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소스 공방전(BC 499년)은 다리우스 대왕의 지원을 받아 페르시아 제국의 이름으로 낙소스 섬을 정복하려는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의 실패한 시도였다.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50년 동안 지속된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추방된 낙소스 귀족들은 자신들의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접근했다. 밀레토스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할 기회를 찾은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정복을 위해 그의 대군주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과 지역 사트라프인 아르타페르네스의 도움을 받았다. 원정군에 동의한 페르시아인은 메가바테스의 지휘 아래 200척의 삼단노선 함대를 집결시켰다.
원정군은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아리스타고라스와 메가바테스는 낙소스로 가는 여정에서 다툼을 벌였고, 누군가(아마 메가바테스)가 낙소스인에게 곧 군대가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페르시아군과 이오니아군은 방어 준비가 잘 되어 있는 도시와 마주하게 되었다. 원정군은 적절하게 자리를 잡고 수비진을 포위했으나 넉 달 만에 군자금이 떨어져 소아시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비참한 원정의 여파로, 그리고 참주 자리에서 곧 쫓겨날 것을 느낀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 전체를 선동하여 다리우스 대왕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이후 카리아와 키프로스로 확산되었다. 소아시아를 가로지른 페르시아의 3년간의 캠페인은 결정적인 효과가 없었으며 페르시아군은 재편성하여 반란의 진원지인 밀레토스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라데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는 이오니아 함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반란을 효과적으로 종식시켰다. 비록 소아시아가 페르시아의 영토로 다시 돌아왔지만, 다리우스는 반란을 지원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겠다고 맹세했다. BC 492년에 시작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은 낙소스에 대한 원정 실패와 이오니아 반란의 결과였다.
배경
페르시아 제국은 유대교 제사장과 같이 엘리트 원주민 집단을 통해 새로운 신민들을 다스리는 것을 돕게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오니아인은 귀족 계급과 시민 계급의 대립 구도를 보여 제국은 각 도시를 통치하는 참주를 임명했다.
이들은 페르시아를 따르면서도 동포들의 강한 증오심을 피해야 했으며, 민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아닌 제국에 의해 임명된 단순한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페르시아가 이오니아를 정복한 지 약 40년 후, 그리고 네 번째 페르시아 왕인 다리우스 대왕의 통치 하에서,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이 익숙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아리스타고라스의 삼촌 히스티아이오스는 BC 513년 다리우스의 캠페인에 동행했으며, 보상이 주어질 때 정복된 트라키아 영토의 일부를 요청했다. 비록 이것은 허락되었지만, 히스티아이오스의 야망은 다리우스의 고문들을 놀라게 했고, 그는 다리우스의 "왕의 벗"으로 수사에 머물면서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되었다. 히스티아이오스로부터 물려받은 아리스타고라스는 밀레토스에서 끓어오르는 불만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 그리스 역사에서 이 시기는 많은 그리스 도시의 사회적 정치적 격변, 특히 아테네에서 최초의 민주주의가 수립된 것에 주목할 만했다. 에게 해의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한 낙소스 섬도 이 시기에 정치적 혼란의 영향을 받았다. 낙소스는 스파르타에 의해 전복된 BC 524년 경까지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후원을 받은 참주 리그다미스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귀족이 번성한 듯하며 낙소스는 에게 해 섬에서 가장 번영하고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성공에도 불구하고 낙소스는 계급의 갈등과 내분에 영향을 받았고, BC 500년 직전에 민중이 권력을 장악하여 귀족들을 추방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BC 500년, 낙소스에서 온 망명자들 중 몇 명이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접근하여 섬을 다시 장악하는 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낙소스를 정복함으로써 밀레투스에서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본 아리스타고라스는 제안과 함께 리디아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접근했다. 아르타페르네스가 군대를 제공한다면, 아리스타고라스는 다리우스의 이름으로 섬을 정복하고, 아르타페르네스에게 군대 양성비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의 전리품을 나누어 줄 것이다. 게다가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가 함락되면 키클라데스의 다른 섬도 곧장 따라올 것이라고 제안했으며, 심지어 에우보이아도 이번 원정에서 공략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다리우스에게 원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다리우스는 이에 동의했고, 이듬해 낙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200척의 삼단노선 함대가 집결했다.
전조
페르시아 함대는 BC 499년 봄에 정식으로 집결하여 이오니아로 항해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그(그리고 다리우스의)의 사촌 메가바테스에게 원정군을 맡기고, 그를 페르시아 육군과 함께 밀레토스로 파견했다. 그들은 아리스타고라스와 밀레토스군과 합류하여 출항했다. 낙소스의 경계를 피하기 위하여, 함대는 처음에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향해 북쪽으로 항해를 했지만 그들이 키오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되돌아 낙소스를 향해 남쪽으로 향했다.
헤로도토스는 메가바테스가 배들을 검사했고(아마도 밤에 해안을 지나는 동안), 어떤 보초도 세우지 않은 민도스의 배 한 척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말한다. 메가바테스는 경비에게 스킬락스호의 선장를 찾으라고 명령한 뒤 선장을 함선의 노 구멍 중 하나에 밀어 넣어 머리는 배 바깥에, 몸은 배 안에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그의 친구의 처우에 대한 소식이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전해졌고 그는 메가바테스에게로 가서 그의 결정을 재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메가바테스가 아리스타고라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자, 아리스타고라스는 배에서 떨어질듯한 선장을 구했다. 예상대로 메가바테스는 아리스타고라스에게 화가 났고, 아리스타고라스는 "하지만 당신이 이 문제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르타페르네스가 내 말을 따르고 내가 명령하는 대로 어디든지 항해하라고 당신을 보내지 않았나? 왜 그렇게 참견하는가?"라고 되받아쳤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메가바테스는 이에 매우 격분하여 낙소스인에게 전령을 보내 페르시아군의 접근을 경고했다.
페르시아 지휘관이 자신의 침공을 방해했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현대 역사학자들은 몇 가지 다른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그러나 낙소스인이 침공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인식하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는 낙소스인이 이전에는 원정군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소식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들판에서 모든 것을 가져왔고, 포위 공격에서 생존할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모았으며 그들의 성벽을 강화했다고 말한다.
양측의 군세
헤로도토스는 어느 쪽에도 완전한 숫자를 제공하지 않지만, 두 세력의 힘의 세기에 대해 어느 정도 제공했다. 분명히, 그들이 고국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낙소스군은 이론적으로 전체 인구를 포함했을 수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이야기에서 "낙소스인은 방패를 든 사람이 8천 명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호플리테스를 장비할 수 있는 8천 명의 병력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사람들은 낙소스의 저항에 강력한 중추를 형성했을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주로 200여 척의 삼단노선을 기반으로 했다. 수송선이 추가로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삼단노선의 표준 승선은 해병 14명을 포함한 200명이었다.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침공 때 페르시아 함선마다 30명의 해병을 추가로 태웠으며, 이는 첫 번째 침공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라데 해전의 키오스 배들은 각각 40명의 해병을 태웠다. 이것은 아마도 삼단노선이 최대 40-45명의 병사를 수송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추가 무게로 인해 삼단노선이 쉽게 불안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만약 낙소스의 페르시아 군대가 비슷하게 구성되었다면, 8,000에서 9,000명의 병사(많은 비무장 노 젓는 사람과 함께)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공방전
이오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이 낙소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잘 요새화 되고 보급된 도시를 마주했다. 헤로도토스는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곳은 낙소스의 수도였을 것이다. 처음에 도시를 공격했다가 격퇴당했다는 제안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후의 군사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거의 밝히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이오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은 도시를 포위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4개월 후, 페르시아군은 돈이 바닥났고, 아리스타고라스 또한 많은 돈을 썼다. 완전히 의기소침해진 원정대는 빈손으로 소아시아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추방된 낙소스 귀족들을 위한 거점을 섬에 만들었다. 이것은 내분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 세계의 전형적인 전략이었고, 그들에게 사건이 허락하는 대로 빨리 돌아갈 수 있는 기반을 주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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