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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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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유럽22

중세 도시 생활 중세 도시의 부분 단면도 그림은 대장간, 빵집, 여관 및 상점으로 둘러싸인 시장을 보여준다. 배경에 대성당과 영주의 성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며 살았지만, 특히 AD 1000년 이후에는 도시들이 점점 더 커지고 중요해졌다. 그렇지만, 1500년까지 도시 인구는 여전히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는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장인들이 살고 일하는 곳이었다. 부유한 상인의 집과 같은 일부 고급 건물은 값비싼 돌로 지어졌다. 가난한 집들은 초벽(워틀과 도브)이라고 불리는 나뭇가지와 회반죽을 바른 벽이 있는 값싼 목재로 만들어졌다. 건물 중앙의 석조 교회는 도시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었다. 교회는 도시와 그 영주가 얼마나 번창하는지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지어졌다. 도.. 2024. 3. 19.
중세 로마 제국 - 비잔틴 제국을 형성한 5대 전투 636년 야르무크에서 일어난 재앙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도 알려진 비잔틴 제국은 아랍 침공군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8세기 초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의 부유한 속주들은 영원히 사라졌다. 제국군이 완전히 물러나자 아랍군은 제국의 심장부인 아나톨리아로 이동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두 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난공불락의 성벽 덕에 구해졌다. 서방에서는 다뉴브 국경이 무너져 불가르인이 발칸반도에서 그들의 왕국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틴은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9세기와 10세기 사이에 반격을 가하며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제국 행정의 군사화, 군대의 재편, 그리고 노련한 외교는 강력한 중세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적을 물리칠 때마다 셀주크, 노르만, 베네치아, 오스.. 2023. 1. 11.
유럽의 경계 변화 유럽 대륙의 역사는 놀랍도록 복잡하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유럽 국가의 국경이 수없이 바뀌었다. 아래는 유럽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국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중세 유럽 (5세기-15세기) 중세시대는 서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 수많은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이 남긴 지역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로마의 직접적인 속편인 여전히 크고 튼튼한 비잔틴 제국은 동부 지중해에 남아 상당한 세력을 유지했다. 1000년 유럽 근세 유럽 (15세기 후반-18세기 후반) 근세 유럽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레콩키스타의 종식을 시작으로 하는 유럽 역사의 한 시기이다. 봉건주의는 쇠퇴했다. 1500년 유럽 유럽에서 치열한 30년 전쟁이 발발했고, 베스트.. 2022. 11. 9.
바이킹의 유럽 침공 기독교 유럽에 야만인들이 침공한 이후 정착하고 이슬람 군대의 맹공이 뒤따랐던 것처럼, 새로운 야만인 침략자들의 물결은 바이킹의 형태로 북쪽에서 밀려왔다. 이 습격자들은 현재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라고 부르는 나라에서 왔다. 노르드인(북방인)은 숙련된 장인, 항해사, 선원이었다. 바이킹의 랑스킵(긴 배)은 바다와 대양을 항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얕은 강과 개울에서 기동 할 수 있었다. 이 약탈자들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어 보였다. 노르드인은 많은 신과 여신을 믿었다. 오딘은 그들 신들의 우두머리였다. 바이킹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도원은 구획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리품을 얻기 위한 이 약탈자들의 가장 좋은 표적이었다. 바이킹은 잉글랜드 동부 해안의 작은 섬에 있는 린디스판 수도원을 .. 2022. 9. 25.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서로마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로마군은 410년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철수했다.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로마화 된 켈트족으로 이루어진 이 속주의 시민들은 육지와 바다에서 오는 일련의 침략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이 침략자들은 스코틀랜드의 픽트족, 덴마크, 네덜란드, 북부 독일의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 다른 소규모 집단을 포함했다. 이 침략자들은 일반적으로 이교도였고 브리튼인을 정복한 로마인이 그동안 세운 기독교 신앙을 존중하지 않았다. 500년대의 한 전설은 침입한 앵글로색슨족에 맞서 일련의 승리를 거둔 로마화 된 켈트족인 아서(Arthur)라는 이름의 왕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서 왕의 전설은 중세 시대에 성장했지만, 그의 몇 번의 승리는 침략자들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서 이후, 브리튼.. 2022. 9. 24.
메로베우스(메로빙거) 프랑크 왕국 - 갈리아의 정복자 노쇠한 서로마 제국에 쏟아져 들어온 야만인 중 한 집단은 프랑크족이었다. 이 집단의 초기 역사나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크족은 중세 초기에 서유럽의 역사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랑크족은 고대 로마 갈리아에 정착했다. 프랑크족에 대한 초기 기록 중 하나는 451년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어린 시절 친구인 훈족의 아틸라를 물리친 샬롱 전투이다.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은 로마 편에서 싸웠다. 전장의 한 프랑크인은 메로베크(메로베우스)였다. 프랑크족은 많은 부족으로 나뉘었고, 각 부족에는 그들의 왕이 있었다. 메로베크는 프랑크족의 살리 부족의 왕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으로 메로베크는 신화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살리(Salii)는 "바다.. 2022. 9. 23.
중세 의복 중세 패션으로부터 시작하여 활기차고 멋진 1960년대에 끝나는 시리즈 중 이 글에서는 노르만인부터 중세 및 중세에서 15세기 말까지의 영국 패션에 대해 다룬다. 1050년경 일상복 이 남성과 여성(왼쪽)은 1066년 노르만인의 정복 직전인 105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기본적인 중세 의복으로, 아마 양모로 만든 튜닉이 목을 덮고 긴 소매가 살짝 체형을 살리며, 일반적으로 리넨 셔츠 위에 입었다. 남성의 튜닉과 비슷하지만 더 긴 여성의 튜닉은 어깨에 반원형의 맨틀이 고정되어 있다. 여자는 긴 머리를 밴드로 묶은 후드로 가리고 여행용 주머니를 들고 다녔다. 남자는 헐렁한 호스(하의)와 가죽 신발을 신었다. 앵글로 색슨족은 남성의 튜닉을 장식하는 것과 같은 자수와 땋는 솜씨로 알려져 있었다. 1150년경.. 2022. 8. 7.
위대한 셀주크 튀르크 제국의 역사 및 사실 11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서부로 이주한 투르크멘 부족은 이란의 도시 이스파한에 군사적으로 강하고 문화적으로 발전했으며 종교적으로 관대한 국가를 세웠다. 셀주크 제국으로 알려진 이 국가는 바그다드에 살고 있던 아바스 왕조 칼리파에 의해 이슬람의 수호자로 선언되었으며 성지를 지배했다. 서부 튀르크족의 조상으로서, 그들은 문화를 혼합하고 오늘날 터키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혼합된 기풍을 만들었다. 비잔틴 국경으로 진격한 셀주크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는 셀주크의 지도자 투으룰(토그릴)에게 "동서의 왕"이라는 인상적인 칭호를 부여하여 셀주크 군주를 일시적인 대리자로 임명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아르메니아와 조지아(1064년)를 추가함으로써 토그릴의 영지를 크게 확장했다. 그는 1068년 비잔틴 제국의 동부 변방을.. 2022. 1. 25.
비잔틴 제국에 대해 모를 수도 있는 10가지 비잔틴 제국은 고대 말과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나머지 부분이었다. 여기에 비잔틴 제국에 대해 모를지도 모르는 것들이 있다. 1. 비잔티움은 BC 657년 메가라에서 온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세운 고대 그리스 도시이다. 이 도시는 AD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에 의해 비잔틴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재건되었고 그를 기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2. 비잔틴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단 것과 디저트를 사랑했다. 비잔틴 사람들은 꿀과 계피를 곁들인 쌀 푸딩을 즐겨 먹었다. 3. 비잔티온은 메가라의 식민지 개척 지도자이자 도시의 설립자인 비자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비잔티움"의 형태는 그리스어 비잔티온을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4. 거의 200년에 이르는 가장 긴 비잔틴 .. 2022. 1. 9.
루스와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기원 루스는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카자크와 마찬가지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금은 "루스" 이름이 BC 2세기부터 키이우 남쪽 우크라이나 중부에 정착한 사르마티아 부족 록솔라니에서 유래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이 지역에는 로스, 로사와, 로스타비차, 루테츠 등과 같은 이름을 가진 강이 있다. 오래전부터 루스는 키이우, 체르니히우, 페레야슬라프 공국 즉 오늘날의 키이우, 지토미르, 체르니히우, 수미의 일부, 체르카시, 빈니차, 폴타바 주의 중앙 우크라이나에만 사용되었다. 12세기부터는 우크라이나 서부까지 확장되었다. 대공들은 루스가 그들의 고향('봇치나' 유산)이라고 믿었다. 다른 속령들은 루스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키이우 루스의 시대에는 우크라이나 백성을 루시니(드물게 루시)라고 불렀다. .. 2021. 12. 20.
12세기 전반기 키이우(키예프)의 대공들 볼로디미르 모노마흐 볼로디미르 모노마흐(모노마코스 가문 출신의 비잔틴 공주인 그의 모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는 1113-1125년까지 키이우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승리를 거두고 공정했다. 그는 자녀들을 위한 지침서(위의 사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총 83번의 대규모 캠페인을 진행했으며 얼마나 많은 소규모 캠페인을 벌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인본주의자로 남았다. 사형제도(심지어 치명적인 것도 포함하여)를 폐지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옳은 사람이나 죄가 있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말라. 만약 [누군가] 죽어 마땅하더라도, 어떠한 기독교인도 죽이지 말라." 볼로디미르 모노마흐는 채무자들에 대한 구타를 금지하는 특별법을 발표했고, 지주들이 .. 2021. 12. 19.
루스인과 튀르크계 유목민 유목민에 대한 루스의 승리 AD 4세기부터 6세기까지 호전적인 수많은 튀르크족 무리가 우크라이나 스텝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풍부한 목초지와 슬라브족 땅과 비잔티움 국경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에 끌렸다. 페체네그족은 9세기 후반부터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강력한 부족은 특히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다. 1036년 키이우 근교에서 패배한 후, 그들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11세기 중반, 쿠만족은 우크라이나 스텝을 침공하여 남아 있던 페체네그족을 규합했다. 쿠만 무리의 중심지는 돈바스와 슬로보다 우크라이나였다. 1090년대에 쿠만족은 키이우 외곽을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키이우군은 1103년 몰로츠나 강(오늘날 자포리자 주)과 1107년 루브니 근처에서 쿠만족을 물리쳤다. 이.. 2021. 12. 18.
키이우(키예프) 공국의 확장 스뱌토슬라프 대공의 잘레시에와 크리미아 정복 바랑기아 대공들은 슬라브족과 빠르게 섞였다. 이호르(잉바르)와 올하의 아들인 용맹공 스뱌토슬라프는 류리크 왕조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슬라브식 이름을 얻은 군주였지만(바랑기아 인들은 여전히 그를 스바이날드 잉바르손이라고 불렀다) 그의 어머니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뱌토슬라프는 평생 동안 독실한 이교도로 남아 있었다. 연대기는 그의 용감함을 지적하며, 그는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에 적들에게 "내가 당신에게 간다"라고 경고했다. 비잔틴 역사가 레온 디아코노스는 자신의 눈으로 스뱌토슬라프를 직접 보았다. 그의 묘사는 긴 콧수염, 면도한 머리에서 돋아난 긴 머리 모양, 한쪽 귀에 귀걸이를 하고 하얀 셔츠를 입은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용맹공.. 2021. 12. 17.
키이우(키예프)와 우크라이나 민족, 바랑기아 대공의 기원 키이우의 건설 다뉴브 강 지역에서 벌어진 작전에 참여한 안타이 영주 중 한 명은 폴리아니 부족 출신의 영주 키이였다. 그가 세운 키이우는 언덕 위에 있어 방어에 편리했다. 흑해와 발트해, 데스나 강 등 많은 무역로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 루스의 원초 연대기(고대 우크라이나 연대기)에 따르면, 키이우 언덕에 세 명의 폴리아니 영주 키이, 슈체크, 호리브가 세 개의 다른 요새(각각 자신의 요새)를 세웠으며, 나중에 맏형의 지도하에 하나의 도시를 형성했다고 한다. 이는 로마 제국이 동부와 서부로 분열된 후(395년), 대략 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에 일어났다. 키이 영주는 다뉴브 강에 키이우인의 도시를 세웠다. 연대기에 따르면, 키이는 상당히 중요한 통치자로 비잔틴 황제와 개인적으로 만났다. 삼 형제와 "팔.. 2021. 12. 16.
프랑크의 전쟁 방식 보병 또는 기병? 일반적으로 (고트족 및 반달족과 같은 동부 게르만 부족과는 달리) 프랑크족, 알라만니족, 부르군트족, 그리고 다른 서부 게르만족은 기병보다는 주로 보병으로 싸웠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잠시 동안 우크라이나의 초원지대에서 살았던 많은 동부 게르만족은 좋은 말 떼를 기르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공간과 목초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5세기 초 동고트족과 같은 일부 부족이 훈족을 따라 헝가리 평원으로 들어갔을 때도 남아있었다. 그들이 살았던 탁 트인 공간 또한 필수적으로 말에 타는 이동성을 매우 중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라인 강 동쪽 기슭의 숲이 우거진 구릉지가 비교적 많이 있는 곳에 살았던 서부 ..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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