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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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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173

게르마니아 원정 (上) - 바루스의 재앙 로마 공화국은 BC 1세기에 급속하게 확장되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갈리아 전쟁(BC 58-50)에서 서유럽 대부분과 영국 제도 일부를 정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래였다. 갈리아 전쟁은 대부분 갈리아인과 싸우는 것이었지만, 다양한 게르만 부족과의 싸움도 포함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 부족과 싸우기 위해 두 번이나 라인 강을 건넜지만, 교전은 전술적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정복 활동은 카이사르의 내전(BC 49-45)이 가까워지면서 일찍 끝날 수밖에 없었다. 권력 투쟁으로 공화국이 황폐화되면서 유럽 대륙은 갈리아 전쟁 이후 20년 동안 거의 잊혔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간의 마지막 대결을 위해 갈리아 땅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철수했다. 갈리.. 2024. 4. 25.
라이티아 라이티아는 라이티아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서쪽으로 헬베티족 정착지, 동쪽으로 노리쿰, 북쪽으로 빈델리키아(빈델리키족의 땅), 남서쪽으로 트란살피나 갈리아, 남쪽으로 로마 이탈리아 지역인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오늘날 스위스 동부와 중부(라인강 상류와 콘스탄츠 호수 포함), 남부 독일(바이에른 및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대부분), 포어아를베르크 및 오스트리아의 티롤 상당 부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북부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빈델리키아(오늘날 뷔르템베르크 동부와 바이에른 서부)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나중에 이 속주에 합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라이티아의 북방 경계는 다뉴브강이었다. 나중에 다뉴브강에서 북쪽.. 2024. 4. 17.
갈라티아 갈라티아는 아나톨리아(오늘날 튀르키예 중부)에 있던 로마 제국의 속주 이름이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단독 통치 BC 30년-AD 14년)가 켈트족 갈라티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범위로 BC 25년에 설립했으며, 주도는 안키라(오늘날 앙카라)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분통치 개혁에 따라 북부와 남부로 분리되어 파플라고니아 속주의 남부와 리카오니아 속주를 형성했다. AD 398년경, 아르카디우스의 통치기에 갈라티아 프리마 속주와 갈라티아 세쿤다 속주, 즉 살루타리스 속주로 나뉘었다. 갈라티아 프리마는 옛 속주의 북동부에 해당하며, 안키라를 주도로 유지하고 집정관급 총독이 이끄는 곳이었다. 살루타리스는 옛 지방의 남서부 절반을 차지했으며, 페시누스에 자리 잡은 프라이세스(최하급 총독)가 이끄는 곳이었다. .. 2024. 4. 16.
황제들의 포룸 황제들의 궁전이 지어진 팔라티누스 언덕 왼쪽 뒤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궁전이 있고, 전면에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거주한 도무스 아우구스티와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아폴로 신전을 비롯한 신전들이 있는 구역이 있으며, 가운데에는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지은 도무스 플라비아(공적 공간), 도무스 아우구스타나(사적 공간), 스타디움이 있다. 도무스 세베리아나는 20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지은 언덕의 마지막 궁전이다. 바로 옆에 그가 세운 셉티조디움도 있다. 도무스 플라비아 아래에 파이다고기움은 황실과 귀족 자녀 및 궁정에서 일하는 소년들을 위해 그리스어와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 시설이었다. 거대한 궁전들의 언덕은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황제 포룸의 조감도 카이사르가 사재로 포.. 2023. 12. 17.
포룸 로마눔과 원형극장 저택은 넓은 안뜰을 둘러싸고 있으며 방들이 배열되어 있는 커다란 직사각형 건물이다. 안뜰에는 3개의 큰 연못과 명예로운 베스타의 조각상이 있었다. 베스타의 원형 신전이 오른쪽 구석에 있다. 저택 뒤로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은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전 뒤편 부벽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살해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뒤 레피두스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맡았으며 BC 13년 레피두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가 그 자리를 이었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가 겸임했지만 AD 379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직위를 포기하면서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짓고 있던 바실리카 율리아도 그림 위쪽에 나타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부르투스, 너마저"는 로마 역사.. 2023. 12. 15.
콜로세움과 키르쿠스 막시무스 로마에 석조로 된 원형경기장을 짓기 전까지는 시합이 열릴 때마다 포룸과 같은 넓은 터에 목재로 된 간이 경기장을 세웠다.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AD 70년 직후 콜로세움 건설을 시작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가 80년에 문을 열었고 거의 4세기 동안 검투사 경기에 사용되었다. 이 유적은 오늘날에도 고대 로마의 기념물로 남아 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 경기, 아마도 모의 해전(경기장이 물에 잠긴 상태) 및 이국적인 야생 동물 사냥과 같은 대중적 볼거리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지어졌다. 수천의 사람과 동물이 무대 위에서 싸우는 동안 경기장에서 사망했다. 그 웅장함과 거대한 크기는 그 자체로 성과였지만 효율성 또한 경이로웠다. 이 구조물은 중앙 경기장 주변에 약 50,000명의 관중을 위한 3단 좌석(신분에 따라 할.. 2023. 12. 13.
로마 수도교와 대욕장 로마 공학의 경이로움으로 여겨지는 이들은 수원과 샘에서 도시로 물을 수송하여 특히 주민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였다. 40개 이상의 도시에 수로가 있었고 그중 11개는 로마에서 기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는 계속해서 물을 수송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아있는 다른 유적은 유럽,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100만 입방미터의 물이 수로를 통해 로마에 도달했다. · 거대한 아치 다리는 강이나 계곡을 건너는 데만 사용되었지만 건축업자에게는 공학적인 도전이었다. · 캄브라도 이 구조는 아치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 아치 회랑 수도교의 우아한 아케이드는 장애물을 우회할 때만 사용되었다. · 관 재료 수도교는 물이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항상 판석으로 덮여있었다. .. 2023. 12. 9.
로마 민중의 일상 로마의 많은 공공 분수에서 여성들은 물을 길었다 로마의 뒷골목 쓰레기로 뒤덮인 로마의 뒷골목은 흙과 질병, 잔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강도들이 붙잡혔다. 가게 주인과 노점상들은 파는 물건을 외쳤고 수레, 당나귀, 보행자, 길 잃은 돈이 혼잡한 도로에서 함께 뒹굴었다. 때때로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당연히 40세를 넘긴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사람들은 판매대 바깥의 길에서 따뜻한 음식을 샀다 - 와인을 파는 가게 - 구걸하는 아이들은 흔한 광경이었다 - 수레는 좁은 거리를 겨우 통과했다 음식을 파는 가게를 내부에서 본 모습 공동주택 인술라 · 콘크리트로 짓다 건축비를 낮추기 위해 인술라는 부분적으로 나무로 지어졌다. 그러나 정기적인 구조적 손상과.. 2023. 12. 5.
로마 시대의 항구 및 선박 로마 상선이 항구로 입항하고 있다. 콜로니아 간의 무역은 주로 해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 갤리선 : 로마 해군은 해적에 맞서 바다를 순찰하기 위해 갤리선을 사용했다. 노 젓는 사람들은 고도로 훈련된 전문 선원이었다. · 바지선 : 평평한 바닥의 바지선은 강에서 항구로 상품을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 코르비타선 : 이들은 가장 일반적인 유형의 상선이었다. 그들은 느리고 기동성이 떨어졌다. · 돛 : 로마 상선은 하나의 큰 사각형 돛으로 움직였다. 앞쪽의 작은 돛은 배를 조종하는 데 사용되었다. · 거위머리 : 배에는 종종 선원을 보호하는 이시스 여신의 상징인 거위머리 조각이 있었다. · 등대 : 이들은 중요한 항구의 입구에 지어졌다. 불은 꼭대기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화물 용량은 10,.. 2023. 11. 29.
역대 로마 황제 (BC 27-AD 476) - 2편 군인 황제 시대 원수정 시대 BC 27-AD 284년 다섯 황제의 해 (193년) 페르티낙스 이름 :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프라이펙투스 우르바누스(도시 행정관) 재위 : 193년 1월 1일-3월 28일 (2개월 27일) 출생 : 126년 8월 1일 알바 폼페이아,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사망 : 193년 3월 28일 로마, 근위대에 살해됨, 66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이름 : 마르쿠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경매로 황제에 오름 재위 : 193년 3월 28일-6월 2일 (66일) 출생 : 133/137 1월 29일 메디올라눔,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사망 : 193년 6월 2일 로마, 궁전에서 병사에게 살해됨, 56/60세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이름 : 가이우스 페스켄.. 2023. 5. 15.
역대 로마 황제 (BC 27-AD 476) - 1편 팍스 로마나 (Pax Romana) 원수정 시대 BC 27-AD 284년 율리우스-클라우디스 왕조 (BC 27-AD 68년) 초대 아우구스투스 이름 :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재위 : BC 27년 1월 16일-AD 14년 8월 19일 (40년 7개월 3일) 출생 : BC 63년 9월 23일 로마,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사망 : 14년 8월 19일 놀라, 자연사, 76세 2대 티베리우스 이름 :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 재위 : 14년 9월 17일-37년 3월 16일 (22년 5개월 27일) 출생 : BC 42년 11월 16일 로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사망 : 37년 3월 16일 미세눔, 자연사, 77세 3대 칼리굴라 이름 :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의 종손 재위 : 37.. 2023. 5. 13.
고대 로마인이 구글맵을 가지고 있었다면 옴네스 비아이(Omnes Viae)는 로마 제국의 도로를 기반으로 한 현대적인 루트 플래너이다. 로마인이 자신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던 이 루트 플래너를 활용하여 로마 제국을 횡단하는 도로 여행을 계획해 보자. (출처 - 옴네스비아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은 스크롤에 능숙했다. 다만 그들은 실제로 다루기 힘든 스크롤(두루마리)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로마 도로만을 위한 편리한 온라인 루트 플래너인 옴네스 비아이를 좋아했을 것이다. 편리하지만 제국을 횡단하는 것은 여전히 25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오르텔리우스의 유명한 1598년판 포이팅거 지도, 각각 두 부분으로 된 네 장의 다채로운 시트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RareMaps.com / 퍼블릭 도메인) BC 20년, .. 2023. 5. 6.
로마의 대외 전쟁 및 전투 1편 - BC 8-6세기 BC 8세기 · 사비니 전쟁 (사비니 여인 약탈) · 카메리움(Camerium) 정복 - 로물루스가 최초로 복속시켰고, 5대 왕 대 타르퀴니우스가 재정복했다. 502년에 일으킨 봉기 이후 파괴되었다 · 피데나이(Fidenae) 및 베이(Veii) 전쟁 - 에트루리아인의 도시 피데나이를 로물루스가 점령한 뒤, 인근의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가 영토에 침입하자 로마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베이 도시 앞에서 격파했다. 도시를 차지할 힘이 부족한 로마가 그 땅을 황폐화하자 베이인은 화평을 제안하고 영토의 일부를 대가로 조약을 맺었다 BC 7세기 · 제2차 피데나이 및 베이 전쟁 -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치세에 피데나이인이 봉기하여 베이의 군대와 함께 전쟁을 일으켰다. 알바 롱가를 복속시킨 툴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2023. 5. 4.
로마의 기어 : 고대 로마 원로원 의원의 하루 로마 원로원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기관 중 하나였다. 원로원은 로마의 시초에 세워졌고, 로마 군주제의 몰락, 로마 공화정의 몰락, 제국의 분열, 그리고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서도 살아남았다. 공화정 기간 동안 권력의 상승을 달성했고 중세 초기에 마침내 약화되었다. 이 글에서, 로마 공화정 시대로부터 원로원 의원의 삶에서 매혹적인 하루를 탐구할 것이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무엇을 했는가? 원로원은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원로원이라는 단어가 라틴어(세넥스/Senex)로 "노인"을 의미하는 이유이다. 로마 원로원의 주요 기능은 법령을 논의하고 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원로원의 콘술(집정관)이나 지도자들이 승인하거나 거부(라틴어 베토/Veto)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2023. 4. 5.
중세 로마 제국 - 비잔틴 제국을 형성한 5대 전투 636년 야르무크에서 일어난 재앙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도 알려진 비잔틴 제국은 아랍 침공군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8세기 초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의 부유한 속주들은 영원히 사라졌다. 제국군이 완전히 물러나자 아랍군은 제국의 심장부인 아나톨리아로 이동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두 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난공불락의 성벽 덕에 구해졌다. 서방에서는 다뉴브 국경이 무너져 불가르인이 발칸반도에서 그들의 왕국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틴은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9세기와 10세기 사이에 반격을 가하며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제국 행정의 군사화, 군대의 재편, 그리고 노련한 외교는 강력한 중세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적을 물리칠 때마다 셀주크, 노르만, 베네치아, 오스..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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