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속주

갈리아 전쟁 - 2편

by 금곡동로사 2021. 2. 23.
728x90

헬베티족과 세콰니족의 상대적 위치를 보여주는 BC 1세기의 갈리아 지도

 

과정

 

전쟁의 시작 - 헬베티족에 대한 캠페인

 

헬베티족은 스위스 중앙 고지에 살았던 약 5개의 동족으로 이루어진 갈리아 부족 연합으로 산맥과 라인 강과 론 강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게르만 부족들로부터 북쪽과 동쪽으로 증가되는 압력을 받아 BC 61년 경에 이주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갈리아를 가로질러 서쪽 해안으로 여정을 하려고 했는데 이 길은 하이두이족(로마의 동맹)과 갈리아 트란살피나 로마 속주를 통과하는 경로였다. 이주하는 동안 부족들 사이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귀족 오르게토릭스의 음모가 발견되었고 그는 자살했다. 이 일이 부족의 이주를 지연시키지는 않았다. 이주 소식이 퍼지면서 이웃 부족들은 우려가 커졌고 로마는 여러 부족에 대사를 보내 헬베티에 합류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로마에서는 게르만 부족들이 헬베티가 비운 땅을 채울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로마인은 게르만인보다 갈리아인을 이웃으로 선호했다. BC 60년과 59년의 집정관들은 ​​모두 갈리아에 맞서 캠페인을 이끌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BC 58년 3월 28일 헬베티는 모든 부족민과 가축을 데리고 이주를 시작했다. 그들은 이주를 되돌릴 수 없도록 마을과 창고를 불태웠다. 카이사르가 총독이었던 갈리아 트란살피나에 도착하자 그들은 로마 영토를 지나가기 위해 허가를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요청을 받았지만 결국 거부했다. 헬베티는 대신 로마 영토를 완전히 피해 북쪽으로 돌아갔다. 로마에 대한 위협은 끝났지만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헬베티를 공격했다. 그래서 역사가 케이트 ​​길리버가 "자신의 경력을 올리려는 장군이 이끄는 공격적인 확장 전쟁"이라고 묘사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 영토를 지나가려는 헬베티의 요청에 대한 카이사르의 고려는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연극이었다. 그는 이주 소식이 도착했을 때 로마에 있었으며 트란살피나로 달려가 두 개 군단과 일부 보조군을 모집했다. 그는 거절 소식을 헬베티에게 전달한 후 즉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네 개의 베테랑 군단을 모았다. 카이사르는 현재 2만 4천-3만 명의 군단 병력과 어느 정도의 보조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갈리아인이었다. 그는 북쪽의 손 강으로 행군하여 강을 건너고 있던 헬베티를 따라잡았다. 약 3/4이 강을 건넌 상태였고 카이사르는 건너지 않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카이사르는 부교를 만들어 하루 만에 강을 건넜다. 그는 헬베티를 따라잡았지만 이상적인 조건을 기다리면서 전투를 시작하지 않았다. 갈리아 부족은 협상을 시도했지만 카이사르의 조건은 매우 가혹했다(고의로 다른 지연 전술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카이사르의 보급품은 6월 20일에 소진되어 비브라크테의 동맹 영토를 향해 떠나도록 만들었다. 그의 군대는 손 강을 쉽게 건넜지만 그의 수송 부대 행렬은 그러지 못했다. 헬베티는 이 순간을 이용하여 카이사르의 후방 부대를 공격했다.

 

비브라크테 전투

 

이어지는 비브라크테 전투에서 헬베티와 로마군은 하루 종일 싸웠다.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군은 결국 승리를 얻었다. 카이사르는 경사진 언덕에 군단을 세웠고 헬베티는 오르막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불리했다. 헬베티는 전투 시작 후 아마도 로마군에 쉽게 격퇴되는 척했다. 헬베티의 동맹 보이족와 툴링기족은 로마군의 허를 찔러 오른쪽 측면을 공격했다. 이 시점에서 로마군은 포위되어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군단의 마지막 줄에 있는 병사들은 등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후방에서 공격받는 대신 양면으로 싸웠으며 역사가 길리버는 훌륭한 전술적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헬베티는 왔던 길을 따라 달아났다. 로마군은 당시 숫적으로 많았던 보이족과 툴링기족을 뒤쫓아 그들의 야영지에서 전사들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도 죽였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3일 동안 쉬었다. 그들은 패배한 헬베티를 추격했다. 카이사르는 로마와 훨씬 더 두려운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 완충 지대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점령된 헬베티족의 진영에서 카이사르는 그리스어로 작성된 인구 조사가 발견되고 연구되었다고 주장했다. 총 36만 8천 명의 헬베티족 중 9만 2천 명이 신체가 튼튼한 남자였으며 11만 명의 생존자만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헬베티족에 대한 캠페인을 보여주는 지도, BC 58년. 빨간색: 헬베티, 남청색: 카이사르
비브라크테 전투, 빨간색: 로마군, 녹색: 헬베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헬베티의 족장 디비코가 손 강에서 전투를 마친 후 교섭. Karl Jauslin의 19세기 역사적인 그림

 

수에비족에 대한 캠페인

 

카이사르는 하이두이족에게 관심을 돌렸고 그는 하이두이 또한 정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그들을 배신하기 위해 설득력 있는 개전 이유가 필요했다.

 

BC 61년 수에비족의 족장이자 게르만 민족의 왕인 아리오비스투스는 동쪽의 게르마니아에서 마른 강과 라인 강 지역으로 부족의 이주를 재개했다. 이 이주가 세콰니족의 땅을 잠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이두이가 아리오비스투스에게 복종할 것을 원했다. BC 61년에 세콰니는 마케토브리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리오비스투스에게 땅을 보상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12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 땅에 정착했다. 게르만 전사 2만 4천 명이 그에게 합류했을 때 그는 세콰니에게 그들을 수용할 더 많은 땅을 요구했다. 이 요구에 로마는 "우려했다". 세콰니가 양보할 경우 아리오비스투스는 그들의 모든 땅을 차지하고 갈리아의 나머지 지역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헬베티에 대한 카이사르의 승리 이후 대부분의 갈리아 부족들은 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부족 회의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하이두이의 수장이자 갈리아 부족 대표단의 대변인인 디비키아쿠스는 아리오비스투스의 정복과 그에게 보내진 인질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디비키아쿠스는 카이사르에게 아리오비스투스를 물리치고 게르만족의 침공 위협을 제거해달라고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했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의 오랜 충성을 보호할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제안은 로마의 국경을 확장하고 카이사르의 군대 내에서 충성을 강화하며 그를 국외에서 로마 군대의 사령관으로 세울 기회를 제공했다.

 

원로원은 BC 59년에 아리오비스투스를 "로마 인들의 친구이자 왕"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에 전쟁을 선포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가 겪은 고통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여 게르만족이 라인 강을 건너지 말고 하이두이 인질의 귀환과 하이두이와 로마의 다른 친구들의 보호를 요구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카이사르에게 매년 공물이 계속되는 한 하이두이의 인질은 안전할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는 자신과 로마인 모두 정복자이며 로마는 그의 행동에 대해 관여할 권리가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이두이에 대한 게르만 전사들의 공격과 수에비의 100개 부족이 갈리아로 오기 위해 라인 강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로 카이사르는 BC 58년에 아리오비스투스와 전쟁을 벌이는 데 필요한 정당성을 얻었다.

 

728x90

 

아리오비스투스가 가장 큰 세콰니 마을인 베손티오(오늘날 브장송)를 점령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그곳을 향해 그의 군대를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의 장교 중 일부는 정치적 이유로 직책을 맡았으며 전쟁 경험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사기가 좋지 않아 카이사르의 캠페인을 위협했다. 그는 장교들과 그들의 군단에게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군단은 10군단이라고 말하며 시험했다. 자부심을 가지고 10군단은 선두에 섰고 다른 군단들은 뒤지지 않기 위해 결연히 뒤를 따랐다. 결과적으로 카이사르는 아리오비스투스보다 먼저 베손티오에 도착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회담을 요청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들은 평원의 작은 언덕에서 휴전 상태로 만났다. 카이사르가 게르만 기병이 언덕을 향해 달려가 그의 기마 호위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휴전은 깨졌다. 이틀 후 아리오비스투스는 또 다른 회담을 요청했다. 고위 관리를 보내는 것을 망설인 카이사르는 믿을 수 있는 친구 발레리우스 프로킬루스와 아리오비스투스와 성공적으로 거래한 상인 카이우스 메티우스를 파견했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아리오비스투스는 사절을 사슬로 묶어 던졌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이틀 동안 행군하여 카이사르의 뒤로 3.2km 떨어진 곳에 진영을 만들었으며 동맹 부족과의 연락 및 보급선을 차단했다. 아리오비스투스를 전투로 유도할 수 없었던 카이사르는 아리오비스투스의 위치 근처에 두 번째 작은 진영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진영이 완료된 후 카이사르는 다시 아리오비스투스에게 도전했고 그가 작은 진영을 공격했을 때 보상을 얻었다.

 

이튿날 아침 카이사르는 동맹군을 두 번째 진영 앞에 모았고 그의 군단은 트리플렉스 아키에스(3열로 된 부대)로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진격시켰다. 카이사르의 다섯 군단장과 그의 재무관은 각각 군단을 지휘했다. 카이사르가 오른쪽 측면에 도열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그의 7개의 부족 대형을 도열하며 대응했다. 카이사르는 큰 비중을 차지한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돌격으로 인해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했다. 게르만족이 로마군의 왼쪽 측면을 밀어내기 시작하자 크라수스는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세 번째 라인의 코호트를 지휘했다. 결과적으로 전체 게르만족의 대열이 끊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아리오비스투스의 12만 전사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와 그의 남은 부대는 탈주하여 라인 강을 넘어 다시는 로마와 교전하지 않았다. 라인 강 근처에서 야영하던 수에비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카이사르가 승리했다. 1년 만에 그는 로마에서 가장 두려운 적 둘을 물리쳤다. 이 바쁜 캠페인 시즌이 끝난 후 그는 총독의 책무 중 민정 부분을 다루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돌아왔다. 이 시점에서 그가 이미 모든 갈리아를 정복하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에비족에 대한 캠페인을 보여주는 지도, BC 58년. 빨간색: 수에비, 남청색: 카이사르
보주(Vosges) 전투, 프랑스 뮐루즈 부근, 카이사르(빨간색)와 아리오비스투스(녹색, 왼쪽 하단) 간의 전투 및 캠프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728x90

'로마 이야기 > 로마속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리아 전쟁 - 4편  (0) 2021.02.24
갈리아 전쟁 - 3편  (0) 2021.02.23
갈리아 전쟁 - 1편  (0) 2021.02.22
킬리키아 에트 키프로스  (0) 2021.02.21
로마 시리아  (0) 2021.02.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