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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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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고대유럽10

로마와 프랑키아의 오랜 전쟁 훈족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게르만족들을 로마로 밀어냈다. 로마화 된 프랑크족은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갈리아를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프랑크족이 더 성공적일수록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로마가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에서는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로, 콘스탄티누스의 치세 말부터 갈리아에서 로마의 권위가 이양되기까지 나아갈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사망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몰락까지 프랑크족과 로마인은 갈리아가 새로운 프랑키아(프랑크족의 땅)로 변모함에 따라 전자가 국민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후자를 대체하는 긴 과정에 관여했다. 이 과정은 로마가 내전에 휘말릴 때마다 라인 강 건너의 프랑크족이 갈리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종종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프랑크족은 알레만니.. 2022. 8. 28.
신과 갈리아 기독교가 마침내 중심무대에 섰다! 2-3세기 동안 갈리아는 수많은 성인과 기적을 얻었고 기독교 세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박해와 이단은 신자들을 위협한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177년부터 콘스탄티누스 치세까지 갈리아 기독교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여러 에피소드 동안 기독교는 더 큰 서사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이제 마침내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가질 때가 되었다. 마지막은 아니다. 기독교는 3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세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는 신자들의 비밀스러운 작은 모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종교로 빠르게 변모했다. 2세기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 동부에 널리 퍼졌다. 3세기에 이르러는 로마의 다신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및 일련의 신비주의 .. 2022. 8. 24.
로마 브리타니아 연대표 BC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잉글랜드 해안선에 상륙한 때부터 AD 410년의 유명한 '자신의 방어선을 지켜라'는 편지에 이르기까지, 로마인은 400년 이상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글에서, 종종 험난한 관계의 우여곡절을 살펴본다! BC 55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방문이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브리튼 섬에 대한 최초의 로마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BC 54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두 번째 원정; 다시 말하지만, 침공은 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BC 27년 -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로마 황제가 되었다. AD 43년 -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4개 군단에 브리튼을 정복하도록 명령했다. 43년 (8월) - 로마군이 에식스주 콜체스터에 있는 카투벨라우니 부족의 수도를.. 2022. 8. 3.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침공하여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로마화 하기로 결심한다. 가족극과 반란은 게르만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준다. 다음은 로마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자 갈리아, 로마 및 유럽의 역사를 정의하는 순간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이방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쉽지만 유지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정복된 문화가 정복자들과 완전히 다를 때 더 복잡해진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로마의 장군이자 제국의 계승자인 드루수스는 BC 9년에 서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여 마그나 게르마니아에 대한 로마 통치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게르마니아가 정복될 경우 갈리아 반군은 갈리아 전쟁 동안 가끔 그랬던 것처럼 게르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능력을 잃게 된.. 2022. 6. 23.
팍스 갈리아 - 로마 갈리아로 재건 카이사르가 내전을 일으켰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또 다른 내전을 시작했으며,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로마 전쟁 내내 갈리아는 치유됨에 따라 비교적 평화롭게 남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퇴역 군인들의 재정착과 대규모 신도시 건설을 시작으로 갈리아에 대한 로마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갈리아는 대략 10년간의 잔혹한 전쟁 끝에 폐허가 되었다. 갈리아는 로마의 대규모 침공, 게르만족의 거듭된 침공, 수많은 부족 간 내전을 겪었다. 그 결과 인구의 20%가 죽거나 노예로 팔렸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러나 BC 50년 갈리아 부족들이 독립을 포기하고 마지막 주요 봉기가 진압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2022. 6. 2.
AD 43-425년 로마 브리타니아 AD 43년 로마인은 시즌 후반에 군대를 3개(그중 하나는 브리튼인의 허를 찌르기 위한 속임수였을 수도 있음)로 나누어 도착했다. 그들은 켄트의 리치보로와 웨스트서식스의 치체스터에 상륙했고, 처음에는 싸울 상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브리튼인은 매우 현명하게 언덕과 습지로 이동하여 로마군이 보급품을 다 소모하길 바라며 시야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군은 카투벨라우니의 토고둠누스와 그의 형제 카라타쿠스를 상대로 승리를 기록했고, 카라타쿠스에 대한 승리는 아마도 켄트에서였을 것이다. 도분니의 구성원들은 (아마도 사절을 통해) 즉시 항복했고, 카투벨라우니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투벨라우니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아마도 켄트의 메드웨이 강에서 로마군을 만나 비.. 2022. 1. 5.
BC 55-AD 43년 로마 이전의 브리튼 BC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55년 켄트 해안에 상륙했을 때, 그는 대륙에 있는 가까운 친척들의 방식을 통해 남동부 브리튼인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대비하지 못한 것은 영국해협이었고, 일부 악천후로 인해 거의 대가를 치를 뻔했다. 그의 이번 탐사는 켄트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1년 후 그가 돌아왔을 때, 훨씬 더 많은 병력과 몇 가지 문제들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훨씬 더 나은 발상과 함께였다. 그는 빠르게 칸티아키 부족을 물리치고 템스 강을 향해 진격하여 오늘날 에식스주의 브렌트포드에서 강을 건넜다. 그는 남쪽에 있는 6개 부족으로부터 사절과 친선을 제의받았지만, 언급한 브리튼 부족의 이름(지도에 표시되지 않음)은 추후 어떠한 .. 2022. 1. 5.
고대 유럽의 부족(部族, tribe) BC 800-400년 이탈리아 철기 시대 에트루리아(지도의 주황색 영역)는 도시 국가의 집합체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그중 12개 도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의 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에트루리아 동맹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도데카폴리스로 알려져 있다. 에트루리아의 지배력은 이탈리아 중서부와 베네티족(현재의 베네치아 주변)을 향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서쪽 해안을 따라 나폴리까지 뻗어 있었다. 알라리아가 코르시카 동부를 지배하여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과 이탈리아 남부 및 시칠리아의 그리스인과 경계를 이루는 반원형의 영토를 완성했다. 다른 두 개의 에트루리아 동맹도 결성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남쪽의 캄파니아였으며, 카푸아 도시 국가(지금의 나폴리도 포함됨)가 이끌었다. 이 동맹은 그.. 2021. 12. 29.
갈리아의 그리스 제국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은 오늘날 마르세유, 마살리아 주변의 갈리아 남부에 제국을 건설했다. 오늘은 그리스 해운 제국의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프랑스 남부 해안으로 이식된 프랑스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BC 800년 그리스 도시 국가 포카이아에서 시작된다. 포카이아는 터키의 아시아 지역으로 불리는 곳으로 아나톨리아의 서부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터키의 북쪽 끝과 남쪽 끝의 중간쯤에 있다. 그 당시 아나톨리아 서부에는 에게 해를 누비며 건너온 그리스인이 거의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히타이트와 같은 강력한 제국들이 생겨났지만, 아나톨리아 해안 동쪽의 제국들 대부분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부에 주목했고, 그 당시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그리스인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21. 11. 15.
켈트족 켈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의 문화, 종교, 예술을 프랑스로 가져왔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최초로 기록된 프랑스 거주민인 켈트족에 관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여전히 켈트족이 누구인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켈트어가 한때 유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였다는 것이다. 켈트족은 BC 1000년경 사방으로 이주한 오늘날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집단으로 시작되었다. 이들 민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영국 제도,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 그리고 스위스, 독일 서부 및 저지대 나라(벨기에, 네덜란드)에 거주했다. 이전의 학자들은 켈트족이 이베리아 반도와 동유럽을 가로질러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에서 루마니아 그리고 심지어 터키에 이르는 땅에 거주했다고 주장했지만, 최근의 연구는 이에 대해.. 2021.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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