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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오리엔트

미탄니 왕국

by 금곡동로사 2020.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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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400년경 미탄니 왕국의 최대 영역

 

미탄니는 아시리아 어로 하니갈바트 또는 하니-라바트, 이집트 텍스트에서 나하린이라고 불렀는데, 시리아 북부와 아나톨리아 남동부에서 후르리어을 사용하는 국가였다.

 

현재 미탄니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 가설 : 미탄니는 이미 B.C.17세기 말이나 16세기 전반기에 강력한 왕국이었으며 그 시작은 투트모세 1세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히타이트왕 하투실리 1세와 무르실리 1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번째 가설 : 미탄니는 히타이트에 의한 얌카드 왕국의 파괴와 무르실리 1세의 죽음 이후 히타이트가 시리아 지역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공백으로 생성되었다.

 

두 번째 가설을 고려한다면, 미탄니(B.C.1500년-1300년경)는 히타이트에 의해 아모리인과 바빌론이 B.C.1531년에 멸망된 후 짧은 기간 동안 생성된 지역 세력이었을 수 있다.

 

미탄니왕들과 다른 왕족들은 인도-아리안의 음운 체계와 비슷한 이름을 지녔지만 그들은 그 당시에는 인도-유럽이 아닌 언어인 후르리인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의 영향력 범위는 후르리어 지명, 개인 이름 및 시리아와 레반트를 통한 독특한 도자기 유형의 확산으로 표시된다.

 

 

시작

 

미탄니 왕국은 B.C.1600년이 약간 지난 구 바빌로니아 시대에 시작되었다. 히타이트가 바빌론을 약탈하기 전 적어도 2세대 전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미탄니 통치자 중 하나가 하투실리 1세의 적수로 나타났다.

 

 

고고학적으로, 자지라 지역에서 발견된 미탄니의 초기 유물들은 B.C.1600-1550년까지의 후기 카부르 도자기를 특징으로 한다. 이 도자기는 이전의 구 바빌로니아 시대 유물과 연속성을 지녔다. B.C.1550-1270까지 채색된 누지 도자기(미탄니 시대에 가장 특징적인 도자기)는 신생 카부르 도자기와 함께 발전했다.

 

적어도 B.C.1550년경 후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될 때 채색된 누지 도자기는 미탄니 유적지에서 특징적인 도자기로 확인되었다. 이 장식된 도자기의 기원은 알수 없지만 고대 수메르의 도시 나가르가 채색된 누지 도자기를 생산한 최초의 지역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채색된 누지 도자기는 미탄니 왕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현지 생산되었으며 특히 자지라 지역에서 높이 평가되었지만 알라락 및 우가리트와 같은 시리아 서부 도시에서만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역사가 시작될 때 미탄니의 주요 라이벌은 제18왕조의 이집트였다. 그러나 히타이트 제국이 부상하면서 미탄니와 이집트는 히타이트 지배의 위협으로부터 상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권력이 절정에 이른 B.C.15세기와 14세기 전반에 시리아 북서부에서 동부 티그리스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미탄니의 지배를 받았다. 미탄니는 수도 와슈칸니를 중심으로 전초 기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해 위치가 카부르 강 상류에 있다고 밝혀냈다. 미탄니 왕조는 B.C.1600-1350년경 사이에 북부 유프라테스-티그리스 지역을 통치했다. 결국 미탄니는 B.C.1350년과 1260년경 사이에 히타이트와 나중에 아시리아인의 공격에 굴복했으며 중아시리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지리적 위치

 

미탄니는 카부르 강에서 마리까지 그리고 유프라테스 상류에서 카르케미시까지의 무역로를 장악했다. 한동안 그들은 티그리스 상류의 아시리아 영토와 니네베, 아르빌, 아수르, 누지를 지배했다. 그들의 동맹은 오론테스 서쪽의 우가리트와 콰트나 사이에서 바다까지 뻗어있는 무키시; 알라라에서 알레포, 에블라 및 하마를 거쳐 콰트나와 카데시에 이르는 오론테스의 동쪽 지역을 지배하는 니야;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있는 키즈와트나를 포함했다. 동쪽으로 그들은 카시트인들과 좋은 관계를 가졌다. 시리아 북부의 미탄니 땅은 타우르스 산맥에서 서쪽으로, 동쪽으로는 누지(현대의 키르쿠크)와 티그리스 강까지 이어졌다. 남쪽으로는 알레포에서 누하세를 가로질러 동쪽의 유프라테스 강에 있는 마리까지 이어졌다. 그 중심은 카부르 밸리에 있었는데, 두 개의 수도인 타이테와 와슈칸니는 아시리아인은 각각 타이두와 우슈카나라고 불렀다. 최근 독일 고고학 발굴에서 알 수 있듯이 와슈칸니의 위치는 Tell Fekheriye에 있다. 전체 지역은 인공 관개 없이 농사를 지었으며 소, 양, 염소를 키웠다. 기후는 아시리아와 매우 유사하며 토착 후르리인과 아모리족이 정착했다.

 

미탄니 왕국의 영역

 

명칭

 

 

미탄니 왕국은 이집트인에 의해 마랴누, 나흐린 또는 미탄니, 히타이트에 의해 후르리, 아시리아 인에 의해 하니갈바트 또는 하니-라바트로 불렸다. 히타이트 연대기에는 시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후르리(Ḫu-ur-ri)라는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다. 무르실리 1세 시대의 히타이트 조각은 "후르리의 왕"을 언급했다. 아시리아-아카드어 버전의 텍스트는 "후르리"를 하니갈바트로 표현한다. 투슈라타는 아마르나로 보낸 편지에서 아카드어로 자신을 "미탄니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자신의 왕국을 하니갈바트라고 불렀다.

 

이집트에서는 미탄니를 "nhrn"이라 불렀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강을 뜻하는 아시리아-아카드어 단어에서 나하린으로 발음된다. cf. 아람-나하라임. 미탄니라는 이름은 투트모세 1세 시대에 "메-타-니라고 불리는 외국"에서 돌아온 공식 천문학자이자 시계 제작자인 아메넴헤트의 시리아 전쟁(B.C.1480년경)의 "회고록"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투트모세 1세가 통치 초기에 발표한 나하리나 탐험은 오래전 아멘호텝 1세의 통치 시기에 실제로 일어났을 수 있다.

 

 

사람들

 

미탄니 사람들의 민족성은 확인하기 어렵다. 미탄니 귀족의 이름은 종종 인도-아리안 출신이며 그들의 신들 또한 인도-아리안의 뿌리를 보여준다(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 이 인도 아리안 신들은 보아즈칼레의 미탄니와 히타이트 사이의 두 조약에 나열되어 있다. 관련된 왕은 미탄니의 사티와자와 히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이다. 대영 박물관은 이 문서를 B.C.1350년경의 것으로 간주한다. 일반 사람들의 언어인 후르리어는 인도 유럽어도 셈어도 아니다. 후르리어는 후르리-우라르투 어족에 속하는 우라르투인의 언어인 우라르투어와 관련이 있다. 아마르나 편지의 후르리어 구절(일반적으로 당시의 국제어인 아카드어로 작성됨)은 당시 미탄니 왕실이 후르리어를 사용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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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금까지 미탄니의 역사에 대한 자체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기록은 주로 아시리아, 히타이트 및 이집트와 시리아 인근 지역의 비문을 기반으로 한다. 종종 다른 국가와 도시의 통치자들 사이에 동시성을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절대 날짜를 제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탄니의 정의와 역사는 언어적, 민족적, 정치적 집단 사이의 구별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개요

 

전쟁 중인 후르리인 부족과 도시 국가들은 히타이트 왕 무르실리 1세의 약탈과 카시트인의 침략으로 바빌론이 무너진 후 하나의 왕조로 통합되었다고 생각된다. 히타이트의 알레포(Yamhad) 정복, 푸주르-아슈르 3세를 계승한 약한 중아시리아왕, 히타이트의 내전은 메소포타미아 상류에 권력 공백을 만들었으며 미탄니 왕국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미탄니 통치자들에 대한 인도-아리안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그의 아버지 키르타의 왕좌를 계승한 슈타르나 1세이다. 미탄니의 바라타르나왕은 왕국을 서쪽 알레포로 확장하고 아모리족 알라락(Alalakh)의 이드리미왕을 그의 봉신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5대에 걸친 미탄니 왕국의 부상에서 이 왕(프라타르나라고 알려진)을 분리하는 것 같다. 서쪽의 키즈와트나 주도 그 충성을 미탄니로 옮기고 동쪽의 아시리아는 B.C.15세기 중반까지 미탄니의 가신 국가가 되었다. 국가는 사우슈타타르 통치기에 더 강해졌지만 후르리인들은 아나톨리아 고지 안에 히타이트를 묶어두기를 열망했다. 서쪽의 키즈와트나와 북쪽의 이슈와는 적대적인 히타이트에 대항하는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시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이집트인들과 몇 차례 성공적으로 충돌한 후 미탄니는 그들과 평화를 추구했고 동맹이 형성되었다. B.C.14 세기 초 슈타르나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그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고, 그는 파라오 아멘호텝 3세와의 결혼을 위해 그의 딸 길루헤파를 이집트로 보냈다. 미탄니는 이제 힘의 절정에 있었다.

 

파라오 투트모세 3세의 미탄니 침공

 

그러나 에리바아다드 1세(B.C.1390-1366)의 통치에 의해 아시리아에 대한 미탄니의 영향력은 약해졌다. 에리바아다드 1세는 투슈라타와 그의 형제 아르타마마 2세와 그의 아들 슈타르나 2세 사이의 왕조 전투에 연루되었다. 그는 자신을 후르리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아시리아인의 지원을 구했다. 친 아시리아 진영이 왕실 미탄니 궁정에 나타났다. 에리바-아다드 1세는 아시리아에 대한 미탄니의 영향력을 느슨하게 했고, 이제 아시리아가 미탄니 문제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아시리아의 아슈르우발리트 1세(B.C.1365-1330) 왕은 B.C14세기 중반 슈타르나를 공격하고 미탄니 영토를 합병하여 아시리아를 다시 한번 큰 강국으로 만들었다.

 

슈타르나가 사망하자 미탄니는 계승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결국 슈타르나의 아들 투슈라타가 왕위에 올랐지만 왕국은 상당히 약화되었고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의 위협이 증가했다. 동시에 이집트와의 외교 관계는 식어졌고 이집트인들은 히타이트인과 아시리아인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히타이트왕 수필룰리우마 1세는 시리아 북부의 미탄니의 봉신 국가를 침공하여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대체했다.

 

미탄니의 쇠퇴기

 

수도 와슈칸니에서 새로운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히타이트인과 아시리아인은 왕좌를 노리는 서로 다른 후계자를 지지했다. 마침내 히타이트 군대가 수도 와슈칸니를 정복하고 B.C.14세기 후반에 투슈라타의 아들 사티와자를 미탄니의 봉신 왕으로 임명했다. 왕국은 이제 카부르 유역으로 축소되었다. 아시리아인은 미탄니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B.C.13세기에 샬마네세르 1세가 왕국을 병합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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