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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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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137

게르마니아 원정 (上) - 바루스의 재앙 로마 공화국은 BC 1세기에 급속하게 확장되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갈리아 전쟁(BC 58-50)에서 서유럽 대부분과 영국 제도 일부를 정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래였다. 갈리아 전쟁은 대부분 갈리아인과 싸우는 것이었지만, 다양한 게르만 부족과의 싸움도 포함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 부족과 싸우기 위해 두 번이나 라인 강을 건넜지만, 교전은 전술적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정복 활동은 카이사르의 내전(BC 49-45)이 가까워지면서 일찍 끝날 수밖에 없었다. 권력 투쟁으로 공화국이 황폐화되면서 유럽 대륙은 갈리아 전쟁 이후 20년 동안 거의 잊혔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간의 마지막 대결을 위해 갈리아 땅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철수했다. 갈리.. 2024. 4. 25.
라이티아 라이티아는 라이티아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서쪽으로 헬베티족 정착지, 동쪽으로 노리쿰, 북쪽으로 빈델리키아(빈델리키족의 땅), 남서쪽으로 트란살피나 갈리아, 남쪽으로 로마 이탈리아 지역인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오늘날 스위스 동부와 중부(라인강 상류와 콘스탄츠 호수 포함), 남부 독일(바이에른 및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대부분), 포어아를베르크 및 오스트리아의 티롤 상당 부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북부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빈델리키아(오늘날 뷔르템베르크 동부와 바이에른 서부)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나중에 이 속주에 합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라이티아의 북방 경계는 다뉴브강이었다. 나중에 다뉴브강에서 북쪽.. 2024. 4. 17.
갈라티아 갈라티아는 아나톨리아(오늘날 튀르키예 중부)에 있던 로마 제국의 속주 이름이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단독 통치 BC 30년-AD 14년)가 켈트족 갈라티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범위로 BC 25년에 설립했으며, 주도는 안키라(오늘날 앙카라)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분통치 개혁에 따라 북부와 남부로 분리되어 파플라고니아 속주의 남부와 리카오니아 속주를 형성했다. AD 398년경, 아르카디우스의 통치기에 갈라티아 프리마 속주와 갈라티아 세쿤다 속주, 즉 살루타리스 속주로 나뉘었다. 갈라티아 프리마는 옛 속주의 북동부에 해당하며, 안키라를 주도로 유지하고 집정관급 총독이 이끄는 곳이었다. 살루타리스는 옛 지방의 남서부 절반을 차지했으며, 페시누스에 자리 잡은 프라이세스(최하급 총독)가 이끄는 곳이었다. .. 2024. 4. 16.
흉노(匈奴) 연대표 BC 209년부터 AD 89년까지 고대 동부 유라시아 대초원을 지배했던 유목민족 흉노의 연대표이다. 흉노는 삼국시대 이후인 AD 3세기 후반 중국 북부에 정착하여 439년 북량(北涼)이 선비(鮮卑)의 북위(北魏)에 정복될 때까지 지속되는 여러 나라를 세웠다. BC 318년 흉노가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齊)와 결탁하여 진(秦)을 공격하다 BC 265년 조-흉노 전쟁: 조의 이목(李牧)이 흉노를 매복으로 끌어들여 물리치다 BC 215년 진의 흉노 원정: 몽염(蒙恬)이 흉노를 격파하고 오르도스 지역을 정복하다 BC 209년 묵돌선우가 흉노를 장악하고 오환(烏桓)과 선비(鮮卑)가 되는 동호(東胡)를 격파하다 BC 203년 묵돌선우가 월지(月氏)를 격파하다 BC 200년 한신(韓信)이 흉.. 2024. 2. 19.
기독교 연대표 - 초기 기독교 공의회 시대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통합을 위해 히에로니무스가 최초의 위대한 기독교 공의회라고도 칭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첫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포고했지만, 아리우스, 테오나스파, 프톨레마이스의 세쿤두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니케아의 테오그니스와 같은 비삼위일체론자들에게 거부당하자 그들을 파문했으며, 부활절 논란을 다루고 예루살렘에 특별한 인정을 부여한 교법 VII과 같은 20개의 교법을 통과시켰다. 325년 5월 20일-6월 19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25년 악숨 왕국(오늘날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이 기독교를 공식 국교로 선포한 두 번째 국가가 되다 325년 콘스탄티누스가 명을 내려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기념교회를 세우다 326년 11월 18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도의 무덤 위에 .. 2024. 2. 3.
기독교 연대표 - 니케아 공의회 이전 시대 100-150년? 야고보 외경,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야고보 복음서, 도마의 유아기 복음서, 마가의 비밀 복음서 (전편 복음서, 예수 세미나 발간) 110-130년?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가 "주님의 말씀 강해"를 쓰고 분실되었으나, 널리 인용되다 (사도 교부들) 110년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가 스미르나 인들에게 기독교 교회가 카톨리코스("보편적")라고 쓰다 110-160년?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스, 필립포이 인들에게 보낸 서신 (사대 교부들) 112년 소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에서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을 보고하다 120년? 랍비 타르폰이 복음서를 불태우는 것을 지지하다 125(+/-5)년? 베드로후서가 기록되었지만 400년대 초까지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다. 유다서, "카톨릭" 서신, 목회.. 2024. 2. 1.
기독교 연대표 - 사도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니산월 14일 또는 15일)과 부활 직후, 예루살렘 교회는 약 120명의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사도행전 1:15)가 있는 최초의 기독교 교회로 세워졌으며, 오순절(시완월 6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변호한 일(행 5:34-39),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고 사도들이 흩어짐(행 7:54-8:8), 사마리아에서 마고스 시몬(행 8:9-24)과 에티오피아 환관(행 8:26-40)이 세례를 받은 일이 뒤따랐다.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사도"로 개종한 것은 사도행전 9:13-16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1:11–24 참조. 베드로는 전통적으로 최초의 이방인 개종자로 여겨지는 로마의 백부장 코르넬리우.. 2024. 1. 29.
기독교 연대표 - 초림 시대 이 연대표는 현시대(AD)의 시작부터 기독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연대의 물음표('?')는 대략적인 연도를 나타낸다. 1년은 현재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그레고리력과 일치하는) 사용되는 기독교 달력(0년은 없음)의 첫 해이다. 전통적으로 이 해는 예수가 태어난 연도로 여겨졌지만,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더 이전 혹은 더 이후의 연대를 주장하며, 가장 많이 동의하는 연대는 BC 6년에서 BC 4년 사이이다. AD 6년 아우구스투스가 헤로데 아르켈라오스를 폐위하여 사마리아, 유대, 이두메아(에돔)를 로마의 직접 통치하에 있는 유다이아 속주로 합병하고, 카이사레아를 주도로 삼다. 퀴리니우스가 시리아의 레가투스(총독)가 되어 열심당의 반대를 받는 인구조사를 실시하다(고대 유대사 18, 누가복음 .. 2024. 1. 27.
역대 로마 황제 (BC 27-AD 476) - 2편 군인 황제 시대 원수정 시대 BC 27-AD 284년 다섯 황제의 해 (193년) 페르티낙스 이름 :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프라이펙투스 우르바누스(도시 행정관) 재위 : 193년 1월 1일-3월 28일 (2개월 27일) 출생 : 126년 8월 1일 알바 폼페이아,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사망 : 193년 3월 28일 로마, 근위대에 살해됨, 66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이름 : 마르쿠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경매로 황제에 오름 재위 : 193년 3월 28일-6월 2일 (66일) 출생 : 133/137 1월 29일 메디올라눔,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사망 : 193년 6월 2일 로마, 궁전에서 병사에게 살해됨, 56/60세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이름 : 가이우스 페스켄.. 2023. 5. 15.
역대 로마 황제 (BC 27-AD 476) - 1편 팍스 로마나 (Pax Romana) 원수정 시대 BC 27-AD 284년 율리우스-클라우디스 왕조 (BC 27-AD 68년) 초대 아우구스투스 이름 :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재위 : BC 27년 1월 16일-AD 14년 8월 19일 (40년 7개월 3일) 출생 : BC 63년 9월 23일 로마,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사망 : 14년 8월 19일 놀라, 자연사, 76세 2대 티베리우스 이름 :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 재위 : 14년 9월 17일-37년 3월 16일 (22년 5개월 27일) 출생 : BC 42년 11월 16일 로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사망 : 37년 3월 16일 미세눔, 자연사, 77세 3대 칼리굴라 이름 :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의 종손 재위 : 37.. 2023. 5. 13.
고대 로마인이 구글맵을 가지고 있었다면 옴네스 비아이(Omnes Viae)는 로마 제국의 도로를 기반으로 한 현대적인 루트 플래너이다. 로마인이 자신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던 이 루트 플래너를 활용하여 로마 제국을 횡단하는 도로 여행을 계획해 보자. (출처 - 옴네스비아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은 스크롤에 능숙했다. 다만 그들은 실제로 다루기 힘든 스크롤(두루마리)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로마 도로만을 위한 편리한 온라인 루트 플래너인 옴네스 비아이를 좋아했을 것이다. 편리하지만 제국을 횡단하는 것은 여전히 25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오르텔리우스의 유명한 1598년판 포이팅거 지도, 각각 두 부분으로 된 네 장의 다채로운 시트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RareMaps.com / 퍼블릭 도메인) BC 20년, .. 2023. 5. 6.
고대 로마의 주택 절정기에 고대 로마 제국은 모든 계층의 시민을 수용하는 시끄럽고 분주하며 번잡한 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집은 어땠을까? 주거 여건은 재정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부유한 로마인이 크고 널찍한 빌라에 머무는 동안 사회의 가장 가난한 구성원들은 어둡고 위험하며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내몰렸다. 놀랍도록 잘 보존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은 고대 로마인이 살았던 방식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옛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덜 손상된 주택 유적을 연구해 왔다. 그들은 고대 로마인에게 주택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역사적 그림을 정리했다. 고대 로마의 도심과 주변 시골 지역을 지배했던 다양한 주택 유형을 알아보자. 1. 도무스 고대 로마의 도시 내에서 황제 및 귀족과 같은.. 2023. 1. 3.
로마 노예의 일상 로마의 노예제도는 로마 사회에서 매우 중요했고 노예들은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했다. 사회 밑바닥에 있더라도, 그들의 일상은 동질적이지 않았다. 로마 노예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의 고향에서 벗어나 뿔뿔이 흩어져 로마인 아래에서 순종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노동에 지친 죄수와 사슬에 매인 포로를 상상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주인에게 소중히 여겨진 노예들은 그들을 둘러싼 일부 자유 로마인보다 삶의 질이 더 높았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로마 노예의 대조적인 역할 로마 노예들, 세르비(servi, 노예를 지칭하는 세르부스/servus의 복수형)는 정복당한 부족들의 생존자이자 전쟁 포로였다. 죄수들과 해적들은 다른 이들처럼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사거나 .. 2023. 1. 1.
제9군단 - 잃어버린 로마 군단 사라진 로마의 제9군단이 런던에서 전멸했을까? 지난해 발간된 책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5,500명의 병사들이 브리튼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요크에서 남쪽으로 보내진 후 학살되었음을 암시한다. · 군단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AD 1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요크의 게이트웨이에 있다. · 그들은 AD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침공으로 브리튼에 도래했다. ·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론은 사이먼 엘리엇 박사가 발간한 책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 그는 그 병사들이 지금의 스코틀랜드에서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태어난 지 43년 후에 영국 해안을 습격하여 요크 도시를 건설한 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침공과 함께 이 해안에 온 로마 제9군단에게 일.. 2022. 12. 27.
AD 160년대 - 파르티아 제국과 로마 제국의 대결 "사람들 중 파르티아인만이 한결같이 로마인에 맞선 적수였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및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가정교사이자 유명한 서신을 쓴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의 평가였다. 문법가이자 수사학자 및 작가의 파르티아 제국에 대한 위의 평가는 지금은 사라진 역사(프린키피아 히스토리아)의 서문에서 가져왔다. 이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를 찬양하는 부풀린 글에 지나지 않았고 축하보다는 비웃음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주제는 훨씬 더 심각했다. 프론토의 역사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의 거대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AD 2세기 중반, 두 광대한 국가는 다시 한번 충돌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거대하고 지배적인 두 강국은.. 202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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