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근동에서 가장 큰 제국을 통치했다. 이들은 건국부터 몰락까지 제국을 이끈 12명의 왕이다.
고전 시대에 페르시아에는 많은 왕이 있었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만큼 강력한 지배자는 거의 없었다.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그들은 동쪽의 인더스 강에서부터 서쪽의 발칸반도에 이르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다스렸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가져온 막대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고 국경 너머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연대순으로 나열하면, 이들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건국부터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의 손에 멸망될 때까지 "페르시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던 12명의 사람이다.
BC 6세기 페르시아의 왕들 : 아케메네스 제국의 시작
키루스 대왕 (재위 BC 550-530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시자인 키루스의 삶의 대부분은 신화와 전설로 덮여 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의 아들이자 메디아 왕의 손자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는 메디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는 키루스를 정복자의 길로 이끌었고, 리디아, 서부 아나톨리아, 엘람, 바빌로니아 및 중앙아시아의 많은 지역이 그의 영토에 추가되는 일련의 캠페인에 착수했다.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통치했다.
키루스는 또한 많은 행정 개혁과 건설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는 유대 민족이 유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 유명하며, 바빌론 유수를 종식시키고 예배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에 대한 일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사트라피 제도를 시작했고 군대의 최고 정예 전사들로 10,000명의 페르시아 불사 부대를 창설했다. 키루스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마사게타이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죽은 후, 그는 페르시아의 왕이자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시자로서의 그의 지위를 숨기는 비교적 단순한 무덤에 묻혔다. 키루스 대왕은 페르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 중 한 명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정치, 종교,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캄비세스 2세 (재위 BC 530-522년)
캄비세스 2세는 키루스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카산다네의 장남이다. BC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캄비세스는 바빌로니아 북부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임되기까지 9개월 동안 직위를 유지했다. 그는 나중에 키루스의 불운한 마사게타이에 대한 원정에 참여했지만 아버지가 죽기 전에 고국으로 보내졌다.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캄비세스는 근동의 마지막 강대국인 이집트와 곧 충돌하게 되었다. 캄비세스 2세는 처음에 이집트를 그 동맹국인 그리스와 카리아로부터 고립시키고, 이집트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했던 키프로스를 탈취하는 데 힘썼다. 그는 또한 시나이를 통해 이집트에 접근하는 것을 제압하기 위해 힘썼다. 캄비세스 2세는 BC 525년 이집트 침공에 나섰고,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몇 달 후 이집트를 정복했다. 후속 캠페인으로 키레네와 리비아의 일부가 페르시아 제국에 추가되었지만 에티오피아 침공은 실패했다.
캄비세스 2세는 파라오의 칭호를 받고 이집트 신전의 권력과 특권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아피스 황소의 신성모독적인 죽음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지만, 이집트 사제들은 여전히 그를 싫어할 이유가 있었다. 미친 폭군이라는 그의 명성은 아마도 훗날의 선전과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BC 522년 캄비세스는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동생 바르디야가 이끄는 반란 또는 바르디야라고 자칭하는 사기꾼에 대처하기 위해 서둘러 이집트를 떠났다.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중 캄비세스는 휘두르거나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바르디야 또는 다리우스 1세의 지지자들이 암살 시도를 한 결과로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는 괴저로 변했고 캄비세스 2세는 11일 후 감염으로 사망했다.
바르디야 (재위 BC 522년)
키루스의 아들이자 캄비세스 2세의 형제인 바르디야는 페르시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왕 중 한 명으로 남아있다. 임종을 앞두고 키루스는 바르디야를 동부 지방의 사트라프(총독)로 삼았고, 캄비세스 2세는 왕이 되었다. 훗날 사료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가 죽기 직전 바르디야는 시샘으로 처형당했지만 비밀에 부쳐졌다. 캄비세스가 이집트에서 떠나는 동안, 바르디야 또는 바르디야로 가장한 가우마타라는 이름의 메디아인 마고스(아마도 조로아스터교 사제, "마기"로도 불림, 신약성서에는 "마고이"(동방박사들)로 표현)는 메디아에서 곧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반란을 일으켰다. 캄비세스 2세는 폭군이었고, 바르디야는 3년 동안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는 두 팔 벌려 환영받았다. 캄비세스 2세는 행동하기 전에 감염된 상처로 사망했고 바르디야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7명의 페르시아 귀족들은 바르디야가 메디아로 정부 자리를 옮기고 메디아를 지나치게 선호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타도하기로 결정하면서 그가 가우마타라는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오타네스, 인타프레네스, 고브리아스, 히다르네스, 메가비조스, 아스파티네스, 다리우스 등 일곱 명의 공모자는 메디아의 요새 중 한 곳에서 바르디야를 살해했다. 이제 공모자 중 누가 페르시아의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말을 타고 정렬했다. 말을 타고 가장 먼저 가까이서 태양을 맞이하는 사람이 왕이 되었다. 주인의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다리우스의 마부는 주인이 마음에 들어하는 말의 생식기에 그의 손을 문질렀다. 때가 되자, 그는 말들의 콧구멍에 손을 대면서, 말들이 흥분하고 들썩거리게 했다.
다리우스 1세 대왕 (재위 BC 522-486년)
다리우스 1세는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인 히스타스페스의 장남으로, 캄비세스 2세의 창 잡이가 되었다. 원래 아케메네스 왕조의 하위 분파 출신으로, 다리우스 1세가 권력을 잡은 이야기는 기껏해야 흐릿하다. 캄비세스 2세가 죽은 후, 바르디야 또는 가우마타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으나 다리우스 1세와 그의 6명의 동료들에게 암살당했다. 다리우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박트리아, 바빌로니아, 엘람, 메디아, 파르티아, 아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공모자들의 도움으로 진압되었다. 이후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 병합을 완료하고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계곡의 대부분을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시키기 위해 여러 번의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유럽의 스키타이인을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는데, 트라키아와 다뉴브 강을 건너 흑해 주변, 볼가 강까지 추격했다. 몇 달 후 스키타이인이 전투를 거부하자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우스 1세는 또한 마케도니아와 에게해 제도의 그리스 도시를 제국에 통합했다. BC 499년에 이들 중 많은 수가 페르시아 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키프로스와 카리아의 반란군과 합류했다.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의 지원으로 반란군은 BC 493년까지 계속 싸울 수 있었다. 다리우스 1세는 반란군과 그 동맹군을 평정하고 응징하기 위한 후속 캠페인을 수행하였으며 BC 490년 마라톤에서 페르시아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의 군사 원정과 함께,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의 여러 주요 개혁을 수행했다. 그는 제국을 20개의 사트라피로 나누고, 그들을 감독할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총독(사트라프)을 임명했으며, 왕실 관리국을 창설하고, 많은 지부가 있는 법원을 설립하고, 만국 통화를 확립하고, 왕의 길과 운하 제도를 세우고, 새로운 세제를 제정하고, 제국 전역에 수많은 신전과 궁전을 세웠다. 다리우스 1세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굳게 믿었던 것으로 알려진 페르시아의 첫 번째 왕이기도 하다.
BC 5세기 페르시아의 왕들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BC 485년-465년)
다리우스 1세와 키루스의 딸 아토사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군에 대한 원정에 앞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다리우스 1세의 장남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혈통과 다리우스 1세가 왕이 된 후 태어난 첫아들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페르시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페르시아의 왕이 된 후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그리스로 관심을 돌렸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제국 전역에서 보급품과 병사들을 모으는 한편, 그의 군대가 통과하기 위한 도로와 운하를 준비하는데 3년을 보냈다. 잠시 지체한 테르모필라이와 아르테미시온에서 함대의 일부를 잃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테나이를 점령하고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의 반전과 바빌론에서의 불온한 소문으로 크세르크세스는 대부분의 군대와 함께 철수했다.
BC 479년 플라타이아에서 페르시아가 두 번째로 패배하면서 크세르크세스 1세의 그리스 본토 침공은 끝이 났다. 전투는 이제 에게해를 넘어 이집트와 키프로스까지 확산되었다. 델로스 동맹 전쟁으로 알려진 이 분쟁은 BC 477-44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크세르크세스 1세는 페르시아로 돌아와 제국의 여러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와 다른 일들을 감독했다. 그러나 BC 465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궁정의 하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은 왕실 경호대장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당했다. 아르타바누스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몰아내기 위해 일곱 아들들을 제국 전역의 요직에 앉혔다. 이 음모는 메가비조스 장군이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세스를 지지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성서 에스더서,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페르시아인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오페라, 영화, TV 쇼, 만화책 및 역사 소설 작품에 등장하는 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페르시아의 왕 중 한 명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BC 465년-424년)
아르세스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셋째 아들로, 아르타바누스의 손에 아버지가 죽은 후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 1세의 장남 다리우스는 아르타바누스 또는 아르세스에게 살해당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로서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아테나이의 지원을 받은 리비아 군주가 이끄는 이집트의 큰 반란(BC 460-454년)에 직면했다.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계속해서 싸우고 있던 그리스와의 전쟁을 이어받았다. 군사적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그리스의 각 국가가 서로 대항하도록 하기 위해 자금을 제공하는 관행을 시작했다. 이러한 관행은 아테네인이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아테나이로 이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BC 449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아테나이 및 아르고스와 칼리아스 화약을 체결하여 그의 아버지 치하에서 시작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또한 아테나이에서 추방된 후, 살라미스의 승리를 설계한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왕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소아시아의 몇몇 도시를 수여받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성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언급된 아닥사스다라고 여겨진다. 이 책들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에스라에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유대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했고, 느헤미야에게는 예루살렘 도시와 그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예루살렘의 성채와 성전에 목재를 제공하기도 했다.
다리우스 2세 (재위 BC 424-404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2세가 되었지만, 45일 동안만 통치했고 페르시아에서만 왕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그의 형제 소그디아노스에게 살해당했고, 그 역시 페르시아와 엘람 외에는 거의 없는 영토를 대략 6개월간 다스린 끝에 그의 사생아 이복형제 오코스에게 살해당했다. 오코스는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였고, 그의 예를 따르려 했던 형제 아르시테스를 죽인 후, 스스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2세라고 칭했다.
다리우스 2세는 아테나이가 시라쿠사이에서 패배할 때까지 그리스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치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아테네인이 아나톨리아의 반군을 지원한 것에 화가 난 그는 이전에 아테네인의 보호를 누렸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트라프를 보냈다. 그는 또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날 무렵 아테나이 함대에 맞서는 스파르타인의 노력에 결정적인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BC 4세기 페르시아의 왕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재위 BC 404-358년)
아버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된 그는, 소아시아에서 캠페인을 하며 큰 명성을 얻은 동생 키루스가 이끄는 반란에 직면했다. 키루스는 그의 형제에 대한 원정을 기록으로 남긴 역사가 크세노폰을 포함하여 1만 명의 그리스 용병으로 강화된 대규모 군대를 이끌었다. 페르시아의 왕은 처음에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지만, 승리를 거두었다. 키루스의 반란으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침공(BC 396-387년)에 직접 맞서기에는 너무 약해져서, 대신 그리스 본토에서 스파르타의 적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야만 했다. 그는 또한 그의 통치 초기에 시작되어 BC 380년 이집트인이 독립을 선언하는 것을 보게 되는 이집트 반란에 대처해야 했다. 이집트를 재정복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BC 372-362년 사이에 아나톨리아의 여러 사트라프가 일으킨 일련의 반란을 초래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그리스인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마치 그리스인의 군주인 양 그들의 의견 차이를 중재함으로써 그리스인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또한 제국 전역에 걸쳐 수많은 건축과 개축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결점은 가족생활이었는데, 그의 하렘 사이의 음모가 사랑하는 아들들과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재위 BC 358-338년)
오코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어린 아들이자 페니키아의 사트라프에서 그의 형들이 여러 음모로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로 즉위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페르시아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곧 가족 80여 명을 처형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치세 대부분은 제국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처하는 데 소비되었다. 아테나이와 화해한 후, 그는 아나톨리아 사트라프들의 강력한 사트라프 군대를 해산하려고 시도했고, 이어진 반란을 진압하는 데 2년이 걸렸다. 그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집트 재정복으로 관심을 돌렸지만 패배했다. 이 엄청난 패배는 아나톨리아, 페니키아, 키프로스에서 반란을 초래했다. 페르시아의 왕이 지배권을 다시 확고히 하는 데 7년이 걸렸지만, 일단 장악하자 이집트를 다시 공격할 때가 되었다. 이번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성공을 거두었고, 이 지역을 정복한 후, 이집트인의 저항을 처벌하기 위한 캠페인에 착수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러한 반란을 처리한 후, 권력을 공고히 하고 추종자들에게 상을 주기 시작했다. 광대한 영지를 부여받고 고관의 지위에 올랐으며 제국의 대부분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은 내시 바고아스만큼 높이 올라간 사람은 없었다. 페르시아의 왕은 또한 영향력을 에게해로 확장하여 많은 섬을 정복하고, 트라키아로 가서 우호적인 군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아테나이와 필리포스 치하에서 떠오르는 강력한 마케도니아 왕국을 경악하게 할 만큼 아케메네스 제국은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바고아스의 권력을 억제하려고 시도했을 때, 이 모든 것은 무너졌다. 그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왕과 그의 가족 대부분을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 (재위 BC 338-336년)
아르샤카(Aršaka) 또는 그리스식 아르세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그의 아내 아토사의 막내아들로 왕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지도 아래, 아케메네스 제국은 재편되고 여러 반란이 진압되면서 전반적인 부흥을 겪고 있었다. 이 중 대부분은 고관의 지위에 올라 왕좌의 배후 실세였던 내시 바고아스의 노력 덕분이었다.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총애를 잃자, 그는 왕실 의사와 공모하여 페르시아 왕과 그의 가족 대부분을 독살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죽자 그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 아르샤카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의 이름을 얻었다. 어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의 경험 부족과 함께 지도력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케메네스 제국을 약화시켰다. 이 약점을 이용하여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는 자신의 경쟁자들을 지원한 아케메네스 왕조에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가 거절하자, BC 336년 필리포스는 10,000명의 군대를 소아시아로 보냈다. 동시에 페르시아의 왕은 바고아스를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바고아스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와 그의 가족을 독살했다. 이후 마케도니아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를 페르시아의 마지막 진정한 왕으로 묘사하는 선전을 했다.
다리우스 3세 (재위 BC 336-330년)
페르시아의 마지막 정식 왕이었던 다리우스는 원래 아케메네스 왕가의 약간 더 낮은 가문 출신으로 아르타샤타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페르시아의 왕이 되기 전에, 그는 전사들과의 싸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왕실 수행원으로 일했으며, 아르메니아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고, 아케메네스 우편 제도 전체를 감독했으며, 궁정에서 왕의 "후원자"가 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4세가 살해된 후, 아르타샤타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고 다리우스 3세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자신의 독립성을 재빨리 증명한 다리우스 3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4세의 고관이자 살인자인 바고아스에게 다리우스 3세를 위해 만들어진 독약을 마시도록 강요했다.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그의 새로운 지위에 정착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다리우스 3세는 곧 서쪽에서의 침략에 직면했다.
다리우스 3세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해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는 소아시아를 침공하여 그 지역의 많은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필리포스가 암살당한 후,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잠시 멈춘 이 원정을 BC 334년에 재개했다. 다리우스 3세는 그리스에서 반란을 선동하고 페르시아 함대를 이용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보급을 끊는 동안 현지 사트라프들이 알렉산드로스를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실패하자 다리우스는 BC 333년 이소스 전투에서, BC 331년 가우가멜라에서 알렉산드로스와 맞붙었고, 두 차례 모두 참패했다. 두 번이나 황급히 전장에서 도망친 다리우스 3세는 남은 사트라프들에게 배신당해 죽었고, 그중 한 명은 "페르시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 (재위 BC 330-329년)
페르시아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자칭 지도자였다. 그는 원래 베소스라는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다. 다리우스 3세의 친척인 그는 가우가멜라 전투(BC 331년)에서 페르시아군의 좌익을 지휘했다. 이듬해 그와 그의 동료 사트라프들은 다리우스 3세를 배반하여 그를 황금 사슬에 묶었다. 다리우스 3세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고, 단순히 그의 지도력에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빠르게 접근하자 사트라프들을 공황 상태에 빠지게 했다. 다리우스 3세는 칼에 찔려 길에서 죽었다. 베소스는 즉시 자신을 페르시아의 왕으로 선포했는데, 이는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인 그가 왕위 계승 다음 서열이었기 때문이다.
베소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라는 이름을 얻었고, 새로운 페르시아의 왕은 마케도니아군에게 아직 점령되지 않은 중앙아시아의 몇 안 되는 지방으로 도망쳤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가 퇴각을 계속하자, 그는 그의 군대에게 버림받았다. 결국, 한 무리의 지역 족장들이 그를 붙잡았다. 알렉산드로스 앞에 끌려온 그는 다리우스 3세를 배신한 것에 대한 심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의 마지막 아케메네스 왕은 불명예스럽고 천박한 최후를 맞이했다.
출처 : The Col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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