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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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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전쟁32

로마의 대외 전쟁 및 전투 1편 - BC 8-6세기 BC 8세기 · 사비니 전쟁 (사비니 여인 약탈) · 카메리움(Camerium) 정복 - 로물루스가 최초로 복속시켰고, 5대 왕 대 타르퀴니우스가 재정복했다. 502년에 일으킨 봉기 이후 파괴되었다 · 피데나이(Fidenae) 및 베이(Veii) 전쟁 - 에트루리아인의 도시 피데나이를 로물루스가 점령한 뒤, 인근의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가 영토에 침입하자 로마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베이 도시 앞에서 격파했다. 도시를 차지할 힘이 부족한 로마가 그 땅을 황폐화하자 베이인은 화평을 제안하고 영토의 일부를 대가로 조약을 맺었다 BC 7세기 · 제2차 피데나이 및 베이 전쟁 -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치세에 피데나이인이 봉기하여 베이의 군대와 함께 전쟁을 일으켰다. 알바 롱가를 복속시킨 툴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2023. 5. 4.
AD 160년대 - 파르티아 제국과 로마 제국의 대결 "사람들 중 파르티아인만이 한결같이 로마인에 맞선 적수였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및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가정교사이자 유명한 서신을 쓴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의 평가였다. 문법가이자 수사학자 및 작가의 파르티아 제국에 대한 위의 평가는 지금은 사라진 역사(프린키피아 히스토리아)의 서문에서 가져왔다. 이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를 찬양하는 부풀린 글에 지나지 않았고 축하보다는 비웃음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주제는 훨씬 더 심각했다. 프론토의 역사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의 거대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AD 2세기 중반, 두 광대한 국가는 다시 한번 충돌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거대하고 지배적인 두 강국은.. 2022. 12. 15.
아케메네스 제국의 위대한 적들 2세기가 넘는 정복 기간 동안, 아케메네스 제국은 여러 유명한 적과 싸웠다.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부터 토미리스 여왕과 같은 스키타이 통치자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는 격렬한 적수들과 충돌했다. 그 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동안, 유명한 레오니다스와 같은 왕에서 밀티아데스 및 테미스토클레스와 같은 장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다.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으로 한때 강력했던 제국이 폐허가 될 때까지 이 치명적인 적들과 싸웠다. 9. 아스티아게스 : 아케메네스 제국의 첫 번째 적 아케메네스 제국이 시작되기 전에 페르시아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의 속국이었다. 키루스 대왕이 아스티아게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메디아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아스티아게스.. 2022. 12. 9.
사비니 여인 약탈 BC 89년 루키우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주조한 2개의 로마 공화국 데나리우스 은화. 둘 다 앞면에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그려져 있다. 뒷면에 로마 병사에게 납치되는 사비니 여인들(위)과 사비니족에게 처벌받는 타르페이아(아래)가 그려져 있다. 사비니 여인 납치 또는 사비니 여인 유괴로도 알려진 사비니 여인 약탈(라틴어 '사비나이 랍타이')은 로마 신화에서 로마의 남자들이 지역의 다른 도시에서 젊은 여자들을 대량으로 납치한 사건이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와 르네상스 이후 시대에 화가와 조각가들의 빈번한 주제가 되었다. "약탈"이라는 단어(유사한 포르투갈어 및 다른 로맨스어에서 "랍토"는 "납치"를 의미)는 사건에 대한 고대 기록에서 사용된 라틴어 랍티오의 일반적인 번역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 단어를.. 2022. 1. 1.
로마에서 유래한 300 BC 5세기 로마 시민의 무장. 청동 투구와 둥근 방패(클리페우스), 창과 짧은 검을 장비했다. 당시 군대는 이 값비싼 장비를 살 수 있는 부유한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BC 5세기 에트루리아의 하급 장교. 호플리테스와 유사한 투구 장식의 유형으로 구별되었다. 방패는 가죽으로 강화되어 있으며 무기는 창과 팔카타 검이었다. BC 479년 또는 477년 베이엔타네스(베이와 그 일대 에트루리아인)는 파비우스 씨족을 압도하여 거의 모든 병사를 학살했다. BC 477년 크레메라 볼스키족과 아이쿠이족에 대한 전쟁에서 로마는 적절한 병력을 지원했지만, 에트루리아 도시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베이와의 전쟁에서는 동맹군으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10 마일 떨어진 바위투성이의 고지에 위치한 .. 2021. 9. 27.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4편 아르키다모스 전쟁 하(下) 아테네는 그들의 군사 활동을 보이오티아와 아이톨리아로 확대했고, 미틸리니의 반란을 진압하고 펠로폰네소스 주변의 거점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거점 중 하나는 스팍티리아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는 필로스 근처였는데, 그곳에서 첫 번째 전쟁의 진로는 아테네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필로스의 거점군은 스파르타의 가장 약한 곳을 덮쳤다. 스파르타는 시민들이 군인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동안 헤일로타이에 의존했다.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식 체계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이제 필로스의 거점군은 헤일로타이 탈주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근처 아테네군의 존재에 의해 대담해진 헤일로타이의 일반적인 반란에 대한 우려는 스파르타군을 행동하게 만들었다. BC 425년 - 필로스 전투 BC 425년 여름, 에우리메돈과 소포클.. 2021. 6. 24.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3편 아르키다모스 전쟁 중(中)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아테네인은 그의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전략에 다소 반대하여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게 전쟁을 가져다주는 보다 공격적인 전략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에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특히 중요했던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강경파 지도자였던 클레온이었다. 영리한 새로운 장군 데모스테네스(후대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와 혼동하지 않도록)가 이끄는 아테네군은 펠로폰네소스에 대한 해군의 급습을 계속하면서 몇몇 성공을 거두었다. BC 428/427년 - 미틸리니 반란 계획과 준비 과두 정권이었던 미틸리니 정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테네에 대한 반란을 고려했지만, 그들이 BC 430년대에 스파르타에 처음 접근했을 때, 스파르타인은 그들을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 2021. 6. 23.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2편 아르키다모스 전쟁 상(上) BC 431-421년 - 아르키다모스 전쟁 코린토스를 제외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거의 전적으로 육지에 기반을 둔 세력이었으며, (전설적인 스파르타 군대 덕분에)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규모 지상군을 소환할 수 있었다. 아테네 제국은 비록 아티카 반도에 기반을 두었지만 에게 해의 섬에 걸쳐 퍼져 있었다. 아테네는 이 섬들로부터 받은 공물로 막대한 부를 얻었다. 아테네는 해군력을 통해 제국을 유지했다. 따라서, 두 세력은 상대적으로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2세 이후 아르키다모스 전쟁(BC 431-421년)으로 알려진 첫 번째 전쟁 동안 스파르타의 전략은 아테네를 둘러싼 영토를 침공하는 것이었다. 이 침략으로 아테네인은 도시 주변의 생산적인 땅을 빼앗겼지만, 아.. 2021. 6. 22.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1편 평화 조약의 와해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년)은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이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맞서 싸운 고대 그리스 전쟁이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전쟁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단계인 아르키다모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아티카를 반복적으로 침공했고, 아테네는 우세한 해군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습격하여 제국의 불안 징후를 억제하려고 했다. 이 전쟁은 BC 421년에 니키아스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조약은 펠로폰네소스에서의 재투쟁으로 인해 곧바로 약화되었다. BC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BC 413년 전군이 격파되면서 공격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이 전쟁은 일반적으로 데켈레이아 전.. 2021. 6. 21.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60-445년)은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특히 테바이와 같은 스파르타의 다른 동맹국들과, 아르고스의 지원을 받는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제2차 신성 전쟁과 같은 일련의 분쟁과 사소한 전쟁으로 이루어졌다. 아테네의 장벽 건설, 메가라의 이탈, 아테네 제국의 성장에 스파르타가 느낀 부러움과 우려 등 전쟁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 460년에 오이노이 전투로 시작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아테네-아르고스 동맹군에 패배했다. 처음에 아테네는 그들의 우수한 함대를 이용하여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전투의 우위를 점했다. 그들은 또한 타나그라에서 스파르타와 그의 동맹군이 아테네 군대를 격파한 B.. 2021. 6. 13.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델로스 동맹 전쟁 하(下) 이집트 캠페인 이집트 캠페인은 일반적으로 BC 460년에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연대마저도 일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때 아테네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와 이미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가 이러한 상황에서 정말로 이집트 캠페인에 전념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따라서 이 캠페인은 BC 462년 스파르타와의 전쟁 전에 시작되었다고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일반적으로 거부되고, 아테네 측에서 이집트 캠페인은 단순히 정치적 기회의 일부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제국의 이집트 사트라피는 특히 반란을 일으키기 쉬웠는데, 그중 하나는 최근인 BC 486년에 일어났다. BC 461년 또는 460년, 이집트 국경에 살고 있는 리비아의 왕 .. 2021. 6. 12.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델로스 동맹 전쟁 상(上)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캠페인 - 트라키아 지역 이온(Eion) 공방전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동맹의 첫 캠페인은 스트리몬 강 하구의 이온 시를 상대로 벌어졌다. 투키디데스는 동맹의 역사에 대한 상세한 연대기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캠페인이 일어난 해는 불확실하다. 공방전은 가을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1년간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역사가들은 BC 477-476년 또는 BC 476-475년을 지지했다. 이온은 도리스코스와 함께 두 번째 페르시아 침공 기간과 후에 트라키아에 남겨진 페르시아의 주둔지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온에 맞선 캠페인은 아마도 트라키아에서 페르시아의 존재를 제거하기 위한 일반적인 캠페인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시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도리스코.. 2021. 6. 10.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아테네의 부상 BC 479-478년 - 그리스의 역습 미칼레와 이오니아 미칼레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에 대한 공세를 펼치게 된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었다. 미칼레에서의 승리의 즉각적인 결과는 그리스 소아시아 도시들 사이의 두 번째 반란이었다. 사모스인과 밀레토스인은 미칼레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적극적으로 싸우면서 공개적으로 그들의 반란을 선언했으며 다른 도시도 그들의 본을 따랐다. 세스토스 미칼레 직후 연합군 함대는 헬레스폰토스로 부교를 파괴하러 갔지만 이미 파괴된 것을 알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인은 고향으로 항해를 했지만, 아테네군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수중에 있는 케르소네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남아있었다. 페르시아와 제국의 동맹들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인 세스토스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는 카르디아의 외.. 2021. 6. 9.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7편 미칼레 전투 BC 479년 6월 - 미칼레 전투 스파르타가 플라타이아로 군대를 보내자 이에 대응하여, 크산티포스 휘하의 아테네 해군은 델로스에 있던 연합군 함대와 합류했다. 그 후 사모스의 대표단이 접근하여 연합군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로 승리할 경우 이오니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들은 더 나아가 페르시아 함대의 사기 저하와 항해에 적합한 상황이 저하된 것을 지적했다. 레오티키데스는 이것을 시도하기로 결심하고 사모스를 향해 항해했다. 전조 페르시아군은 연합군 함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모스에서 이오니아 본토로 출항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는 그들이 회의에서 연합군을 해전에서 이길 수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니키아 배들을 멀리 보내고(헤로도토스는 이유를 설명하지.. 2021. 6. 6.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6편 플라타이아 전투 마르도니오스는 그리스 북부에 있는 아케메네스의 나머지 군대와 함께 남았다. 그는 그리스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최고의 군대들, 특히 불사 부대, 메디아인, 사카족, 박트리아인, 인도인을 선발했다. 헤로도토스는 마르도니오스의 주요 부대의 구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르도니오스는 먼저 불사 부대라 불리는 모든 페르시아인을 선발했다. 왕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 장군 히다르네스만을 제외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페르시아 중기병과 천 마리의 말, 그리고 메디아인과 사카족과 박트리아인과 인도인들, 그리고 그들의 보병과 나머지 기병들을 함께. 그는 이들을 모두 선택하였다. 나머지 동맹국들 가운데서, 그는 각 민족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들과, 그가 잘 지원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뽑았다. 그 결.. 2021.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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