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은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통일 왕국(이스라엘과 유다)의 첫 번째 왕이었다. 전통적으로 B.C.11세기 후반에 위치한 그의 통치(B.C.1037-1010년 경으로 추정)는 부족 사회에서 국가로의 전환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사울의 생애와 통치는 주로 히브리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본문에 따르면, 그는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고 기브아에서 통치했다. 그는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인과의 전투에서 잡히지 않기 위해 칼에 쓰러졌으며(자살) 그의 아들 셋도 죽었다. 왕위 계승은 그의 유일한 살아남은 아들 이스보셋과 결국 승리한 그의 사위 다윗이 경쟁을 벌였다.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사울은 2년 동안 통치했지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본문이 잘못되었고 20년 또는 22년의 통치가 더 가능성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성경적 설명
사울의 생애에 대한 성경 기록은 사무엘서에서 찾을 수 있다.
사울 왕의 가족
타나크(유대교 경전)에 따르면 사울은 마드리(마트리) 가문의 기스(키쉬)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하나인 베냐민 지파의 일원이었다. 그는 기브아 출신으로 보인다.
사울은 아히마아스의 딸 아히노암과 결혼하여 네 아들(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리스위(이스보셋))과 두 딸(메랍과 미갈)을 낳았다.
또한 사울에게는 아야의 딸인 리스바라는 첩이 있었는데 그는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낳았다(사무엘하 21:8).
사울은 길보아 산 전투에서 죽었고(사무엘상 31:3~6, 역대상 10:3~6) 베냐민 지역의 셀라에 묻혔다(사무엘하 21:14).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가 길보아 산에서 그와 함께 죽었다(사무엘상 31:2, 역대상 10:2). 이스보셋은 4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의 요청에 따라 아브넬은 미갈을 다윗에게 돌려보냈다. 이스보셋은 2년 동안 통치했지만 아브넬이 죽은 후 두 명의 대장에 의해 살해되었다(사무엘하 4:5).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 왕에게 놉의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살해된 후 사울의 아들 7명을 죽이는 것만이 생계를 잃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사무엘하 21:1-6). 따라서 다윗은 알모니, 므비보셋, 그리고 사울의 다섯 손자(메랍과 바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사이에서 난 아들)를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겼다(사무엘하 21:8~9). 기브온 사람들은 일곱 명을 모두 죽이고 기브아 성소에 몸을 매달았다(사무엘하 21:8~9). 5개월 동안 그들의 몸은 비바람에도 매달려 있었고 슬픔에 잠긴 리스바는 그들이 짐승과 맹금류에게 먹히는 것을 막았다(사무엘하 21:10). 마침내 다윗은 사울과 그들의 이복형제 요나단의 유해와 함께 시체를 끌어내려 셀라의 가족 무덤에 묻었다(사무엘하 21:13~14). 미갈은 자녀가 없었다(사무엘하 6:23).
사울의 유일한 남자 후손은 요나단의 절름발이 아들 므비보셋(사무엘하 4:4)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다섯 살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다윗의 보호를 받았다(사무엘하 9:7~13). 므비보셋에게는 어린 아들 미가(사무엘하 9:12)가 있었는데, 그는 9대까지 이름을 지은 네 아들과 후손을 가졌다(역대상 8:35~38).
왕으로 기름 부음
사무엘상은 세 장에 걸쳐 사울이 왕위에 올랐던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사울은 아버지의 길 잃은 당나귀를 찾기 위해 종과 함께 보내졌다. 기브아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나 그들이 숩 지역에 도착했을 때 사울은 수색을 그만두라고 제안했다. 사울의 종은 그에게 유명한 선견자가 있는 라마 마을이 근처에 있다고 말하고 먼저 그와 상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선견자(나중에 사무엘로 표기됨)는 사울에게 후대를 베풀고 나중에 남몰래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사무엘상 9 장).
다른 나라들처럼 중앙 집권적인 군주제를 세우기 위해 생겨난 민중들의 움직임으로, 사무엘은 왕을 임명하기 위해 베냐민의 미스바에 사람들을 모아 왕을 임명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했다(사무엘상 8장). 사무엘은 지파와 가문별로 사람들을 조직했다. 그는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 베냐민 지파을 선택하고 지파 내에서 마드리 가문을 선택하고 그들 중에서 사울을 선택했다. 왕으로 선출된 사울은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기브아에 있는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사무엘상 10:17-24).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사울의 선택한 것에 공개적으로 불만족스러워했다.
나하스가 이끄는 암몬 사람들은 길르앗 야베스를 포위했다. 항복 조건으로 도시 거주자들은 강제로 노예가 되며 오른쪽 눈을 제거해야 했다. 대신 그들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요단 서쪽 지파들은 사울 아래 군대를 모았다.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암몬 사람들을 이기고, 백성은 길갈에 모여 사울을 왕으로 찬양하고 그가 면류관을 차지했다(사무엘상 11장). 사울이 첫 번째로 한 행동은 이전에 그의 왕권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군사적 승리
길르앗 야베스의 포위 공격을 없앤 후 사울은 모압인, 암몬인, 에돔인, 아람 르홉, 소바의 왕들, 블레셋인, 아말렉인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다(사무엘상 14:47). 성경 요약은 "그가 어디를 향하든 그가 승리했다"고 말한다.
그의 통치 2년째에 사울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 그리고 수천 명의 이스라엘 병사들로 이루어진 소수의 군대가 믹마스를 지나는 동안 병거 3,000대, 기병 6,000대, 보병 3만 명이 넘는 방대한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다. 전투가 끝난 후 사울은 성급한 맹세로 그의 군대에게 금식을 지시했다. 요나단의 일행은 맹세를 인식하지 못하고 꿀을 먹었고, 그 결과 요나단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맹세를 어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개입으로 인해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승리로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때까지 그 위반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버림받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이는 동안 사무엘은 필요한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7일 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무엘의 말없이 일주일이 지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안해하자 사울은 희생 제물을 바쳐 전투를 준비했다. 사울이 번제를 마치고 난 뒤 바로 그 자리에 도착한 사무엘은 지시에 따르지 않은 사울을 꾸짖었다.
사울이 믹마스 고개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한 지 몇 년 후,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고 신명기 25:19에 명시된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가축을 포함한 그들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아말렉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던 겐 사람들이 떠나도록 미리 경고한 사울은 전쟁에 나서 아말렉 사람들을 물리쳤다. 사울은 모든 남자, 여자, 어린이, 질이 떨어지는 가축을 죽였지만 왕과 최고의 가축은 남겼다. 사무엘은 사울이 그의 지시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를 왕으로 두기를 거부하셨다고 사울에게 알렸다. 사무엘이 돌아가려 할 때 사울은 그의 옷을 붙잡으며 옷이 찢어졌다. 사무엘은 왕국도 마찬가지로 사울에게서 찢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무엘은 아말렉 왕을 직접 죽였다. 사무엘과 사울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 이 사건 후에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사무엘상 15:33~35).
사울과 다윗
사무엘은 표면상 제사를 드리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향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초대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새는 아들들을 하나씩 데려왔지만 사무엘에게 거절당했다. 마침내 이새는 양을 돌보는 막내 다윗을 보냈다. 사무엘에게 데려가자 다윗은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에게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다.
사무엘상 16:14~23에서 사울은 하나님이 보내신 악령에 의해 괴로워한다. 그는 부드러운 음악을 요청하고 하피스트는 하프 연주자 및 기타 재능으로 유명한 이새의 아들 다윗을 추천한다.
사울이 원한다는 소식이 이새에게 전해지자 그는 양 떼를 돌보던 다윗을 공물로 선물과 함께 보내고, 다윗은 사울의 갑옷을 나르는 담당으로 임명되었다. 이새의 허락을 받아 그는 궁정에 남아서 문제가 있는 동안 사울을 진정시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하프를 연주했다. (사무엘상 17:15에 따르면 다윗은 주기적으로만 궁정에 출석했다.)
(사무엘상 17:1–18:5)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와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골짜기 반대편에 진을 쳤다. 블레셋의 투사 골리앗은 일대일 싸움을 걸었지만 이스라엘 사람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윗은 군대에 있는 그의 세 형들에게 음식을 배달하는 어린 양치기로 묘사되며 골리앗의 싸움 건 것을 듣게 된다. 다윗이 몇몇 병사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을 조롱했다. 그의 연설을 우연히 듣고 다윗을 그의 투사로 임명하는 사울에게 보고되었다. 다윗은 단 한 발의 팔매질로 골리앗을 쉽게 이겼다. 구절의 끝에서 사울은 그의 장군 아브넬에게 다윗이 누구인지 물었다.
사울은 골리앗을 이기고 나서 지금 인기 있는 다윗에게 그의 큰 딸 메랍을 아내로 제안했지만 다윗은 이의를 제기했다. 다윗은 블레셋 전쟁에서 자신의 이름을 떨쳤다. 다윗이 전투에서 돌아오자 여인들은 그를 노래로 찬양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다윗이 더 위대한 전사임을 암시한다. 사울은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제부터 그를 왕좌의 라이벌로 여기게 된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요나단은 다윗을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고 "다윗을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다윗과 맹약을 맺었다.". 요나단은 심지어 사울을 계승하게 되는 다윗의 지위를 상징하는 군복을 다윗에게 주었다.
사울은 두 번에 걸쳐 자신을 위해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에게 창을 던졌다. 다윗은 점점 더 성공하고 사울은 점점 분개했다. 이제 사울은 적극적으로 다윗을 대적했다. 사울은 다른 딸 미갈을 다윗과 결혼하도록 제안했다. 다윗은 처음에 자신이 너무 가난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제안을 거부했다. 사울은 신부의 값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개를 받겠다고 제안했고 다윗이 그 와중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다윗은 양피 200개를 얻었고 결과적으로 미갈과 결혼했다. 요나단은 사울과 다윗 사이의 단기적인 화해 자리를 마련하고, "하나님의 고통스러움을 주는 영"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예전처럼"(사무엘상 19:1~7) 잠시 동안 사울을 섬겼다. 사울은 밤에 암살자를 보내지만 미갈은 그의 침대에 집안의 우상을 두어 그들을 속여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다윗은 아버지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요나단에게 도망쳤다. 요나단은 사울과 식사를 하는 동안 다윗의 부재에 대해 형들에게 부름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울은 계략을 꿰뚫어 보고 다윗을 보호한 요나단을 꾸짖으며 다윗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에게서 왕국을 앗아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분노로 가득 찬 창을 던졌다. 다음날 요나단은 다윗을 만나 사울의 의도를 말했다. 두 친구는 작별 인사를 하고 다윗은 시골로 도망쳤다. 사울은 나중에 미갈을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
사울은 나중에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 놉의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골리앗의 칼을 주었음을 그의 양치기인 에돔 사람 도엑을 통해 알게 되었다. 도엑은 아히멜렉과 85명의 다른 사제들을 죽였고 사울은 놉 전체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다윗은 이 시점에서 놉을 떠난 상태였고 무법자들을 포함하여 약 300명의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았다. 이 사람들과 함께 다윗은 블레셋의 공격으로부터 그일라 마을을 구했다. 사울은 도시를 포위하여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가둘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다윗은 그일라 시민들이 그를 배신하고 사울에게 붙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울의 추적을 피해 십으로 도망쳤다. 사울은 두 차례에 걸쳐 십 근처에서 다윗을 사냥했다.
십의 주민들 중 일부는 배반하여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알렸지만,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부하들과 함께 마온으로 도망쳤다. 사울은 다윗을 뒤쫓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하자 추격을 중단해야 했다. 그 위협을 처리한 후 사울은 다윗이 있는 엔게디의 동굴로 향했다. 그가 동굴을 수색하는 중에 다윗은 들키지 않게 사울의 옷을 잘랐지만 다윗은 그의 부하들이 왕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그런 다음 다윗은 동굴을 나가 사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사울이 화해하도록 설득하는 연설을 했다.
두 번째로 사울은 부하들과 함께 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밤에 사울의 진영에 들어갔으며 그의 부하들이 왕을 죽이는 것을 다시 제지했다. 대신 그는 사울의 창과 물병을 훔쳤고 자신의 창을 사울 곁의 땅에 찔렀다. 다음 날 다윗은 그를 죽일 수 있었다는 증거로 물병과 창을 보이며 자신을 사울에게 드러냈다. 그런 다음 다윗은 사울이 그와 화해하도록 설득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그들은 다시는 서로를 볼 수 없었다.
길보아 전투와 사울 왕의 죽음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전쟁을 일으켜 수넴에 모였고 사울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길보아 산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는 엔돌의 신접한 여자 또는 마녀에게 상의하러 갔다.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신접한 여자는 그에게 왕이 주술을 사형 죄로 만들었음을 상기시켰지만, 그는 사울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왕국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예언자 사무엘의 정신을 불러들였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버리셨고 더 이상 그의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며 다윗에게 왕국을 주셨으니 다음날 그는 패하여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울은 두려움에 쓰러지고 신접한 여자는 다음 날의 전투를 상정하여 그를 음식으로 회복시켰다.
사무엘서는 사울의 죽음에 대해 상충되는 설명이 나온다. 사무엘상과 역대상 10장의 기록에서 패배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적으로부터 도망쳤고 사울은 그의 병기 든 자에게 그를 죽일 것을 요청했지만 병기 든 자는 거절하여 사울은 자신의 칼에 엎드러졌다. 사무엘하에서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전투 후 창에 기대어있는 사울을 발견하고 죽어가는 그의 고통을 끝냈다는 것을 전달했다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인 아말렉 사람을 죽였다.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시신과 함께 전투에서 죽은 세 아들의 시신을 찾아 목을 베고 벧산 성벽에 전시했다. 그들은 아스다롯(가나안 사람들의 아슈켈론 신전)의 성전에서 사울의 갑옷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밤에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은 화장과 장사를 위해 시체를 회수했다(사무엘상 31:8~13, 역대상 10:12). 나중에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져다가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이 있는 셀라에 묻었다(사무엘하 21:12~14).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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