니아와 론 강 계곡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269년 말, 시르미움에서 판노니아를 습격하던 반달족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그는 전염병의 희생양이 되어 270년 1월 초에 사망했다.
AD 270년 퀸틸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는 270년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의 형제였다. 황제를 주장한 퀸틸루스는 휘하의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도전받았다. 퀸틸루스의 통치는 6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일부 사료에 따르면 17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사료들은 그의 사인이 휘하 병사들에 의한 죽음, 아우렐리아누스와의 전투, 또는 자살로 전하고 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치세 당시의 로마 제국. 고트족의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침공이 가장 시급한 대응을 필요로 했고 나이수스 전투에서 황제는 기병 사령관 아우렐리아누스와 함께 고트의 대군을 물리쳤다. 수천 명의 포로를 잡고 고트 기병대를 격파했으며 그들이 자랑하던 라게르(마차를 원형으로 배치하는 전법)를 습격했다. 다뉴브 강 너머로 쫓겨난 고트족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 심각한 위협이 되지 못했다.
AD 270년 5월-275년 10월경 아우렐리아누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는 황제로서, 그는 로마 제국이 야만인의 침략과 내부 반란의 압력으로 사실상 붕괴된 후 재통합한 전례 없는 일련의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성공은 3세기의 위기를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 "세계의 회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나 군대에서 출세하여 황제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그는 대단히 파괴적인 전쟁 끝에 알레만니족을 물리쳤다. 그는 또한 고트족, 반달족, 유툰기족, 사르마티아인, 카르피족을 물리쳤다. 아우렐리아누스는 273년 팔미라 제국을 정복한 후 제국의 동쪽 속주를 회복했다. 이듬해 그는 서쪽의 갈리아 제국을 정복하고, 제국을 재통일했다. 그는 또한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 다키아 속주의 포기, 그리고 화폐 개혁을 책임졌다. 비록 2세기 전에 도미티아누스가 공식적으로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주인과 신)로 칭송받기를 요구한 첫 황제였지만, 이러한 칭호는 아우렐리아누스 통치 시대까지 공식 문서에 쓰이지 않았다.
아우렐리아누스 즉위 당시의 로마 제국. 260년 사산 제국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포로로 잡히면서 입은 타격은 제국을 분열시켰다. 라인 강 서쪽의 지역은 갈리아 제국으로, 동부 속주는 팔미라 통치자들에게서 보호를 청했다. 270년 말, 신임 황제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반달족, 유툰기족, 사르마티아인과 싸워 그들을 제국에서 추방했다. 또한 셉티무스, 우르바누스, 도미티아누스, 펠리키시무스와 같은 여러 찬탈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군인 황제였던 그는 군단의 중요성을 알고 주화를 통해 자신을 선전했다. 다키아에서 고트족을 물리친 뒤 방어하기에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돌출된 다키아 속주를 포기했다. 272년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고 파르티쿠스 막시무스와 레스티투토르 오리엔티스("동쪽의 회복자") 칭호를 받았다. 274년 세력이 줄어든 갈리아 제국을 향해 진격한 그는 당시 통치자였던 테트리쿠스와 외교를 통해 항복을 받아냈지만 승리의 퍼포먼스를 위해 가을에 샬롱앙샹파뉴에서 양측 군대가 전투를 벌여 갈리아군이 바로 항복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재통합은 제국이 200년 이상 더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275년 9월, 사산 제국 원정을 위해 동쪽으로 향하던 중 황제는 트라키아에서 살해되었다. 평소 엄격하고 부패를 싫어하여 엄한 처벌을 내린 황제의 처벌을 두려워한 공모자들이 그를 살해했다. 그가 죽은 뒤, 274년 아우구스타로 선언된 아우렐리아누스의 아내 울피아 세베리나가 제국을 잠시 동안 통치했고 타키투스 황제가 뒤를 이었다.
AD 275년 12월-276년 6월경 타키투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는 짧은 치세 동안 고트족과 헤룰리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그 공로로 고티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뒤, 군부에서 황제를 선포하지 않고 원로원에 지명권을 넘겼다. 원로원은 타키투스를 선출했고 그는 원로원에서 선출한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가 동방 원정을 위해 로마군을 보충하려고 모집한 야만족 용병들에 맞서 움직였다. 그들은 황제가 살해되어 원정이 취소된 후 로마 동부 속주를 약탈했다. 타키투스와 이복동생이자 근위대장인 플로리아누스가 헤룰리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타키투스 치세의 로마 제국. 동방 원정을 위해 전임 황제가 모집한 야만족 용병이 원정이 취소된 후 동부 속주의 여러 도시를 약탈했다. 이들을 물리치고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의 갈리아 침공을 처리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던 중 276년 6월 카파도키아의 티아나에서 타키투스 황제는 열병으로 사망했다. 음모로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AD 276년 6월-9월경 플로리아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로리아누스는 그의 이복동생 타키투스 황제가 사망했을 때부터 그해 9월 그가 살해될 때까지 로마 황제였다. 타키투스가 죽자, 로마 원로원과 제국 대부분의 인정을 받아, 플로리아누스는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했다. 하지만, 새 황제는 즉위한 직후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속주의 지지를 받고 일어난 프로부스의 반란을 처리해야 했다. 프로부스는 킬리키아 관문의 지형과 플로리아누스의 군대가 익숙하지 않은 지역의 더운 기후를 이용하여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플로리아누스는 휘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AD 276년 6월-282년 9월경 프로부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는 활동적이고 성공한 장군이자 양심적인 행정가였으며, 6년 치세 동안 그는 국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야만인 부족의 반복적인 침략을 견뎌내면서 내부 속주의 번영을 확보했다. 제국의 외적을 격퇴한 후 프로부스는 몇 번의 내부 반란을 다루어야 했지만, 가능한 한 패배자에게 관대함과 절제를 보여주었다. 그의 치세에 원로원의 법률적 권위의 외관은 확고하게 유지되었고, 라인 강에서 군대를 승리로 이끈 정복자는 원로원의 승인에 의존한다고 공언했다. 게르만족을 물리친 프로부스는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사이에 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고대 요새를 재건하여 아그리 데쿠마테스를 보호했으며, 제국 내의 인구가 감소한 지역을 재정착시키고 국경을 적절히 방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복한 부족들로부터 인력 공물을 징수했다. 그의 폭넓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프로부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병사들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플로리아누스와 대치한 프로부스(빨간색) 당시의 로마 제국. 킬리키아 관문을 막고 소모전을 유도한 프로부스가 승리하고 플로리아누스는 휘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원로원을 무시한 플로리아누스와 달리 프로부스는 정중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했다. 277년 다뉴브 강 하류에서 고트족을 물리치고 278년 갈리아에서 알레만니족과 롱기오네스족을 격파했다. 휘하 장군들이 프랑크족을 물리친 뒤, 그는 라인 강을 넘어 캠페인을 벌이고 라인과 다뉴브 사이의 요새들을 재건했다. 또한 프로부스는 정복한 부족들로부터 인력 공물을 강요하여 대규모 보조군을 제국 내에 정착시켰다. 이는 3세기 동안의 전쟁, 전염병, 행정 혼란, 중과세, 군대 모집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국경의 방어와 농경지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278-280년에는 반달족과 싸웠고 280-281년에는 세 찬탈자 율리우스 사투르니누스, 프로쿨로스, 보노누스를 죽였다. 동방 원정을 열망한 프로부스는 여정을 떠나 282년 9월경 그가 태어난 시르미움에서 휘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AD 282년 9월-283년 7월경 카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는 그의 짧은 치세 동안, 다뉴브 국경에서 게르만 부족들과 사르마티아인과 성공적으로 싸웠다. 그는 사산 제국에 맞서 캠페인을 하던 중 부자연스러운 이유로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벼락을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가 계승했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부활하는 제국에 안정을 제공한 왕조를 세웠다.
AD 283년 7월-284년 11월경 누메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는 그의 형 카리누스와 함께 공동 황제였다. 카루스가 사망한 뒤 퇴각하는 로마군은 질서 정연했고 사산 제국의 바흐람 2세는 내부 투쟁으로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누메리아누스는 284년 3월, 에메사에 도착했고 눈에 염증이 생긴 그는 밀폐된 마차를 타고 여정을 떠났다. 군대가 비티니아 또는 트라키아에 이르렀을 때 시체 썩는 냄새를 맡은 일부 병사가 마차를 열고 사망한 누메리아누스를 발견했다. 누메리아누스 휘하의 군단은 황실 기병대장 디오클레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디오클레스는 황제가 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했다.
AD 283-285년 카리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는 283년 초 그의 아버지 카루스에 의해 제국 서부 지역의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카리누스는 갈리아와 콰디족에 대한 공적을 어느 정도 쌓았고 누메리아누스가 죽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그를 만나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다. 판노니아를 지나면서 찬탈자 사비누스 율리아누스를 쓰러뜨리고 285년 7월 모이시아의 마르구스 강(오늘날 모라바 강)에서 양군은 조우했다. 결과에 대해 서로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전투에서 용맹했지만 카리누스는 그가 유혹한 유부녀의 남편인 군단 지휘관에게 암살되었다는 기록과 카리누스의 휘하 군대가 그를 버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귀순했다는 주장도 있다. 카리누스는 최악의 황제 중 하나로 명성을 얻었고 9명의 아내를 두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그의 정적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선전일 수도 있다. 카리누스가 사망한 후, 그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에 처해졌다.
카루스와 그의 왕조 시대의 로마 제국. 카루스는 다뉴브에서 콰디족과 사르마티아인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프로부스가 고려했던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하여 누메리아누스를 데리고 갔다. 그는 메소포타미아를 합병하고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을 압박하여 티그리스 너머로 진격했다. 사산 제국의 바흐람 2세는 내부 문제로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크테시폰이 함락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루스가 벼락을 맞아 죽으면서 캠페인은 중단되었다.
카리누스와 찬탈자 사비누스 율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대치하던 당시의 로마 제국. 로마로 향하던 누메리아누스가 마차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자 평소 야심만만했던 근위대장 아리우스 아페르가 의심을 샀다. 황제로 선포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를 처형했다. 285년 7월 모이시아에서 카리누스와 마주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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