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도시로마

포로 로마노

by 금곡동로사 2021. 5. 14.
728x90

포룸 로마눔의 재건 이미지
로마 중심지 카피톨리노, 포룸 로마눔, 황제 포룸을 재현한 이미지
포룸 로마눔을 나타낸 지도

 

 

 

로마의 심장부인 로마 포룸. 로마 시민들은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원이나 사법 건물로 둘러싸인 거대한 광장이 보인다. 이곳은 조각상, 제단, 아치, 기둥으로 가득했다. 배경의 팔라티노와 전경의 황제 포룸 사이에 있는 포룸 로마눔의 전경.

 

 

 

 

더 가까이에서 본 로마 포룸. 위대한 영예의 기둥 뒤에는 왼쪽의 디오스쿠리 신전과 오른쪽의 사투르누스 신전 사이에 세워진 연단의 계단이 특히 높은 바실리카 율리아가 있었다. 카피톨리노를 등지고 있고 사진 오른쪽 끝에서 포룸을 닫는 듯한 거대한 건물은 타불라리움이다. 타불라리움의 아래쪽에는 오른쪽의 콩코르디아 신전과 왼쪽의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이 있었다. 사진 중앙의 오른쪽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치와 게모니아이 계단이 보인다. 이 매우 가파른 계단은 포룸과 Arx를 연결했다. 첫 번째 계단과 아주 가까운 곳에 끔찍한 마메르티눔 감옥이 있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시체는 사형이 끝난 후 그곳에 매달아두었다.

 

 

 

영예의 기둥 또는 헌정된 기둥은 7개였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 시대에 로마군 장군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을지도 모른다. 헌정된 기둥은 건축적인 기능이 없고, 단지 맹세나 가끔 제물을 바치게끔 만들었다.

 

 

 

바실리카 율리아를 가리키는 사진

로마의 공공 바실리카는 법정, 물품 거래, 산책 장소로 함께 사용되었다. 그곳은 주로 사법 장소였다. 첫 번째 바실리카는 포룸을 복잡하게 만든 모든 법정들을 해소하기 위해 지어졌다. 사진 중앙에 있는 바실리카 율리아에는 켄툼비리(105명으로 구성된 오래된 로마의 법정)가 앉곤 했다. 하지만 사업상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외부 주랑 현관 아래에는 상점들이 세워졌다. 내부에는 환전상들과 은행가들이 통로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위쪽의 화랑은 한가로운 사람들을 위한 산책 장소였다. 건물은 길이 109 미터, 폭 40 미터의 광대한 직사각형이었다. 내부에는 네 변에 세 줄 기둥이 길이 82 미터, 폭 8 미터의 본당을 둘러쌌다.

 

바실리카 율리아 내부를 재현한 3D 이미지

 

 

사투르누스 신전을 가리키는 사진

사투르누스 신전은 아마도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 의해 시작되어 BC 497년에 개관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재건되었고, 그 후 다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5 미터의 높은 부벽 위에 지어졌다. 그것은 공공 보물(아이라리움)을 보관했다. 또한 법의 공식적인 본보기뿐만 아니라 캠페인이 없는 기간에는 군단기들을 보관했다. 제국 시대 동안, 신전의 오래된 보물은 단순히 로마의 도시 자금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프로나오스의 훌륭한 기둥이 8개 서 있다.

 

 

타불라리움을 가리키는 사진

BC 78년에 지어진 타불라리움은 카피톨리움 봉우리와 Arx 사이의 함몰된 곳을 메웠다. 국가 기록보관소의 일부는 타불라리움에 보관되었으며, 건물의 파사드는 포룸의 서쪽을 닫았다. 공화국의 건축물은 엄숙했다.

 

 

 

콩코르디아 신전을 가리키는 사진

로마 역사가 시작될 때, 이 여신은 사비니인과 로마인 사이에 화해를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원로원은 그곳에서 자주 모임을 했다. 계획은 위치상 특이성을 보였다. 사실, 그것은 지상 구성으로 인해 훨씬 더 넓었다. 신전은 타불라리움의 벽에 바로 맞닿아 세워졌고 포룸의 돌출된 높은 기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을 가리키는 사진

티투스는 죽은 후 신격화된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이 신전을 세웠다.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신전을 완성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두 황제 모두 봉헌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치를 가리키는 사진

아치는 파르티아에 대한 황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203년에 세워졌다. 아치는 각각의 기둥이 있는 3개의 문으로 지어졌다. 지나치게 많은 조각 장식이 아치의 건축적인 균형을 해친 것처럼 보인다.

 

 

 

게모니아이 계단을 가리키는 사진

이 기념비적인 높은 계단은 카피톨리움과 포룸을 연결했다. 게모니아이 계단(스칼라이 게모니아이)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시신이 처형된 후 매달렸던 곳이다.

 

 

 

쿠리아 호스틸리아/율리아를 가리키는 사진

사진 중앙의 쿠리아 호스틸리아는 코미티움의 북쪽 끝에 있는 포룸에 위치해 있었다. 화재로 여러 번 파괴되어 마지막 건축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은 카이사르에 의해 약간 이동되어 쿠리아 율리아가 되었다. 건물은 단 하나의 회의실과 현관으로 구성된 꽤 단순한 건물이었다. 난방이 설치되지 않았고 온도가 너무 낮아지면 의장은 회의를 중단하곤 했다. 쿠리아 율리아는 제국 시대에 원로원의 회의실이었다.

 

토가를 입은 원로원 이미지 / 원로원 회의장 내부의 모습을 묘사한 이미지

 

 

포룸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사크라 가도를 따라 세워진 행정 또는 종교 건물들이 많은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왼쪽에는 BC 179년에 세워진 바실리카 아이밀리아가 다시 보인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건물이었다. 바실리카 아이밀리아의 오른쪽, 안토니누스와 그의 아내 파우스티나의 신전이 있다. 안토니누스는 138년에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었다. 안토니누스 신전을 지나면 307년에 사망한 막센티우스 황제의 아들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로물루스 신전이 있다. 모형에서 볼 수 있듯이, 둥근 홀과 함께 두 개의 신전이 나란히 있는 원형 사원이다. 마지막으로 포룸의 거의 꼭대기에 세워진 막센티우스의 거대한 바실리카가 있다.

 

안토니누스 신전을 가리키는 사진
바실리카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아이밀리아를 가리키는 사진

바실리카의 기능은 오로지 사업과 재판을 위해 바쳐졌다. 화려하게 장식된 이 건물은 BC 179년에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지었으며 이 가문에 의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남동쪽 모퉁이에서 포룸을 향한 부가 구조는 "루키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기념비"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그들을 입양한 아우구스투스가 손자 루키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기리는 비문을 볼 수 있으며 '청춘의 왕자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들은 요절했다.

 

가로 94 미터, 세로 24 미터였던 건물을 재현한 3D 이미지.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의 돌출부가 루키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기념비로 불렸다

 

 

로물루스 신전을 가리키는 사진

신성한 길에 지어진 로물루스 신전은 매우 특이한 외관을 보여주었다. 원형 홀과 측면에 두 개의 사원이 나란히 있는 둥근 사원이었다.

 

로물루스 신전을 재현한 3D 이미지

 

 

벨리아의 비탈. 벨리아는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팔라티노 언덕과 연결된 짧은 비탈이었다. 사크라 가도를 올라가 베누스와 로마의 신전을 향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로마인들은 티투스 아치를 지나야 했다. 벨리아의 정상에는 베누스와 로마의 웅장한 신전이 있었다.

 

포룸 복합 단지와 콜로세움의 전경

 

 

사진 중앙에 둥근 사원이라고 불리는 베스타 신전이 있으며 여기에 성스러운 불이 켜져 있었다. 이 기능은 왼쪽에 저택이 보이는 베스타 여사제(베스탈)들의 책임하에 있었다. 이 광대한 저택은 두 층으로 지어졌다. 아트리움의 중앙에는 인공 연못과 정원이 있었다. 약간 오른쪽에, 지붕이 오렌지색으로 된 카이사르의 신전을 볼 수 있다. 이 사원 근처에서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시신을 화장했다. 카이사르 신전과 베스타 신전 사이에서 동시대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아치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카이사르 신전 바로 뒤에 레기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진의 중앙에 카스토르와 폴룩스(디오스쿠리)의 신전이 있다.

 

 

 

베스타 신전을 가리키는 사진

베스타 신전은 저택이 인접해 있는 베스타 여사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신성한 불 외에도, 신전에는 고대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중 미네르바의 조각상인 팔라디움은 전설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가 로마로 가져왔을 것이다.

 

 

 

베스타 여사제들의 저택을 가리키는 사진

베스타 여사제들의 저택은 오른쪽 전경에 있는 팔라티노의 부벽을 따라 서있었다. 사진의 중앙 부분에 있다.

 

 

 

이 각도에서 사진 중앙에 베스타 여사제들의 저택과 신격화된 율리우스 신전 사이에 있는 베스타의 작은 둥근 신전을 볼 수 있다. 이 작은 신전에서 베스타 여사제들이 신성한 불을 지켰다.

 

 

 

위에서 보면, 베스타 여사제들의 저택 정원을 볼 수 있다.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 맞은편에 있는 베스타 여사제들의 저택을 확장한 거대한 건물은 마르가리타리아 포르티코라고 불린다. 로마 포룸의 남쪽에 위치한 이 주랑 현관은 베스타 여사제들의 저택과 티투스 아치 사이에 있는 것으로, 네로에 의해 지어졌고 2세기의 2/4분기(126-150)에 고급 상점, 진주 상점, 보석점을 수용하기 위해 개조되었다. 따라서 이 거대한 주랑 현관은 네로의 황금 저택의 오래된 현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베스타 여사제들의 저택 유적과 정원의 모습
마르가리타리아 포르티코를 가리키는 사진

 

 

로마 포룸의 중심에서와 같이 사진 바로 중앙에 있는 카이사르 신전은 주로 로마가 제국에 들어선 것을 상징한다. 꽤 높은 테라스와 작은 둥근 제단을 반원형으로 수용하는 연단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건축물은 남서쪽에서 포룸을 닫아, 전체 단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카이사르 신전을 재현한 3D 이미지

 

 

아우구스투스의 아치를 가리키는 사진

첫 번째 아우구스투스의 아치는 안티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BC 29년에 세워졌다. 10년 후, 아치는 너무 손상되어 새로운 건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아치는 카레 전투에서 잃어버린 로마 군단기들을 파르티아로부터 되찾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다시 헌정되었다.

 

 

 

레기아를 가리키는 사진

공화국 시대에 레기아는 종교의 중심지였다. 이 건물에는 폰티펙스 사제단의 행정부와 폰티펙스 막시무스(가장 유명한 사람은 암살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워졌다. 레기아는 포룸에 세워진 광대한 건물로, 여러 번 불에 타서, 매번 같은 장소에 재건되었다. 마지막 건물은 BC 36년에 지어진 아마도 오각형의 대리석 저택이었다. 벽에는 로마의 역사에 필수적인 두 가지 문서인 집정관 의식과 개선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안에는, 레기아는 또한 마르스와 옵스 콘시바의 아주 오래된 두 개의 작은 성역을 수용했다. 레기아는 제국 기간 동안 그 중요성의 대부분을 잃었다.

 

왼쪽의 레기아와 오른쪽의 베스타 신전을 재현한 이미지

 

 

디오스쿠리 신전을 가리키는 사진

레길루스 호수 전투(BC 496)로 인해 독재관 포스투미우스는 자신이 승리자가 된다면 전쟁의 신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위한 신전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그는 그들이 로마 기병대의 선두에서 싸우는 것을 봤다고 믿었고, 승리 후 한 신은 포룸 한가운데서 로마에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직접 왔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아주 하얀 대리석으로 된 화려한 신전을 짓도록 하라. 매우 높은 단의 코린트식 신전은 수도에 큰 위엄을 주었다.

 

 

 

포룸의 비탈에 있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거대한 조각상들이 있는 위엄 있는 기념물이었다. 내부는 기둥과 거대한 기둥이 지탱하는 세 개의 통로로 나뉘었다. 사진 중앙에 있는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바실리카는 포룸의 비탈에 세워졌는데, 지면의 높낮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의 내부는 웅장했다. 내부 장식은 벽과 바닥에 다채색 대리석을 박아 넣었다. 반암과 대리석 기둥뿐만 아니라 아치 천장은 금박을 입힌 치장 벽토로 되어 있었다. 건물 전체에 많은 조각상이 추가되었다. 바실리카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들에게 완벽한 예가 되었다.

 

 

 

콜로세움 맞은편의 로마 포룸 입구. 전경에는 로마 세계에서 가장 큰 성역인 베누스와 로마의 신전이 있다. 신전의 왼쪽은 포룸의 중심부로 통하는 사크라 가도 상부의 시작점이다. 베누스와 로마 신전의 왼쪽에 있는 팔라티노 쪽에 위치한 신전은 주랑 현관으로 둘러싸인 엘레가발루스의 신전이다.

 

반대편에서 본 베누스와 로마 신전의 모습

 

 

베누스와 로마 신전은 이중 성역 기념물이다. 두 개의 신상 안치소는 등을 맞대어 지어졌고, 하나는 베누스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를 위한 것이다. 건물은 열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양쪽의 파사드에 각 10개의 기둥, 양옆에 각 20개 기둥이 있었다. 둘레에 56개의 기둥이, 남북의 현관에 4개의 기둥이 추가되었다. 거대한 비율로 만들어진 베누스와 로마 신전은 포룸의 꼭대기와 콜로세움 하층부의 차이를 보완하기 위해 9 미터의 인공 둔치에 세워졌다. 이 신전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작품으로 AD 121년에서 137년 사이에 지어졌다. 전경에서 네로를 헬리오스 신으로 상징하는 36 미터 높이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의 뒷면을 볼 수 있다. 베누스와 로마 신전을 짓기 위해서, 하드리아누스는 이 기념비적인 조각상을 콜로세움 쪽으로 더 가까이 옮겨야 했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24마리의 코끼리가 필요했다.

 

베누스와 로마 신전의 옆모습
012345
베누스 신전의 유적과 재건 및 외관과 내부

 

 

에메사 출신의 대사제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는 219년에 엘라가발루스라는 이름의 로마 황제로 선포되었다. 원뿔 모양의 검은 돌인 바이틸루스의 숙련자 엘라가발루스는 그의 신성한 돌을 팔라티노 동쪽 부분에 세워진 신전에 설치하도록 했다. 이 사원은 시리아 신 아도니스에게 바치는 정원이 있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황제는 이전에 포룸에 보관되었던 레기아의 방패와 같은 다른 로마 신들과 신성한 유물을 그곳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의 후계자이자 엘라가발루스의 사촌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이 신전을 복수의 유피테르에게 다시 봉헌했다.

 

 

 

엘라가발루스(복수의 유피테르) 신전은 팔라티노의 비탈에 세워졌고 신성한 길과 베누스와 로마 신전을 압도했다. 신전의 정원은 클리부스 팔라티누스로 향하는 입구가 있는 인상적인 주랑 현관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0123456789
포룸 로마눔의 재건 이미지
베스타 여사제들의 저택 구조와 베스타 신전 / 유적을 토대로 포룸을 재건한 이미지
사투르누스 신전(왼쪽)과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오른쪽) / 디오스쿠리 신전
포룸에서 카이사르를 화장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미지 / 카이사르 신전
012
아우구스투스의 아치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치
사투르누스 신전 / 베스타 신전 /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치 / 티투스 아치 / 바실리카 막센티우스 유적

 

 

출처 : maquettes-historiques

728x90

'로마 이야기 > 도시로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피아, 노바, 라티나, 셉티미아나 가도 주변  (0) 2021.05.15
엠포리움  (0) 2021.05.15
황제 포룸  (0) 2021.05.13
세소리움/세소리아노 지역  (0) 2021.05.13
트라스테베레  (0) 2021.05.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