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히브리 성경에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BC 1010-970년 경 통치)으로 묘사된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은 음악가로서 먼저 명성을 얻고 나중에 적의 투사 골리앗을 죽이면서 명성을 얻은 젊은 양치기다. 그는 사울 왕이 가장 좋아하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절친한 친구가 된다. 다윗이 왕좌를 차지하려는 것을 우려한 사울은 다윗에게서 등을 돌린다. 사울과 요나단이 전투에서 죽자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언약궤를 도시로 가져가 사울이 세운 왕국을 재건했다.
왕으로서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범하며 그녀의 남편 헷(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죽음을 마련한 장소로 인도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다윗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 중에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압살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다윗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지을 기회를 주시지 않았다. 평화로운 죽음 전에 그는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그는 예언서에서 이상적인 왕이자 미래 메시아의 조상으로 영예를 얻었으며 많은 시편이 그로부터 나왔다.
고대 근동의 역사가들은 다윗이 아마도 BC 1,000년 경에 존재했을 것이라는데 동의하지만 역사적 인물로 동의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적대하는 두 왕들에 대한 다윗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BC 9세기 말/8세기 초에 다마스쿠스 왕이 세운 돌로 새긴 텔 단 석비(Tel Dan stele)에는 히브리어로 ביתדוד, "BYTDWD"라는 문구가 있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윗의 집"으로 번역한다.
다윗은 성서 이후의 유대인 서면 및 구전 전통에서 많이 인용되며 신약에서 거론된다. 초기 기독교인은 메시아와 다윗에 대한 언급에 비추어 예수의 생애를 해석했다. 예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묘사된다. 다윗은 꾸란에서 이슬람 구전 및 서면 전통의 주요 선지자이자 인물로 거론된다. 다윗의 성서적 성격은 수세기 동안 예술과 문학에서 많은 해석에 영감을 주었다.
성경적 설명
가족
사무엘 상과 역대 상 모두 다윗이 여덟 아들 중 막내이며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적어도 두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스루야의 아들들은 모두 다윗의 군대에서 복무했고 아비가일은 아들 아마사가 압살롬의 군대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압살롬은 다윗의 어린 아들 중 하나였다. 성서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탈무드는 그녀를 아다엘이라는 남자의 딸인 니체벳(Nitzevet)으로 식별하고 룻기는 그를 보아스와 결혼한 모압인 룻의 증손자로 주장했다.
다윗은 결혼을 통해 다양한 정치 및 국가 집단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무엘 상 17:25에는 사울 왕이 골리앗을 죽인 사람을 매우 부자로 만들고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가족이 이스라엘에서 세금 면제됨을 선언하겠다고 말했다. 사울이 장녀 메랍을 제안했지만 다윗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사울은 메랍을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과 결혼시켰다. 그의 어린 딸 미갈이 다윗과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인의 양피(고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지참금을 블레셋 사람 머리 600명으로 기록)를 지불하자 그녀를 다윗과 결혼시켰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여 죽이려고 했으며 다윗은 탈출했다. 그러자 사울은 미갈을 갈림으로 보내 라이스의 아들 발디와 결혼시켰다. 사무엘 하 3장에 따르면 다윗은 헤브론에서 아내를 취했다. 그녀들은 이스르엘의 아히노암,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였다. 나중에 다윗은 미갈을 돌려 받기를 원했고 이스보셋의 군 사령관 아브넬은 그녀를 다윗에게 넘겨주었고 그녀의 남편 발디는 큰 슬픔을 느꼈다.
역대기에서는 다양한 아내와 첩과 함께 그의 아들을 나열했다. 헤브론에서 다윗은 여섯 아들, 아히노암의 소생 암논, 아비가일의 소생 다니엘, 마아가의 소생 압살롬, 학깃의 소생 아도니야, 아비달의 소생 스바댜, 에글라의 소생 이르드암을 낳았다.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은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이었다. 다른 아내들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다윗의 아들은 입할, 엘리사마, 엘리벨렛, 노가, 네벡, 야비야, 엘리사마, 엘랴다, 엘리벨렛이었다. 어떤 족보에도 언급되지 않은 여리못은 역대 하 11:18에서 그의 다른 아들로 언급되었다. 마아가의 소생인 다윗의 딸 다말은 그녀의 이복오빠 암논에게 강간당했다. 다윗은 그가 맏아들이고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말을 범한 것에 대해 암논을 재판에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압살롬(그녀의 친오빠)은 다말의 복수를 위해 암논을 살해했다.
이야기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이 불법적으로 제물을 바치고 나중에 모든 아말렉인을 죽이고 몰수한 재산을 파괴하라는 신성한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분노하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베들레헴의 이새의 막내아들인 양치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대신 왕이 되도록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셨다.
하나님이 사울을 괴롭히기 위해 악령을 보내신 후, 그의 종들은 그가 리라를 연주하는데 능숙한 사람을 부르도록 권고했다. 종은 "연주에 능숙하고 용맹하고 용사이며 말에 신중하고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며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신다."라고 표현한 다윗을 제안했다. 다윗은 왕의 갑옷 운반자 중 한 명으로 사울을 섬기고 왕을 달래기 위해 리라를 연주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거인 골리앗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전했다. 사울의 군대에서 복무하는 형제들에게 식량을 가져다주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다윗은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고 선언하고 돌팔매로 골리앗을 죽였다. 사울은 젊은 영웅의 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사울은 다윗을 그의 군대에 세웠다. 모든 이스라엘은 다윗을 사랑하지만 그의 인기는 사울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그가 왕국 외에 무엇을 원할까?"). 사울이 그의 죽음을 계획하지만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인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아버지의 계획에 대해 경고하여 다윗은 달아났다. 그는 먼저 놉으로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음식을 주고 골리앗의 검을 받은 다음, 블레셋 도시 가드로 가서 그곳에서 아기스 왕에게 피난처를 구하려 했다. 아기스의 종이나 신하들은 그의 충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다윗은 그가 그곳에서 위험에 처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둘람 굴로 떠나 그의 가족과 만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모압 왕에게 피난처를 찾으러 갔지만 선지자 갓은 그에게 떠나라고 조언하고 그는 헤렛 수풀로 갔다가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더 많은 전투를 벌였다. 사울이 그일라를 포위하여 다윗을 붙잡을 계획을 세웠고 다윗은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 산악 지대의 십 광야로 피신했다.
요나단은 다시 다윗을 만나 미래의 왕이 될 다윗에 대한 충성을 확인했다.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이 그들의 땅에 피신하고 있음을 알리자 사울은 확인한 뒤 마온 광야에서 다윗을 잡으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블레셋의 새로운 침공으로 그의 관심이 쏠렸고 다윗은 엔게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돌아온 사울은 다윗을 쫓기 위해 엔게디로 향했고 다윗와 그의 사람들이 숨어있는 동굴에 들어갔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럴 의향이 없었다. 그는 몰래 사울의 겉옷자락을 잘라냈고 사울이 동굴을 떠났을 때 그의 왕인 사울에게 경의를 표하고 겉옷을 사용하여 사울에 대한 악의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왔다. 이렇게 두 사람은 화해하고 사울은 다윗을 그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사무엘 상 26장에서도 다윗이 하길라 산에 있는 사울의 진영에 잠입하여 그와 그의 경비원이 잠들어있는 동안 옆에 놓인 창과 물병을 가져오는 비슷한 내용이 있다. 이 기록에서 아비새가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라고 조언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뻗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사울은 자신이 다윗을 쫓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고백하고 그를 축복했다.
사무엘 상 27:1-4에서 사울은 다윗이 가드의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두 번째로 도피하여 다윗을 쫓는 것을 중단했다. 아기스는 다윗이 가드와 유다 사이의 경계에 가까운 시글락에 거주하도록 허용했다. 그곳에서 그는 그술 사람,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습격하지만 아기스는 그가 유다의 이스라엘 사람, 여라무엘 사람, 겐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아기스는 다윗이 충성스러운 가신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가드의 방백이나 영주의 신뢰는 얻지 못했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아기스는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향해 진군할 때 다윗이 진영을 지키기 위해 뒤에 남아 있도록 지시했다.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갔다. 요나단과 사울은 전투에서 죽었고 다윗은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 북쪽에서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 왕이었으며 이스보셋이 살해될 때까지 전쟁이 계속되었다.
사울의 아들이 죽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헤브론에 왔고 다윗은 이스라엘 전역의 왕이 되었다. 그는 여부스 사람의 요새였던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으려고 언약궤를 도시로 가져왔지만 선지자 나단은 성전이 다윗의 아들 중 한 사람이 지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금지했다. 나단은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당신의 왕좌가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라고 언약을 맺으셨다고 예언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 모압 사람, 에돔 사람, 아말렉 사람, 암몬 사람, 아람 소바의 하닷에셀 왕에 대한 연속된 승리를 거두었다.
암몬의 수도 랍바를 포위하는 동안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그는 목욕하던 여인 밧세바를 염탐하고 그녀를 소환하였고 그녀는 임신하게 되었다. 성서의 본문은 밧세바가 관계에 동의했는지 여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윗은 남편 헷 사람 우리아를 불러 전투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가 그의 아이로 간주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아는 그의 아내를 찾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은 전투의 열기 속에서 그가 죽도록 공모했다. 그런 다음 다윗은 과부 밧세바와 결혼했다. 이에 대해 나단은 그의 죄를 묘사한 비유로 죄책감 속에 왕을 가두어 놓은 후 "칼이 결코 당신의 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닥칠 형벌을 예언했다. 다윗이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나단은 그의 죄가 용서받았으며 그는 죽지 않을 것이지만 아이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복수와 권력에 대한 욕망에 힘입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나단의 말대로 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압살롬의 궁정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은 다윗의 친구 후새 덕분에 압살롬의 군대는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진로를 돌렸고 그는 나뭇가지에 긴 머리카락이 걸렸고 다윗의 명령과는 달리 다윗의 군대 사령관 요압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들의 죽음을 한탄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 대신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요압이 "그의 사치스러운 슬픔"에서 회복하고 백성에 대한 그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그를 설득하기 전까지. 다윗은 길갈로 돌아와 요르단 강을 건너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다윗이 늙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 그의 남은 아들 중 맏이이자 타고난 후계자인 아도니야는 자신을 왕으로 선언했다. 밧세바와 나단은 다윗에게 가서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삼겠다는 동의를 얻었고 다윗의 약속에 따라 아도니야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다윗은 40년 동안 통치한 뒤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임종 당시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길을 걷고 적들에게 복수하라고 일렀다.
업적
- 다윗은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2대 왕이었으며 40년 간 통치하였다.
- 다윗은 음악과 시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자신이 직접 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하였으며 많은 시도 남겼다. 그의 노래와 시 일부는 히브리 성서의 시편에 기록되어 남아 있다.
- 성서에 포함된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알려진 시편을 기록하였다.
- 4,000명의 대규모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하였고(역대상 23:5)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사람 288명을 두었다(역대상 25:6-7).
- 이스라엘 왕국에서 여호와에 대한 숭배를 위해 백성들을 연합시키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 이스라엘 왕국에서 숭배 중심지가 된 예루살렘의 거대한 성전 건축을 위한 터전을 닦았다.
역사성
텔 단 석비(Tel Dan stele)
1993년에 발견된 텔 단 석비는 BC 9세기 말/8세기 초에 다마스쿠스 왕 하사엘이 세운 돌이다. 적국의 두 왕들에 대한 왕의 승리를 기념하며 히브리어 : ביתדוד, bytdwd, 대부분의 학자들이 "다윗의 집"으로 번역했다. 다른 학자들은 이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것은 유다 왕국의 조상 다윗의 왕조에 대한 언급일 가능성이 높다.
메사 석비(Mesha Stele)
메사 석비는 BC 9세기경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모압의 왕 메사의 명령으로 제작되었다. 91cm 높이와 60cm 넓이로 이루어진 검은 현무암 석판에 모압 왕 메사의 승리를 기록한 메사 석비는 성서 고고학상 굉장히 중요한 유물이다. 그 이유는 메사 비문에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오므리(왕상 16:21-28)는 BC 9세기경 북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하였다. 메사 비문은 성서 외 비문에서 히브리 성서의 인물이나 장소가 언급된 첫 번째 경우에 속한다. 메사는 비문에 자신의 주요 업적을 기록하였다. 또한 모압 왕 발락과 다윗으로 추정되는 기록도 있다. 아마도 그는 모압의 신 카마스 신전과 연계하여 이 비문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언급한 내용에는 메사가 오므리의 손자 여호람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를 격파한 기록이 있는데 히브리 성서(왕하 3:4-27)에는 약간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특히 메사 비문에는 이스라엘에 빼앗긴 모압의 영토가 회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카르나크의 부바스티트 입구
두 비석 외에도 성서 학자이자 이집트 학자인 케네스 키친은 셰숑크 1세(대개 성서의 시삭과 동일시됨, 왕상 14:25-27)의 부조에도 다윗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성서에 따르면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 5년, 시삭이 수도 예루살렘까지 쳐들어 올라와서 성전 보물 및 온갖 왕궁의 모든 보물들을 약탈해갔다고 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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