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보암 1세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첫 번째 왕이었다. 히브리 성경은 르호보암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의 반란 이후 시작된 여로보암의 통치를 설명한다.
여로보암은 BC 931년부터 910년까지 22년 동안 통치했다.
어원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다투다" 또는 "그가 백성의 대의를 변호한다"를 의미하며 "그의 사람들이 많다" 또는 "그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또는 심지어 "사람들을 반대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70인 역에서 그는 히에로보암이라고 불린다.
성경적 배경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족속의 스레다 사람 느밧의 아들이었다. 스루아("나병에 걸린")라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왕상 11:26). 그는 적어도 두 아들, 아비야(왕상 14:1)와 그를 계승한 나답이 있었다.
여로보암이 젊은 시절,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있는 밀로 요새 건설과 기타 공공사업에서 그와 그의 족속들을 감독자로 삼았으며 솔로몬의 통치를 상징하는 사치로 인한 광범위한 불만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왕상 11:29-39)에 영향을 받아 그는 북부 열 지파의 왕이 되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발각되었고 그는 이집트로 도망쳤으며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파라오 시삭의 보호 아래 머물렀다. 솔로몬이 죽은 후 그는 돌아와서 새로운 왕 르호보암에게 세금 감면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된 대표단에 참여했다. 르호보암이 그들의 청원을 거절하자 열 지파는 다윗 가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여로보암을 그들의 왕으로 선포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을 형성했다. 처음에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남아서 르호보암에게 충성스러운 새로운 유다 왕국을 형성했다.
여로보암은 세겜을 북왕국의 수도로 재건하고 요새화 했으며 율법에 규정된 예루살렘 성전 순례로 인해 그의 백성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금 송아지로 두 개의 주 성전을 지었다. 하나는 벧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단에 있었다. 왕상 12:25-33에서 그의 숭배 활동에 대해 비판을 받았지만 송아지 숭배는 이스라엘 의식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 의식의 재도입이었다. 벧엘과 단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했다.
왕상 13:1-6에 따르면 여로보암이 벧엘에서 분향하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제단을 파괴할 "다윗의 집에서 요시야라는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약 300년 후에 통치하게 될 유다의 요시야 왕을 지칭함). 대담한 반항적인 말을 한 선지자를 체포하려 했을 때 여로보암의 손은 "말랐으며" 그가 서 있던 제단은 갈라졌다. 하나님의 사람의 간청으로 그의 손은 다시 회복되었지만 기적은 그에게 지속적인 인상을 주지 않았다(왕상 13:33).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거절했다. 예언은 왕하 23:15-16에서 성취되었다.
여로보암에게 경고한 이 "신의 사람"은 잇도라는 선견자와 동일시된다.
여로보암의 아내는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녀는 마소라 본문에는 이름이 없지만 70인 역에 따르면 그녀는 아노라는 이집트 공주였다.
왕상 14장에서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에 걸리고 아내를 선지자 아히야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히야의 메시지는 아비야가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다와의 전쟁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유다와의 지속적인 전쟁" 중이었다. 남 왕국은 북쪽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군사적으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오래 지속된 경계 분쟁이 있었는데 양측의 여러 왕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된 싸움으로 해결되었다.
여로보암 통치 18년에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아비얌이라고도 함)가 유다 왕이 되었다(대하 13:1). 3년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아비야는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여로보암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연대기에 따르면 아비야의 군대는 40만, 여로보암은 80만이었다(대하 13:3). 성경 기록에 따르면 아비야가 이스라엘 군대에게 복종하고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온전해지도록 촉구했지만 그의 탄원은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아비야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라는 유명해진 문구로 자신의 군대를 모았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그의 엘리트 전사들은 여로보암의 군대의 협공을 막아내고 승리하여 50만 명을 죽였다(대하 13:17).
여로보암은 아비야에 대한 이 심각한 패배로 불구가 되었고 남은 통치 기간 동안 유다 왕국에 거의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대하 13:20). 그는 또한 벧엘, 여사나, 에브론의 마을과 그 주변 마을을 잃었다(대하 13:19). 벧엘은 여호수아에 의해 베냐민 지파에 할당된 이스라엘의 남쪽 국경에 위치한 여로보암의 황금 송아지 숭배(레위 자손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음)(왕상 13:25-33)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여호수아가 베냐민 지파에 할당한 오브라로 여겨지는 에브론도 마찬가지였다(수 18:20-28).
여로보암은 아비얌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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