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728x90

유럽/중세유럽25

중세 후기 유럽 1477년의 프랑스 지도(프랑스어 라벨이 붙어 있는). 당시 이 나라는 공작령과 백작령 등 봉건 영토들의 모자이크였다. 1328년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통치를 시작한 발루아 가문은 백년전쟁 동안 잉글랜드 침략군과 그 강력한 동맹국인 부르고뉴의 큰 도전에 직면했다. 1415년 아쟁쿠르에서 잉글랜드가 압승을 거둔 이후, 잔다르크의 등장은 1429년부터 프랑스에게 유리하도록 전쟁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와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서로의 차이점을 해결하고 잉글랜드로부터 프랑스의 넓은 지역을 탈환했다. 잉글랜드, 프랑스 및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아라곤, 카스티야, 포르투갈)과 같은 왕국들은 중세 후기(1250-1500)에 계속해서 힘을 강화했다. 이 시기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왕.. 2024. 3. 26.
중세 성기 유럽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1198년부터 1216년 사망할 때까지 카톨릭 교회의 수장이었다. 중세 교황들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 중 한 명인 그는 유럽의 왕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남부 프랑스의 알비 십자군뿐만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와 성지의 무슬림 통치자들을 상대로 십자군을 지휘했다. 그는 또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끝난 제4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제외하면, 중세 성기(1000-1250) 동안 유럽으로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왕국들은 국경을 설정하거나 확장을 시도하며 이웃 국가와 갈등을 일으켰다. 이 시기 동안 권력의 정점에 이른 카톨릭 교회는 유럽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셀주크 튀르크에 맞서는 일련의 십.. 2024. 3. 23.
중세 초기 유럽 토틸라(바두일라라고도 불림)는 동고트의 왕(541-552)이었다. 토틸라는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비잔틴 제국 군대에 맞섰다. 543년에 그는 제국이 동고트 왕국을 점령했을 때(540년) 잃어버린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 그는 계속해서 546년과 549년에 로마를 탈환했다. 동고트군은 552년 타기나이 전투에서 거대한 비잔틴 군대에게 짓밟혔고, 토틸라는 목숨을 잃었다. 동고트의 저항은 새로운 왕 테이아스가 이듬해 벌어진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중세 시대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후반부터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는 15세기 후반까지의 유럽 역사 시기이다. 이 시기는 한 때 "암흑시대"로 알려진 중세 초기(5세기 후반-10세기), 중세 성기(.. 2024. 3. 22.
중세 도시 생활 중세 도시의 부분 단면도 그림은 대장간, 빵집, 여관 및 상점으로 둘러싸인 시장을 보여준다. 배경에 대성당과 영주의 성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며 살았지만, 특히 AD 1000년 이후에는 도시들이 점점 더 커지고 중요해졌다. 그렇지만, 1500년까지 도시 인구는 여전히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는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장인들이 살고 일하는 곳이었다. 부유한 상인의 집과 같은 일부 고급 건물은 값비싼 돌로 지어졌다. 가난한 집들은 초벽(워틀과 도브)이라고 불리는 나뭇가지와 회반죽을 바른 벽이 있는 값싼 목재로 만들어졌다. 건물 중앙의 석조 교회는 도시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었다. 교회는 도시와 그 영주가 얼마나 번창하는지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지어졌다. 도.. 2024. 3. 19.
중세 유럽 기사들의 마상 창 시합. 마상 창 시합은 기사들이 연습한 자신의 기술을 뽐낼 수 있는 기회인 토너먼트, 즉 마상 시합에서 열렸다. 마상 창 시합은 300보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말에 올라탄 두 명의 기사가 틸트라고 불리는 장벽의 양쪽에서, 리스트라고 불리는 좁은 레인을 따라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그 목적은 둔탁한 나무로 된 랜스(긴 창)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AD 500년경부터 1500년경까지의 기간을 미들 에이지스, 또는 메디블 피리어드라고 한다. 중세는 로마 제국이 붕괴된 뒤 시작되어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끝났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의 초기 부분은 바이킹 습격과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을 포함한 침략의 시기였다. 후기 세기에는 잉글랜드와 프.. 2024. 3. 16.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침공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이야기는 100년 전 앨프레드 대왕이 잉글랜드가 침략받는 것을 보았듯이, 잉글랜드의 왕 애설레드가 바이킹 침략자들에게 자신의 왕국이 공격받는 것을 발견했을 때인 900년대 후반에 시작된다. 바이킹에게 대패한 후, 애설레드는 "데인겔트"라고 불리는 공물로 바이킹에게 보상하려고 했다. 이는 더 많은 바이킹의 공격을 부추겼을 뿐이다. 애설레드는 바이킹에게 조공을 계속 제공하기 위해 잉글랜드인들의 세금을 올려야 했다. 애설레드는 동맹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는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했다. 노르망디는 프랑스 북부의 공국이었고, 강력한 노르망디 공작은 자신의 여동생과 잉글랜드 왕의 결혼을 제안했다. 노르만인은 프랑스에 정착한 옛 바이킹이다. 결혼 후, 노르망디 공작은.. 2022. 9. 25.
바이킹의 유럽 침공 기독교 유럽에 야만인들이 침공한 이후 정착하고 이슬람 군대의 맹공이 뒤따랐던 것처럼, 새로운 야만인 침략자들의 물결은 바이킹의 형태로 북쪽에서 밀려왔다. 이 습격자들은 현재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라고 부르는 나라에서 왔다. 노르드인(북방인)은 숙련된 장인, 항해사, 선원이었다. 바이킹의 랑스킵(긴 배)은 바다와 대양을 항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얕은 강과 개울에서 기동 할 수 있었다. 이 약탈자들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어 보였다. 노르드인은 많은 신과 여신을 믿었다. 오딘은 그들 신들의 우두머리였다. 바이킹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도원은 구획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리품을 얻기 위한 이 약탈자들의 가장 좋은 표적이었다. 바이킹은 잉글랜드 동부 해안의 작은 섬에 있는 린디스판 수도원을 .. 2022. 9. 25.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와 카롤루스(카롤링거) 제국 메로빙거조 프랑크 왕국은 강력한 왕조로 시작했지만,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너무 약해서 장발 왕들의 별명이 게으름뱅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왕들(rois fainéants)로 바뀌었다. 이 왕들은 너무 게으르고 나약해서 프랑크 제국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업무는 실제로 전투에서 프랑크 군대를 이끄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수행했던 관료인 궁재의 어깨에 놓였다. 샤를 마르텔(해머)/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이러한 궁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732년, 그는 투르에서 무어인들의 침략군에 맞서 프랑크군을 놀라운 승리로 이끌었고, 그들을 스페인으로 돌려보냈다. 프랑스에서 기독교는 구원을 받았고 마르텔은 전설이 되었다. 샤를 마르텔은 해머라는 칭호를 즐겼지만, 그는 결코 왕의 칭호를 받지 않.. 2022. 9. 25.
무함마드와 이슬람 무함마드는 가장 빠르게 성장한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이다. 여기에서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 원리에 대해 더 배울 것이며, 또한 이슬람이 중세 초기에 어떻게 제국으로 성장했는지 볼 것이다.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570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고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무함마드는 대상(캐러밴)을 이끌고 사막을 가로질러 물건을 옮기면서 상인 무역을 배우며 자랐다. 사막을 통과하는 교역로는 짐승에게 물을 주기 위해 여러 오아시스에 들를 필요가 있었다. 이 오아시스 중 하나가 무함마드의 출생지인 메카였다. 상인들은 카라반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며 오아시스에 들른다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메카는 오아시스일 뿐만 아니라 운석일 가능성이 .. 2022. 9. 24.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은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의 다른 이름이다. 로마를 포함한 로마 제국의 더 약한 서부 지역은 야만적인 침략자들에게 함락되었다. 로마 제국의 남은 부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가 통치했다. 비잔틴 제국은 1,000년 더 버티다가, 마침내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게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골든 혼 등 세 개의 수역으로 둘러싸인 반도에 건설되었다. 붐이라고 불리는 쇠사슬이 골든 혼을 가로질러 적함들이 그 지역으로 항해하는 것을 막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잔틴 제국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겼지만, 동방은 서방의 라틴보다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말하고 그리스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황제와 황후는 값비싼 슬리.. 2022. 9. 24.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서로마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로마군은 410년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철수했다.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로마화 된 켈트족으로 이루어진 이 속주의 시민들은 육지와 바다에서 오는 일련의 침략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이 침략자들은 스코틀랜드의 픽트족, 덴마크, 네덜란드, 북부 독일의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 다른 소규모 집단을 포함했다. 이 침략자들은 일반적으로 이교도였고 브리튼인을 정복한 로마인이 그동안 세운 기독교 신앙을 존중하지 않았다. 500년대의 한 전설은 침입한 앵글로색슨족에 맞서 일련의 승리를 거둔 로마화 된 켈트족인 아서(Arthur)라는 이름의 왕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서 왕의 전설은 중세 시대에 성장했지만, 그의 몇 번의 승리는 침략자들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서 이후, 브리튼.. 2022. 9. 24.
메로베우스(메로빙거) 프랑크 왕국 - 갈리아의 정복자 노쇠한 서로마 제국에 쏟아져 들어온 야만인 중 한 집단은 프랑크족이었다. 이 집단의 초기 역사나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크족은 중세 초기에 서유럽의 역사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랑크족은 고대 로마 갈리아에 정착했다. 프랑크족에 대한 초기 기록 중 하나는 451년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어린 시절 친구인 훈족의 아틸라를 물리친 샬롱 전투이다.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은 로마 편에서 싸웠다. 전장의 한 프랑크인은 메로베크(메로베우스)였다. 프랑크족은 많은 부족으로 나뉘었고, 각 부족에는 그들의 왕이 있었다. 메로베크는 프랑크족의 살리 부족의 왕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으로 메로베크는 신화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살리(Salii)는 "바다.. 2022. 9. 23.
중세 의복 중세 패션으로부터 시작하여 활기차고 멋진 1960년대에 끝나는 시리즈 중 이 글에서는 노르만인부터 중세 및 중세에서 15세기 말까지의 영국 패션에 대해 다룬다. 1050년경 일상복 이 남성과 여성(왼쪽)은 1066년 노르만인의 정복 직전인 105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기본적인 중세 의복으로, 아마 양모로 만든 튜닉이 목을 덮고 긴 소매가 살짝 체형을 살리며, 일반적으로 리넨 셔츠 위에 입었다. 남성의 튜닉과 비슷하지만 더 긴 여성의 튜닉은 어깨에 반원형의 맨틀이 고정되어 있다. 여자는 긴 머리를 밴드로 묶은 후드로 가리고 여행용 주머니를 들고 다녔다. 남자는 헐렁한 호스(하의)와 가죽 신발을 신었다. 앵글로 색슨족은 남성의 튜닉을 장식하는 것과 같은 자수와 땋는 솜씨로 알려져 있었다. 1150년경.. 2022. 8. 7.
바이킹의 팽창 바이킹은 중세 유럽의 위대한 약탈자, 상인, 탐험가, 그리고 정착민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 기반을 둔 그들은 브리튼 제도,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프랑스, 지중해 및 러시아에 전초기지를 세웠다. 그들은 아마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거의 500년 전에 북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이었을 것이다.  아래 유럽 지도는 중세 초기 바이킹의 팽창을 보여준다. 바이킹 확장은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단계는 서로 다른 동기, 활동, 목적지로 특징지어진다. 바이킹 확장의 주요 단계는 다음과 같다.·초기 습격(8세기 후반-9세기 중반): 최초의 바이킹 습격은 산발적이고 주로 브리튼, 아일랜드 및 카롤루스 제국의 해안 지역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습격은 귀금속, 노예 및 기타 .. 2022. 3. 11.
450-700년 앵글로색슨의 정복 450-475년 브리타니아의 로마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410년에 끝났지만, 실제로 로마 브리튼인은 한동안 그들 스스로 통치했고 어쨌든 409년에 그 행정부를 축출했다. 380년대에 브리타니아의 서부와 북부 국경을 확보했던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재편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북부 브리튼은 살아남은 후손들 사이에서 점차 조각조각 나누어지면서 파편화되고 있었다. 마지막 분열은 470년경에 온 것으로 보이며 에브로크는 서쪽 지역인 페닌네스를 잃었다. 마찬가지로 포이스도 보르티게른과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의 내전 이후 둘로 나뉘었다. 때때로 '중부 브리튼'으로 분류되었던 고도로 문명화된 서브-로마 브리튼의 심장부인 이 지역은 분명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에 있었다. 색슨 해안을 따라, 이전의 라이티(야만인 용병을 지칭.. 2022. 1. 6.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