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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이스라엘

[남유다] 르호보암

by 금곡동로사 2021.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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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호보암, 바젤 시청의 대회의실에 그려진 벽화 / 르호보암의 오만 by 한스 홀바인

 

르호보암(BC 931-913년 경 통치)은 남유다 왕국의 첫 번째 왕이었다. 그는 솔로몬의 아들이자 후계자이자 다윗의 손자였다. 열왕기 상과 역대 하에서 그는 처음에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북부 10개 지파가 BC 932/931년에 반란을 일으켜 여로보암의 통치하에 독립된 북이스라엘 왕국을 형성했다. 르호보암은 유다 왕국 즉 남부 왕국의 왕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성경적 배경

 

유대인 백과사전에 따르면, "솔로몬의 지혜와 힘은 여러 국경 도시의 반란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르신의 다마스쿠스는 솔로몬으로부터 독립을 확보했다. 선지자 아히야의 말(왕상 11:29-40)에 의해 그의 야망이 자극된 작업 감독자 여로보암은 이집트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솔로몬이 죽기 전에 통일된 다윗 왕국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다마스쿠스가 독립하고 열 지파 중 가장 저명한 에브라임의 강력한 사람이 그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 왕국의 미래는 불확실해졌다."

 

왕상 11:1-13에 따르면 솔로몬은 외국 아내와 결혼하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압 신과 암몬 신을 숭배하고 신전을 지음으로써 토라의 명령(신 7:3)을 어겼다.

 

르호보암의 어머니 나아마는 암몬 사람이었고 솔로몬이 결혼한 외국 아내 중 한 사람이었다.

 

둘로 분열된 왕국 / 르호보암이 요새화한 도시들

 

성경 이야기

 

전통적인 성서 연대기에서 르호보암의 통치가 BC 10세기 중반까지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는 히브리 성경의 왕상 12장과 14:21-31과 역대 하 10-12장에 묘사되어 있다. 르호보암은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41세였다.

 

솔로몬의 후계자 르호보암의 대관식을 위한 집회는 열 지파 영토 내에 있는 성스러운 역사 도시인 세겜에서 소집되었다. 대관식이 열리기 전에 의회는 솔로몬을 뒤따르는 르호보암의 정책 개혁을 요청했다. 요청된 개혁은 왕실의 국고, 솔로몬의 궁정의 장엄함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연로자들은 적어도 르호보암에게 민중에게 예의 바르게 말하라고 권고했다(그들이 그에게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자신이 함께 성장한 청년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들은 왕에게 백성에게 약함을 보이지 말고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라고 조언했다.

 

외관상의 이유는 솔로몬의 건물과 모든 종류의 사치품에 대한 막대한 지출로 인해 이스라엘에 가해진 무거운 부담이었지만, 다른 이유는 북쪽과 남쪽의 역사적 대립을 포함했다. 두 지역은 다윗이 승리하여 모든 지파를 통합하는 데 성공할 때까지 독립적으로 행동했지만 에브라임(북부 지역을 지칭)의 질투로 공개적인 반란으로 발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종교적 고려도 작용했다. 성전 건축은 땅에 흩어져있는 다양한 성소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산당의 사제들이 반란을 지지했을 것이다.

 

여로보암과 백성은 반란을 일으켜 북부의 열 지파가 이탈하여 별도의 왕국을 형성했다. 새로 분리된 왕국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왕국이라고 불렸으며 사마리아, 에브라임 또는 북부 왕국으로도 알려졌다. 르호보암이 남긴 영역은 유다 왕국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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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호보암의 17년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예루살렘을 유다의 수도로 유지했지만,

 

왕상 14:22-24

 

22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23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24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내전

 

르호보암은 180,000명의 병력과 함께 새로운 이스라엘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과 싸우지 말라고 조언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왕상 12:21-24, 대하 11:1-4).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17년의 통치 기간 동안 전쟁 상태에 있었다고 기록했다(대하 12:15).

 

이집트의 침공

 

르호보암 통치 5년째에 이집트 왕 시삭은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많은 도시를 점령했다. 나답의 아들 여호수아에 따르면 르호보암이 15개의 요새화 도시를 지었다고 대하 11:5-12에 언급된 것은 공격이 예상치 못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연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시삭은 전차 1,200대, 기병을 포함한 병력 60,000명과 훕(리비아)인, 숩(숙키)인, 구스(쿠시)인으로 이루어진 군대와 함께 진군했다. 시삭의 군대는 게셀과 기브온 사이의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모든 요새 도시를 점령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르호보암은 시삭에게 성전에 있는 모든 보물을 공물로 주었다. 이집트 캠페인은 솔로몬 통치 기간에 확립된 엘랏과 네게브를 통한 남 아라비아와의 무역을 중단시켰다.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었다.

 

시삭의 캠페인 / 카르나크의 Bubastite Portal에 남아있는 캠페인 기록

 

계승

 

르호보암에는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이 있었다. 그들은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낳았다. 그의 아내로는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이자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의 소생인 마할랏이 있었다. 마할랏과 그의 아들은 여우스, 스마랴, 사함이다. 마할랏 이후 그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딸인 사촌 마아가와 결혼했다. 마아가와 그의 아들은 아비야, 앗대, 시사, 슬로밋이다(대하 11:18-21). 그의 다른 아내, 아들 및 모든 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르호보암은 17년 동안 통치했다(왕상 14:21). 그가 죽었을 때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조상 옆에 묻혔다. 그의 뒤를 아비야가 계승했다(대하 12:16).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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