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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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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그리스41

그리스 호플리테스 만 명의 퇴각 서사시 그리스 호플리테스 만 명의 행군은 고대 세계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모험 중 하나이다. 페르시아 내전에서 소(小) 키루스의 편에 서서 그의 형제이자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싸운 (대부분) 그리스 용병 만 명에 대한 서사시이다. 그 용맹한 사람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졌다. 쿠낙사 전투에서 키루스가 전사한 후,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급여 지급자이자 후원자를 잃고 적진 깊숙이 발이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멀리 있는 고향에 도착하기 위해, 이 병사들은 척박하고 물이 없는 스텝과 눈으로 막힌 산길을 행군해야만 했다. 거의 5,000km(3,100 마일) 길이의 "오디세이"에서, 이 병사들은 페르시아 군대부터 산악 무리에 이르기까지 .. 2023. 4. 12.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시대 BC 336-30년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의 즉위부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까지) 헬레니즘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헬라스(Hellas)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시대는 그리스 문화가 순수하고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시기였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인이 외부인과 접촉하여 그들의 고전적인 문화가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문화와 혼합되어 혼합된 문화를 만들었던 시기였다.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문화의 혼합을 책임지고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이 어떻게 그리스 세계를 지배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BC 371년 스파르타와 테바이 간의 레욱트라 전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파르타는 BC 404년에 아테네를 물리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냈다. 스파르타는 승리했지만.. 2022. 10. 30.
펠로폰네소스 전쟁 - 거대한 전쟁 (BC 431-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일련의 분쟁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동맹 또는 연합을 맺어 동맹국들을 전쟁에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들 전쟁은 그리스 세계의 대부분을 포함했다. 아테네의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편에서 싸운 전쟁의 주요 출처이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지휘관 중 하나였던 BC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배척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책을 썼다. BC 431년에서 404년까지 갈등은 "대전"으로 알려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리스인에게 "대전"은 그리스 세계의 많은 지역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인, 페르시아인, 시칠리아인도 포함하는 세계대전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양측이 모두 잔학행위를 저지르는 등 추악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2022. 10. 29.
고전기 그리스 (BC 500-336년) 페르시아 전쟁부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정복까지 고대 그리스의 고전시대는 그리스인이 예술, 건축, 연극, 철학에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시기였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페리클레스의 지도 아래 세련되었다. 고전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승리하고 그리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고,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모든 그리스 민족을 위해 협력한 드문 시기 중 하나였다. 800년 전 트로이 전쟁 이후로 그리스인이 연합한 적은 없었다. 그리스, 특히 아테네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 시기 아테네의 가장 눈부신 업적 중 하나는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아테나에게 헌정된 신전인 파르테논을 재건.. 2022. 10. 15.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 제국과 일부 독립적인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두 번의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이 세운 강력한 제국이었다. 키루스는 지역을 차례로 정복했지만, 정복당한 사람들이 대왕에게 매년 조공과 병역을 제공하는 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을 따라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은 이오니아인이라고 불렸다. BC 499년 페르시아 제국의 이오니아 도시국가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도움으로 이오니아인은 페르시아 도시 사르디스를 불태웠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라데에서 이오니아 함대를 격파하고 BC 494년에 도시국가 밀레토스를 불.. 2022. 10. 14.
고졸기(古拙期) 그리스 (BC 800-500년) 고졸기 또는 고대 그리스의 구시대는 미케나이 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그리스 역사의 시초로 여겨졌다. 이제는 그리스 역사가 미케나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졸기는 재탄생의 시기였다. 미케나이 시대와 고졸기 사이는 그리스 암흑기로, 적은 인구, 철기 제작, 무법, 예술 부족, 문맹(읽거나 쓸 줄 모르는)의 시대였다. 고졸기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암흑기를 검토해야 한다. 시인 호메로스는 그의 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이 시기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시들에 따르면, 암흑시대는 왕들이 제한된 권력을 가졌던 시기였다. 왕은 가난한 농부, 도둑, 해적으로 묘사된다. 암흑시대를 지배했던 귀족들이 있었는데, 그 가문들은 권력을 얻었지만, 그들은 부유하지 않았고, 이전의 미.. 2022. 10. 9.
미케나이 문명 청동기 문명 - 미케나이/미케네 미케나이인은 궁전 도시이자 미케나이 도시국가 중 가장 강력한 도시 중 하나인 미케나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미케나이 문명은 그리스 본토, 주로 그리스 남부의 반도인 펠로폰네소스에 위치해 있었다. 미케나이인은 최초의 그리스인, 즉 그리스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이다. 미케나이 문명은 BC 1650년에서 1200년 사이에 번성했다. 미케나이인은 크레타 섬에 위치한 오래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미케나이 궁전, 의복, 프레스코화, 그리고 선형 문자 B라고 불리는 그들의 문자 체계에서 볼 수 있다. 선형 문자 B 선형 문자 B 서판은 크레타 섬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문자는 미노아 선형 문자 A와 유사했다. 아서 에번스는 문자 체계를 미노아인에게 돌렸.. 2022. 10. 8.
미노아 문명 유럽 최초의 문명 미노아 미노아/미노스 문명은 크레타 섬과 북쪽의 테라 섬과 같은 크레타 근처의 작은 섬에서 번성했다.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경은 크노소스 궁전 아래의 라비린토스라고 불리는 복잡한 미로에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가두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크레타 왕 미노스의 이름을 따서 문명을 명명했다. 미노아인은 그리스인이 아니지만, 그들은 그리스 역사의 일부이다. 미노아인은 초기 그리스와 무역을 함으로써, 그들의 사상과 예술을 그리스 본토에 전파했다. 크레타는 지중해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 해안에는 에게 해가 있다. 크레타는 배를 타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때때로 "대륙으로 가는 디딤돌"이라고 불린다. 실제로, 우리는 미노아인이 세 대륙 모두에서 고대인들.. 2022. 10. 5.
고대 전쟁 : 그리스와 로마가 전투에서 싸운 방식 고대인들이 어떻게 전투를 치렀는지, 아니면 다른 제국들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고 군대를 조직했는지 궁금해 본 적이 있는가? 고대 전쟁은 그들을 낳은 문화만큼이나 다양했다. 문화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고대 세계의 각 왕국은 고유한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고대의 전쟁 전술은 다른 세계열강들과의 갈등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으며, 때로는 왕국이나 문화 내에서 내부적으로도 사용되었다. 고대 문명은 일반적으로 전쟁 수행을 관장하는 신들을 숭배했는데, 그 충돌은 정치 수단으로 여겨졌고 이 시대에 생존을 위해 중대한 것이었다.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교활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했다. 어떤 문화나 왕국이 군사적으로 우월하다고 증명되었는가? 다음은 고전 그리스 로마 시대 유럽 문명들의 고대 전쟁 전술을 비교한 것이다. .. 2022. 6. 10.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근동에서 가장 큰 제국을 통치했다. 이들은 건국부터 몰락까지 제국을 이끈 12명의 왕이다. 고전 시대에 페르시아에는 많은 왕이 있었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만큼 강력한 지배자는 거의 없었다.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그들은 동쪽의 인더스 강에서부터 서쪽의 발칸반도에 이르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다스렸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가져온 막대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고 국경 너머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연대순으로 나열하면, 이들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건국부터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의 손에 멸망될 때까지 "페르시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던 12명의 사람이다. BC 6세기 페르시아의 왕들 : 아케메네스 제국의 시작 키루스 대왕 (재위 BC 550-.. 2022. 5. 7.
그리스 관점의 제국들 [페르시아 황제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통치] 8년,... 클레오파트라 22년, 아우구스투스 43년,... - AD 16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저술한 스스로를 '헬레네스의 황제'라고 선언하십시오. - 1449년 요안니스 아르기로풀로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 황제에게 보내는 조언 로마가 다른 라틴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주장했던 BC 338년을 로마 제국의 시작 날짜로 잡았다. 같은 해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는 그리스 대부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면서 최초의 범 그리스 제국을 세웠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나라를 세계가 아직 보지 못한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게 된다. 제국은 그의 죽음 이후 분열되었지만, 적어도 하나의 계승국(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은 BC 30년 클레.. 2022. 5. 5.
필리포스의 군사 개혁 필리포스는 군대를 창설하고 그리스인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전술을 도입함으로써 전통적인 전투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의 적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또한 사건이 증명했듯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군대 덕분에 페르시아, 박트리아, 인도인은 알렉산드로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필리포스가 기병대를 창설하기 전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말과 갑옷 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귀족들에게 지원받았다. 반면 보병은 위험이 닥쳤을 때 급히 징집된 소작농으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이들은 훈련과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전투에 동원될 때 그들은 소와 마차를 가지고 농장을 떠나야 했고, 이는 결국 농작물 생산량과 생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왕국 국경에 있는 호전적인 부족이나 훈련된 호플리테스 그리스 군대와는 비교가 되.. 2021. 11. 30.
카리얀다의 스킬락스(Scylax of Caryanda) 카리얀다의 스킬락스는 BC 6세기 말과 5세기 초의 그리스 탐험가이자 작가이다. 후대의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거나 제시되긴 했지만, 그의 저술은 소실되었다. 스킬락스의 주항기는 사실 그가 기록한 것이 아니다. 소위 가짜 스킬락스의 주항기는 약 BC 330년대 초에 플라톤 이후의 아카데미와 또는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 페리파토스(리케이온)의 영역에서 활동한 알려지지 않은 저자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탐험 스킬락스는 소아시아의 이아소스와 가까운 섬에 있는 작은 도시인 카리얀다 출신이다. 그는 아마도 카리아인으로 그리스어와 친숙하고 그의 저술에 사용했을 것이다. 스킬락스에 대해서는 후대의 그리스 작가들이 전하는 얼마 되지 않는 정보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헤로도토스는 그를 이오니아 .. 2021. 8. 7.
아카이아 아카이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티카, 보이오티아, 에우보이아, 키클라데스 제도와 프티오티스의 일부분, 아이톨리아-아카르나니아, 포키스로 이루어진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북쪽은 에피루스 베투스 속주와 마케도니아 속주와 접해 있었다. 이 지역은 로마의 장군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코린토스를 약탈한 후 BC 146년에 로마 공화국에 합병되었고, 그는 "아카이쿠스"(아카이아의 정복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처음에는 로마 마케도니아 속주의 일부였지만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별개의 속주로 만들어졌다. 아카이아는 병사와 군단이 없는 원로원 의원이 통치할 수 있는 가장 권위 있고 인기 있는 속주 중 하나였다. 아테네는 알렉산드리아와 경쟁할 수 있는 제국 엘리트 교육의 주요 중심지이자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 2021. 7. 27.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4편 아르키다모스 전쟁 하(下) 아테네는 그들의 군사 활동을 보이오티아와 아이톨리아로 확대했고, 미틸리니의 반란을 진압하고 펠로폰네소스 주변의 거점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거점 중 하나는 스팍티리아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는 필로스 근처였는데, 그곳에서 첫 번째 전쟁의 진로는 아테네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필로스의 거점군은 스파르타의 가장 약한 곳을 덮쳤다. 스파르타는 시민들이 군인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동안 헤일로타이에 의존했다.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식 체계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이제 필로스의 거점군은 헤일로타이 탈주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근처 아테네군의 존재에 의해 대담해진 헤일로타이의 일반적인 반란에 대한 우려는 스파르타군을 행동하게 만들었다. BC 425년 - 필로스 전투 BC 425년 여름, 에우리메돈과 소포클..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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