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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페르시아

팀브라 전투(Battle of Thymbra)

by 금곡동로사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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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브라 전투에서 크로이소스의 패배, BC 547년경

 

팀브라 전투는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 간의 전쟁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였다. 카파도키아에서 벌어진 프테리아 전투가 끝난 후 크로이소스를 쫓아 리디아로 간 키루스는 BC 547년 12월 사르디스 북쪽 평야에서 부분적으로 완전하지 않지만 크로이소스의 많은 병력과 만났다. 크로이소스는 많은 병사를 보충하여 키루스의 군대보다 약 두 배 정도 많았지만 완전히 패배했다. 이 전투로 전세는 결정되었으며 14일간의 사르디스 공성전 이후 도시는 함락되었고 리디아는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

 

 

상황

 

키루스는 BC 550년에 메디아 왕국을 정복하여 이웃 왕국인 리디아와 갈등을 일으켰다. 크로이소스는 증가하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힘의 균형을 원하는 바빌로니아,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다. 델포이 신탁을 통해 페르시아를 향해 진군하면 위대한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향했다. 리디아 군과 페르시아 군은 카파도키아의 프테리아에서 마주쳤다. 양군은 몇 주간의 대치 끝에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리디아 기병의 돌격이 위력을 발휘했지만 페르시아 궁병의 활약으로 기병을 물리게 되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크라이소스는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재빨리 사르디스로 돌아간 크로이소스는 그리스와 이집트 용병을 돌려보내고 5개월 후에 오도록 지시했다. 당시에는 겨울 동안 전쟁을 하지 않고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면 캠페인을 행했기에 휴식기 동안 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한 관행이었다.

 

키루스는 관행을 깨고 몰래 뒤쫓았으며 그의 계획은 전투 준비가 되지 않은 리디아 왕을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로이소스는 용병을 최대한 동원하여 키루스보다 두 배 이상의 병력을 갖췄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키루스 군은 총 196,000명의 병력이 있었으며 31,000-70,000명이 페르시아 군으로 구성되었다. 궁수와 슬링어를 포함한 20,000명의 보병, 10,000명의 정예 보병/기병으로 된 페르시아 불사 부대(Immortals), 그리고 20,000명의 펠타스트와 20,000명의 파이크 창병으로 구성되었다. 궁수와 슬링어를 제외한 모든 병사는 작은 방패에서 큰 방패까지 여러 크기의 방패를 장비했다. 나머지는 42,000명의 아라비아인, 아르메니아인과 메디아인으로 된 126,000명에 이르는 보병이었다. 또한 낙타병 300, 전차 300대, 각각 20명을 수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공성탑 5-6대가 있었다. 합쳐서 1,000명 이상이었는데 각 전차에 한 명의 일반인과 한 명의 병사가 탑승했기 때문이다.

 

크세노폰은 크로이소스가 60,000명의 바빌로니아인, 리디아인, 프리기아인, 카파도키아인, 헬레스폰트의 여러 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42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300,000명의 병력에 60,000의 기병이 포함되었다. 또한 이집트인 120,000명과 적어도 500명 이상의 병력으로 된 전차 300대가 있었다. 크세노폰이 제시한 전투 횟수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가능성의 범위 내로 간주되지만 실제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절반 미만일 수 있다.

 

아티카 붉은 도자기에 묘사된 크로이소스 / 리디아 군의 주력인 중기병
카파도키아 보병, 인도 보병, 이집트 창병, 이오니아 보병 / 바빌로니아 궁수, 바빌로니아 보병
키루스 대왕 / 페르시아 보병, 방패 뒤에서 활을 쏘는 궁수
페르시아 보병, 방패 뒤에서 활을 쏘는 궁수 / 100미터까지 화살을 날린 페르시아 궁병
페르시아 불사 부대 / 페르시아 기병
페르시아 전차병 / 페르시아 정예 기병

 

전투

 

양 군의 배치도. 리디아 군(파란색), 페르시아 군(빨간색)

리디아 군 - 105,000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

페르시아 군 - 49,000명의 명력과 500대의 전차, 5-6개의 타워

 

양군의 측면에는 기병을, 중앙 전방에는 전차를 배치했다. 크로이소스는 이집트 창병을 배치했다. 페르시아 군 좌측에는 (스마일 표시) 비밀 무기인 낙타병을 배치했다. 낙타병은 리디아 기병을 2차로 공격했다. 리디아 군은 측면 기병대가 중앙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창병보다 빠르게 전진했다. 키루스는 리디아 군의 대열이 자신의 군대보다 더 길게 늘어선 것을 관찰했다. 그는 중앙 병력을 전진시키고 측면은 순차적으로 전진하도록 지시했다. 키루스는 불사 부대를 포함한 정예 부대를 측면에 배치했다.

 

1. 크로이소스는 처음에는 측면의 보병들이 따라잡을 수 있도록 기병이 멈출 것을 요구했지만 페르시아 군이 그림과 같은 대형을 채택하면서 다시 전진하여 리디아 측면과 중앙 사이에 틈이 생겼다. 리디아 기병대는 페르시아 군의 후방에 들어갈 기회를 보고 안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질주하는 기병에 의해 솟아오른 큰 먼지 구름 때문에 그들은 뒤늦게 진격하는 키루스의 기병을 알아채지 못했다. 측면의 페르시아 기병과 전차 모두 오른쪽의 키루스, 왼쪽의 히스타스피스 아래에서 돌격했다. 그들은 측면으로 기습하여 리디아 기병을 가두었다.

2. 처음의 보병과 기병의 공격은 진행되었지만, 대형 안에 있는 타워와 페르시아 궁병들의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로 인해 수렁에 빠졌다.

 

3. 양익의 기병이 돌격하는 것을 보고 중앙의 아브라다타스 페르시아 지휘관은 낫을 단 전차로 반대편의 리디아 전차를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리디아 전차들은 제때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일부는 도망가기도 하고 일부는 아군인 리디아 보병 쪽으로 향해 혼란에 빠지게 했다. 아브라다타스는 이집트 창병 대열에 공격을 가했다. 그는 처음에는 수레바퀴의 낫으로 큰 손실을 입혔지만, 결국 창병들에게 전차들이 쓰러지고, 그의 부하들과 함께 아브라다타는 전사했다. 하지만 이 공격으로 인해 이집트 창병들을 상당 시간 동안 주요 싸움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1. 리디아 말들은 낯선 낙타의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그들은 측면에서의 기습에 의해 갇혔다. 기병들은 전투를 하기 위해 내렸지만 그들의 긴 창이 효과적이지 못하였으며 전차에 의해 베이거나 페르시아 기병들에 의해 베어졌다. 생존자들은 전장을 이탈했다.

2. 리디아 기병이 패주 하면서 페르시아 기병과 전차가 안쪽으로 돌아들어와 측면과 후방에서 리디아 보병을 공격했다. 리디아 군의 옆구리가 사방에서 찌그러졌다. 리디아 측면의 생존자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달아났다.

3. 한편 이집트 창병은 꾸준한 전진을 재개하여 페르시아 라인의 중앙을 차지했다. 창병들은 페르시아의 중앙 대열을 뚫고 들어갔으며 페르시아의 중앙이 패주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에는 그들의 퇴로를 막는 공성탑이 서 있었다. 타워의 화살 공격으로 이집트 창병은 일시적으로 멈췄다.

 

1. 측면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크로이소스는 전장을 떠났다.

 

2. 키루스는 이제 이집트 창병을 둘러싸고 화살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저항했다. 그들의 끈기에 감명을 받은 키루스는 그들에게 페르시아 군에 들어올 것을 제의했다. 그들은 크로이소스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항복했다.

 

 

여파

 

전투가 끝난 후 리디아 인들은 사르디스의 성벽 안으로 들어가 키루스 군에 포위되었다. 14일 동안 포위 후 가파른 지형으로 인해 수비가 허술한 곳의 성벽이 함락되면서 도시는 무너졌다. 크로이소스는 사로잡혔고 아이올리스와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포함한 그의 영토는 키루스의 강력한 제국에 통합되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갈등은 키루스의 후계자들 시대에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으로 발전했다. 이오니아와 아이올리스를 차지한 것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이집트 병사도 항복하여 키루스의 군에 합류했다.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크로이소스를 정중하게 대했다. 바빌로니아 나보니두스 연대기에서 키루스가 왕을 무찌르고 죽였다는 모순된 기록을 했지만 리디아 왕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팀브라 전투는 역사상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아케메네스 제국이 부상하는 과정에 일어났다. 리디아 몰락 후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로 관심을 돌려 정복했으며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하나의 권위 아래 4대 강국이 한때 소국이었던 페르시아에 복속되었으며 페르시아는 역사상 최초의 초강대국이자 최초의 다국적 제국으로 등장했다. 키루스가 남긴 유산은 어마어마했으며 이전의 제국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무력에 기반을 둔 아시리아와 달리 키루스는 관용과 연방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이 유산은 이후 셀레우코스, 파르티아, 사산 왕조와 같은 이 지역의 모든 제국이 모델로 삼았다. 키루스는 또한 이후로 지속되는 이란의 국가 정체성에 형태를 부여했다.

 

BC 500년경 페르시아 제국, 제국의 대부분을 키루스 대왕이, 이집트(노란색)는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정복했다. 연한 노란색 지역은 다리우스 1세 시대(521-486)에 정복한 영역.

 

 

출처 : 위키피디아, Battles and Campaig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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