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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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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47

황제들의 포룸 황제들의 궁전이 지어진 팔라티누스 언덕 왼쪽 뒤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궁전이 있고, 전면에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거주한 도무스 아우구스티와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아폴로 신전을 비롯한 신전들이 있는 구역이 있으며, 가운데에는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지은 도무스 플라비아(공적 공간), 도무스 아우구스타나(사적 공간), 스타디움이 있다. 도무스 세베리아나는 20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지은 언덕의 마지막 궁전이다. 바로 옆에 그가 세운 셉티조디움도 있다. 도무스 플라비아 아래에 파이다고기움은 황실과 귀족 자녀 및 궁정에서 일하는 소년들을 위해 그리스어와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 시설이었다. 거대한 궁전들의 언덕은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황제 포룸의 조감도 카이사르가 사재로 포.. 2023. 12. 17.
포룸 로마눔과 원형극장 저택은 넓은 안뜰을 둘러싸고 있으며 방들이 배열되어 있는 커다란 직사각형 건물이다. 안뜰에는 3개의 큰 연못과 명예로운 베스타의 조각상이 있었다. 베스타의 원형 신전이 오른쪽 구석에 있다. 저택 뒤로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은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전 뒤편 부벽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살해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뒤 레피두스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맡았으며 BC 13년 레피두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가 그 자리를 이었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가 겸임했지만 AD 379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직위를 포기하면서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짓고 있던 바실리카 율리아도 그림 위쪽에 나타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부르투스, 너마저"는 로마 역사.. 2023. 12. 15.
고대 전쟁 : 그리스와 로마가 전투에서 싸운 방식 고대인들이 어떻게 전투를 치렀는지, 아니면 다른 제국들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고 군대를 조직했는지 궁금해 본 적이 있는가? 고대 전쟁은 그들을 낳은 문화만큼이나 다양했다. 문화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고대 세계의 각 왕국은 고유한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고대의 전쟁 전술은 다른 세계열강들과의 갈등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으며, 때로는 왕국이나 문화 내에서 내부적으로도 사용되었다. 고대 문명은 일반적으로 전쟁 수행을 관장하는 신들을 숭배했는데, 그 충돌은 정치 수단으로 여겨졌고 이 시대에 생존을 위해 중대한 것이었다.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교활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했다. 어떤 문화나 왕국이 군사적으로 우월하다고 증명되었는가? 다음은 고전 그리스 로마 시대 유럽 문명들의 고대 전쟁 전술을 비교한 것이다. .. 2022. 6. 10.
그리스 관점의 제국들 [페르시아 황제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통치] 8년,... 클레오파트라 22년, 아우구스투스 43년,... - AD 16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저술한 스스로를 '헬레네스의 황제'라고 선언하십시오. - 1449년 요안니스 아르기로풀로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 황제에게 보내는 조언 로마가 다른 라틴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주장했던 BC 338년을 로마 제국의 시작 날짜로 잡았다. 같은 해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는 그리스 대부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면서 최초의 범 그리스 제국을 세웠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나라를 세계가 아직 보지 못한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게 된다. 제국은 그의 죽음 이후 분열되었지만, 적어도 하나의 계승국(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은 BC 30년 클레.. 2022. 5. 5.
고대 로마의 주화 주조 방법 오늘날 문화에서 은행 카드, 온라인 쇼핑 및 휴대전화 앱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됨에 따라 주화는 거의 쓸모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대에는 주화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화폐 형태였으므로 실제로 그것들을 매우 가치 있게 만들었다. 로마 제국 전체에서 동일한 주화 화폐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특히 제국이 성장함에 따라 로마 사람들이 힘들게 번 돈을 꽤 먼 곳에서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 고대 주화는 계속해서 가치가 상승하는 수집가들의 인기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확실히 오늘날 유통되고 있는 주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 귀중한 물건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들이 정교하고 세밀한 통화를 만들기 위해 찾아낸 공정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로마 주화 제작 : 주조 공정 로마인은 납작하고 둥근 판 또는 납작하게 .. 2022. 5. 1.
로마와 갈리아의 만남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켈트족의 초기 진출은 평화로웠을지 모르지만 BC 400년 이후에는 폭력적으로 변했다. 아테나이오스의 저술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연회 동안 전쟁과 습격을 촉구하는 외침이 선포되었다. "여럿이 함께 식사를 하면 그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지만, 가장 강하고 전쟁 실력 또는 가문 관계나 재력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은 가운데 앉았다. 그 옆에는 집주인이 있고, 그 옆에는 각 계급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길쭉한 방패를 든 전사가 뒤에 바짝 서 있고 경호원들은 맞은편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주인처럼 잔치를 즐겼다." 아마도 켈트족 의회에도 사제들인 드루이드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그들의 신조는 이 당시에도 고대로 여겨졌고 기원은 선사 켈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서로 다른 민.. 2021. 9. 28.
고대 로마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여성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 로마의 첫 번째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는 오랫동안 살인적인 악녀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데이지 던은 그녀의 초연에 관한 새로운 TV 드라마로서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려고 한다. "리비아 : 국모로서 나라에 재앙이, 의붓어머니로서 카이사르의 가문에 재앙이 닥쳤다." 이것이 로마의 첫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에 대한 타키투스의 저주스러운 평가였다. 고대 역사가는 리비아가 남편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자신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승격시키기 위해 잠재적인 제위 계승자를 모두 추방하거나 살해했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심지어 그녀는 AD 14년, 70대의 황제가 사망했을 때 부정행위의 혐의를 받기까지 했다 타키투스의 서술과 이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2021. 8. 25.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 성문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271년에 어떤 공격에서든지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 주변에 요새화 된 방벽(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9 km였고 거의 도시 전체를 둘렀다. 성벽은 벽돌로 지어졌고 높이가 10 미터에 달했다. 캄푸스 마르티우스 옆의 테베레 강을 따라 있는 성벽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 영묘 옆의 테베레 강을 따라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포르타 포르투엔시스에 이르렀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포르타 코르넬리아는 아일리우스 다리의 입구였다. 전경에 하드리아누스의 무덤의 조감도가 보인다. 포르타 코르넬리아 근처에 있는 포르타 트리옴팔리스. 맞은편의 바티칸 골짜기로 통하는 네로 다리. 포르타 셉티미아나와 트라스테베레의 입구. 바.. 2021. 5. 20.
영광의 기둥 라타 가도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은 연속된 나선형 부조를 통해 그의 전쟁의 하이라이트를 알려준다. 장면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트라야누스 기둥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트라야누스 기둥(사진 중앙)은 높이가 38 미터에 달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인에 대한 공적을 알려주는 200 미터의 나선형 부조로 구성되었다. 꼭대기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동상은 밝은 색으로 빛났음에 틀림없다. 근처에 두 개의 도서관이 세워졌고 작품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도서관 위에 테라스가 설치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기둥과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그의 우스트리눔. 일반적으로 이들 영묘에는 황제와 그의 가족의 유골을 포함하고 있었다. 출처 : maquettes-historiques 2021. 5. 20.
영묘, 우스트리눔 그리고 피라미드 영묘는 황제가 그들의 가족을 위해 짓도록 한 무덤이다.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지만 시신이 들어 있지 않은 '기념비'와는 반대로 말이다. 후대에 산탄젤로 성채가 되는 하드리아누스의 영묘가 가장 거대했다. 바티칸 나우마키아와 칼리굴라의 키르쿠스(모형에서 제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영묘는 거대한 개인 정원으로 둘러싸인 테베레 강둑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영묘는 에트루리아 무덤과 같은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었다. 직사각형 기반 위에 편백이 심어진 고분으로 뒤덮인 원통형 구조물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외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등 다른 유명한 사람들이 그곳에 묻혔다. 가장 유명한 기념비는 아마도 루키.. 2021. 5. 19.
로마의 경기장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훈련 또는 운동 경기를 위해 이 경기장을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만들었다. 스타디움은 키르쿠스처럼 보였지만, 카르케르(전차 경주의 출발점)나 스피나는 없었다. 경기장은 길이 276 미터, 폭 54 미터였다. 오늘날의 나보나 광장은 경기장의 형태와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본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 스타디움에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면 네로 목욕탕의 정원(작은 빨간 지붕과 노송 나무가 있는 정원)과 오른쪽 위에 오데움(녹색 지붕을 가진 반원형 극장)이 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아래에 세워진 또 다른 경기장의 조감도. 히포드로모스라고도 불리는 이 경기장은 팔라티노의 도무스 아우구스타나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목욕탕 사이에 지어졌다. 실제로 길이 145 미터의 크게 움푹 들어간 곳이었.. 2021. 5. 18.
콜로세움과 클라우디우스 신전 콜로세움과 그 웅장한 장소. 왼쪽에 클라우디우스 신전의 부벽이 있다. 앞에는 검투사 학교인 "루디 글라디아토리"가 있다. 오른쪽에 티투스 목욕탕이 있다. 배경에서 베누스와 로마의 신전을 추측할 수 있다. 콜로세움은 로마 포룸의 입구 바로 옆에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었다. 클라우디우스 신전은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가, 그녀가 암살한 신격화된 남편 클라우디우스를 추모하기 위해서 첼리오 언덕에 지었다. 그중 일부는 네로가 카일리우스 수도교의 저수지로 사용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콜로세움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이 기념비적인 거대한 부벽 옆을 걷는 것은 인상적이다. 전경에 클라우디우스 신전의 거대한 플랫폼을 돌아가는 아쿠아 클라우디아가 있다. 이 사진은 신격 클라우디우스의 복합 건물을 지탱하는 거대.. 2021. 5. 18.
로마의 극장 원래, 로마의 극장은 연극이 끝날 때마다 철거한 단순한 목재 단상일 뿐이며 관객들은 서서 관람했다. 이 전체 전망은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로마의 활성화된 훌륭한 4개 극장을 볼 수 있게 한다. 사진 왼쪽에는 오데움, 중앙에 폼페이우스 대극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발부스 극장과 마르켈루스 극장이 있다. 폼페이우스 극장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의해 로마에 세워진 최초의 상설 극장이다. 극장 건설을 금지하는 법을 피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는 극장의 관객석에 신전을 짓게 했다. 이 건물은 28,000석을 수용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 극장은 캄푸스 마르티우스의 가장 거대한 건축물 중 하나였다. 이곳의 파사드는 물론 베누스 신전을 지탱하는 구조였다. 극장 내부의 조감도. 폼페이우스가 그의 이름을 딴 극장을 세운 것은.. 2021. 5. 17.
로마의 목욕탕 고대 로마와 로마의 목욕탕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대중목욕탕의 이용은 전 민중에게 즐거움이자 휴식이었으며 저렴했다. BC 33년에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인 아그리파는 이 목욕탕을 지음으로써 자신의 책무를 나타내기를 원했고 출입이 자유로울 것이라고 암시했다. 이 원칙은 그때부터 후대에 개방될 모든 다른 황제 목욕탕의 규칙이 되었다. 여기 사진의 중앙에는 아그리파 목욕탕과 왼쪽 중앙에 있는 거대한 야외 욕장이 있다. 아그리파 목욕탕의 큰 야외 욕장은 판테온 쪽으로 지어졌다. 아그리파의 거대한 정원(호르티 아그리파이)은 네로 목욕탕과 인접해 있었으며, 이 정원의 중앙에는 포르티코 보누스 에벤투스라는 주랑 현관으로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인공 호수(또는 아그리파 호수)가 세워졌다. BC 1세기 말에 지어.. 2021. 5. 17.
로마의 수도교 사진 중앙에서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볼 수 있다. 이 공공사업은 로마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 중 하나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아래에서 완성되었으며 팔라티노(왼쪽 상단)의 비탈에 식수를 공급하고 로마에서 68 km 떨어진 산지에 수원을 두고 있었다. 사진의 중앙에서 첼리오 언덕을 통과하고, 중간에 클라우디우스 신전에 의해 형성된 넓은 건축 단지를 따라 지나간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팔라티노까지 확장시켜 궁전에 물을 공급했다. 첼리오 언덕을 통과하는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자세하게 본 모습. 아쿠아 클라우디아는 또한 첼리오 언덕의 저택들을 에워싸듯이 구부러지며 지나갔다. 사진 중앙에 있는 이 수로는 사실 이중 수로로 왼쪽에는 아피아, 오른쪽에는 마르키아이다. 아쿠아 아피아.. 2021.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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