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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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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유럽24

로마 제국 - 야만인의 침공 제국의 서부가 약화되다 서로마 제국은 더 약하고 가난한 절반이었다. 410년, 알라리크와 야만인 집단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했다. 로마가 외국 군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보다 800년 앞선 초기 공화정 시대의 갈리아인 이래 처음이었다. 국경을 지킬 수 없게 된 서로마 제국은 많은 야만인에게 짓밟혔다. 451년, 아마 모든 야만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는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군과 서고트족에게 패했다. 대부분의 야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훈족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만인 집단 중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카탈라우눔의 로마군 지도자는 아틸라의 어린 시절 친구인 아이티우스였다. 아이티우스는 어린 시절의 일부를 훈족의 야만적인 진영에서 인질로 지내며 보.. 2022. 11. 29.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로마가 필요로 하는 것, 안정과 내전의 종식,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는 어떤 왕이나 독재자 못지않게 강력했지만, 원로원이 로마 제국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는 로마를 벽돌의 도시로 발견하고 대리석의 도시로 남겼다"라고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를 재건하고 미화하여 많은 실직 로마인들을 그 과정에서 일하게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대제국을 통치했다. 그가 이 거대한 제국을 통해 이룬 평화는 무역과 번영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는 라틴어와 로마 문화를 전파했다. 제국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아우.. 2022. 11. 28.
로마 공화정의 종식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그들이 로마 공화국을 구했기를 희망했다. 3월 15일, 그들은 카이사르의 절친한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죽이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를 위협으로 보지도 않았고 도살자로 등장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목표는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기회를 보아 로마의 군중에게 카이사르의 예복을 보여주며, 각각의 단검이 찌른 곳을 드러냈다. 카이사르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를 죽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도주했다. 놀랍게도 카이사르의 종손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당시 19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재산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아무도,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권력을 장악할 위협으로 보지 않.. 2022. 11. 27.
로마 공화정 후기 그라쿠스 형제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병사들이 타국 전쟁에서 돌아와 그들이 떠나 있는 동안 농장이 부유한 로마인들에게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더 이상 농장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판매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인 것 같았다. 새로운 소유주들은 이 작은 농장들을 합쳐서 노예들이 일하는 "대농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그들의 땅을 잃을 정도로 나쁘지만 않다면, 새로운 소유주들은 그들이 땅을 경작한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실직 퇴역 병사들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 거리로 몰려들었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로마인의 대부분은 이제 정부의 지원금으로 존재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유한 평민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무엇보다도 오래.. 2022. 11. 26.
제3차 포에니 전쟁 (BC 149-146) 대 카토. 그는 그리스 문화를 경멸했고, 카르타고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한 후 그렇게 잘 해낸 것에 화가 났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반면 로마는 카르타고의 많은 영토, 특히 이베리아(스페인)를 차지함으로써 확장되었다. 이제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병사들이 오랫동안 전장으로 멀리 나가 있어야 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평화가 이루어진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 병사들은 어떻게 되는가? 대부분은 농부였지만, 그들이 없는 동안 부유한 로마인들은 농장을 사들이고 노예를 이용하여 농장을 운영했다.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갈 곳도 일거리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는 로마의 "승리를 거둔.. 2022. 11. 25.
제2차 포에니 전쟁 (BC 218-201) 용병 전쟁 (BC 240-237년)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로마는 전쟁 후 카르타고에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고, 그래서 카르타고는 용병들에게 지불할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용병들과 카르타고 사이의 지불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용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위대한 카르타고 지도자인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제 아프리카로 돌아와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맞서 싸운 자신의 군대 일부였던 용병들과 싸웠다. 하밀카르는 성공했지만, 카르타고가 용병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로마는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을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이는 카르타고의 주요 무역로 중 일부를 차단했고, 카르타고는 제국에 추가할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다. .. 2022. 11. 24.
제1차 포에니 전쟁 (BC 264-241)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분쟁이었다. 이는 BC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까지 끝나지 않은 긴 전쟁이었다. 분쟁의 대부분은 시칠리아 섬이나 시칠리아를 둘러싼 바다에서 일어났다. 한때 로마는 카르타고와 매우 가까운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를 공격했다. 이 원정은 크산티포스라는 스파르타인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끌고 그들의 조국을 방어했기 때문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카르타고는 원래 BC 800년경 페니키아인에 의해 정착되었다. 페니키아의 도시국가인 티레 출신의 디도 공주는 북아프리카 해안에 이 도시를 세웠다. 페니키아인은 주로 유리, 상아 조각품, 그리고 그들의 유명한 자주색 옷을 거래하는 위대한 선원이자 무역상이었다. 포에니("페니키아인, 티레의 보라색/진홍색"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니키.. 2022. 11. 23.
로마 - 공화정 초기의 확장 공화정 치하의 로마 BC 509년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로마에서 쫓겨난 후, 왕은 환영받지 못했다. 이제 로마인은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형태의 정부는 "공공의 이익"을 의미하는 공화정으로 알려져 있다. 공화정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대신해 결정을 내릴 대표자들을 선출한다. 미국은 공화정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에는 3개의 기관이 있었다. 처음에 입법부는 원로원으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가문인 로마의 파트리키(귀족) 계급 시민 300명으로 구성된 단체였다. 왕에게 복종하는 것에 지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내쫓았다.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의 가장 강력한 기관이었고,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었다. 행정부는 매년 선출되는 두 명의 콘술(집정관)로 구성되었.. 2022. 11. 22.
로마의 시작 - 군주제 아래의 로마 로마는 그리스 반도의 바로 서쪽에 있는 이탈리아 반도의 테베레 강 유역을 따라 있는 라티움 평원에 위치하고 있다. 친절한 양치기 파우스탈루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발견하고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그와 그의 아내는 그들을 자신들의 자식으로 키운다. 이 아이들은 원래 테베레 강에 버려져 암늑대의 보살핌을 받았다. 로마의 전설적인 건국 로마는 작은 농촌 마을로 시작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커다란 고대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트로이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의 건국에 관한 전설이 있다. 알다시피, 그리스인은 목마의 속임수를 사용하여 트로이인을 물리쳤다. 트로이는 멸망했지만,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재물 일부와 피난민 무리를 이끌고 탈출했다. 아이네이아스와 난민들은 지중해를 떠돌다가.. 2022. 11. 19.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시대 BC 336-30년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의 즉위부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까지) 헬레니즘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헬라스(Hellas)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시대는 그리스 문화가 순수하고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시기였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인이 외부인과 접촉하여 그들의 고전적인 문화가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문화와 혼합되어 혼합된 문화를 만들었던 시기였다.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문화의 혼합을 책임지고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이 어떻게 그리스 세계를 지배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BC 371년 스파르타와 테바이 간의 레욱트라 전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파르타는 BC 404년에 아테네를 물리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냈다. 스파르타는 승리했지만.. 2022. 10. 30.
펠로폰네소스 전쟁 - 거대한 전쟁 (BC 431-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일련의 분쟁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동맹 또는 연합을 맺어 동맹국들을 전쟁에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들 전쟁은 그리스 세계의 대부분을 포함했다. 아테네의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편에서 싸운 전쟁의 주요 출처이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지휘관 중 하나였던 BC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배척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책을 썼다. BC 431년에서 404년까지 갈등은 "대전"으로 알려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리스인에게 "대전"은 그리스 세계의 많은 지역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인, 페르시아인, 시칠리아인도 포함하는 세계대전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양측이 모두 잔학행위를 저지르는 등 추악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2022. 10. 29.
고전기 그리스 (BC 500-336년) 페르시아 전쟁부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정복까지 고대 그리스의 고전시대는 그리스인이 예술, 건축, 연극, 철학에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시기였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페리클레스의 지도 아래 세련되었다. 고전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승리하고 그리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고,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모든 그리스 민족을 위해 협력한 드문 시기 중 하나였다. 800년 전 트로이 전쟁 이후로 그리스인이 연합한 적은 없었다. 그리스, 특히 아테네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 시기 아테네의 가장 눈부신 업적 중 하나는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아테나에게 헌정된 신전인 파르테논을 재건.. 2022. 10. 15.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 제국과 일부 독립적인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두 번의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이 세운 강력한 제국이었다. 키루스는 지역을 차례로 정복했지만, 정복당한 사람들이 대왕에게 매년 조공과 병역을 제공하는 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을 따라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은 이오니아인이라고 불렸다. BC 499년 페르시아 제국의 이오니아 도시국가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도움으로 이오니아인은 페르시아 도시 사르디스를 불태웠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라데에서 이오니아 함대를 격파하고 BC 494년에 도시국가 밀레토스를 불.. 2022. 10. 14.
고졸기(古拙期) 그리스 (BC 800-500년) 고졸기 또는 고대 그리스의 구시대는 미케나이 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그리스 역사의 시초로 여겨졌다. 이제는 그리스 역사가 미케나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졸기는 재탄생의 시기였다. 미케나이 시대와 고졸기 사이는 그리스 암흑기로, 적은 인구, 철기 제작, 무법, 예술 부족, 문맹(읽거나 쓸 줄 모르는)의 시대였다. 고졸기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암흑기를 검토해야 한다. 시인 호메로스는 그의 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이 시기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시들에 따르면, 암흑시대는 왕들이 제한된 권력을 가졌던 시기였다. 왕은 가난한 농부, 도둑, 해적으로 묘사된다. 암흑시대를 지배했던 귀족들이 있었는데, 그 가문들은 권력을 얻었지만, 그들은 부유하지 않았고, 이전의 미.. 2022. 10. 9.
미케나이 문명 청동기 문명 - 미케나이/미케네 미케나이인은 궁전 도시이자 미케나이 도시국가 중 가장 강력한 도시 중 하나인 미케나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미케나이 문명은 그리스 본토, 주로 그리스 남부의 반도인 펠로폰네소스에 위치해 있었다. 미케나이인은 최초의 그리스인, 즉 그리스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이다. 미케나이 문명은 BC 1650년에서 1200년 사이에 번성했다. 미케나이인은 크레타 섬에 위치한 오래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미케나이 궁전, 의복, 프레스코화, 그리고 선형 문자 B라고 불리는 그들의 문자 체계에서 볼 수 있다. 선형 문자 B 선형 문자 B 서판은 크레타 섬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문자는 미노아 선형 문자 A와 유사했다. 아서 에번스는 문자 체계를 미노아인에게 돌렸..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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