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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아프리카

시리아와 이집트

by 금곡동로사 202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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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트모세 3세 치세에 이집트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BC 1450년경

 

대략 오늘날 시리아 공화국의 서부와 남부 국경에 해당하는 경계는 고대 시리아를 완만한 평야의 북쪽과 산지, 언덕과 사막으로 된 남쪽의 두 부분으로 나누며 선사시대에는 다른 발전을 따랐다. 이곳은 간략한 설명을 허락하지 않지만, 생각하기에 관심을 갖게 하는 대목은 북쪽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 지중해 그리고 어느 정도 아나톨리아 사이의 연결고리였기 때문에 아주 초기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폭넓게 받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수백 개의 유적 언덕이 있는 북쪽이 레바논이나 팔레스타인처럼 철저히 탐사되었다면 BC 3천 년 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수메르 아카드 문명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거대하고 강력한 왕국이 에블라에서 발견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에블라 사람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셈어 사투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카드어와 유사하지만 확실히 서쪽 셈어였다.

그 기간 동안, 확실히 다른 셈족이 살고 있는 남쪽은 이집트를 바라보았다. 그 나라와 레바논 또는 팔레스타인 사이의 관계는, 이미 선왕조(先王朝) 시대에 증명되었고 이집트 고왕국(BC 2800-2400년경) 아래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는 대피라미드 시대였고, 이집트는 그 기념물처럼 보였다. 높고, 거대하고, 누가 봐도 파괴할 수 없었다. 멤피스에 앉아 있는 화신 파라오와 그의 수많은 신하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근면한 백성과 외국인 노예 집단이 노역했다. 하지만 나일 강 유역은 풍요로웠지만 필수 재료인 목재가 부족했다. 쉽게 닿을 수 있는 레바논 산지에는 소나무, 사이프러스와 삼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리하여 양국 간에 상호 이익을 위해 매우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목재 상점인 비블로스(셈어 구블라, 이집트어 케펜)는 강하게 '이집트화'되었고, 비블로스에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은 해안을 따라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집트인과 팔레스타인 내륙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덜 우호적이었다. 특히, 네게브에 출몰하는 유목민은 시나이 반도에 있는 이집트 구리 광산을 반복적으로 공격했고, 때때로 나일 삼각주를 습격하여 파라오에게 보복을 강요했고, 심지어 동쪽 국경을 강화해야 했다. 고왕국의 몰락으로 이집트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300년 동안의 반무정부 상태에서 '사막 사람들'인 '아시아인'이 큰 역할을 했다.

BC 2천 년 기의 첫 세기는 초기 청동기 문화와 중기 청동기 문화 사이의 단절과 시리아 팔레스타인 인구 중 서쪽 셈어 이름의 우세로 증명된 바와 같이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시리아에서도 서부 셈족의 확장이 목격되었다. 아모리 왕조가 많은 메소포타미아 도시에서 권력을 잡은 동안, 북부 시리아는 여러 아모리 왕국으로 나뉘었는데, 가장 중요한 곳은 얌하드(알레포), 카르케미시 그리고 콰트나였다. 지역 통치자들의 궁전 주변에는 요새화 된 큰 도시가 세워졌고, 예를 들어 알라라의 왕 이아림림 궁전에서 발견된 물건과 조각품은 동시대의 마리 왕 지므리림의 궁전에서 발견된 것들과 품질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미 마리의 기록 보관소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사이의 친밀하고 때로는 우호적인 접촉의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실제로 지중해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뻗어 있는 아모리 국가들의 광대한 공동체가 주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동시에 시리아와 크레타 사이의 상업 관계가 강화되었다. 미노스 무역상들의 거주지가 우가리트(라스 샴라) 항구에 자리를 잡았고, 매우 아름다운 카마레스 그릇이 시리아 군주들의 식탁에 올랐다. 이집트는 당시 중왕국(BC 2160-1660년)이 완전히 부흥하면서 레바논 해안과 결부된 관계를 새롭게 하고 공고히 했으며, 아모리 궁정에 선물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시리아 북부에서 증가하고 있는 후르리인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다. 어쨌든, 이것은 제12왕조의 파라오가 비블로스, 베이루트, 우가리트, 콰트나, 네이라브(알레포 인근)로 보낸 화병, 보석, 왕실 조각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이다.

레바논 남쪽에 있는 지역은 매우 다른 그림을 보여주었다. 시리아 북부보다 훨씬 가난하고 외국의 영향에 덜 개방된 중세 청동기 시대(BC 2000-1600년)의 팔레스타인은 "부족 격변의 진통" 속에서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불안정한 지역으로 이집트의 권위가 없었고 명백히 정치적, 경제적 우위를 확장하려는 욕구가 거의 없었다. 근동에서 여파가 여전히 극심하게 느껴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불안정한 부족 사이에 도착한 일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갔을 것이다. 작은 씨족이나 큰 부족은 고대에  끊임없이 시리아 사막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했고, 창세기 11:31에 묘사된 것처럼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헤브론으로 이주한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성서 기록과 소장하고 있는 고고학 및 문헌 자료의 비교는 아마도 이신과 라르사 사이의 분열과 이라크 남부에서 만연했던 어려운 상황의 결과로 이 움직임이 'BC 1850년경 또는 조금 이후'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족장 시대의 역사적 특성은 대부분 BC 15세기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설형문자와 상형문자 문헌에 언급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고, 일반적으로 하비루(또는 이집트어로 '아피루')라고 불리는 호전적인 집단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범주로 이 이름은 성서의 '이브리', 히브리인과 매우 흡사하다.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브라함 혈통에 대한 비 히브리 출처가 나타났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자료들에 대한 최근 철저한 재평가는 하비루가 히브리인과 이름의 유사성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그들은 민족도 부족도 아닌 피난민으로 구성된 사회의 한 계급, 흔히 말하는 것처럼, 종종 무법자로 전락하는 '난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BC 1720년경, 격동과 적대적인 태도로 이미 제12왕조의 파라오들을 우려하게 만든 팔레스타인 족장들은 거의 150년 동안 통치하는 이집트를 침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이방 산간지방의 족장"을 뜻하는 이집트어 이름 헤카우카수트의 그리스어 형태인 힉소스로 알려져 있다. 비록 그들이 나일 삼각주 이상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전쟁, 예술, 그리고 심지어 그 나라의 언어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러나 결국 제18왕조의 왕들은 힉소스를 전복시켜 그들을 가자 관문까지 쫓아냈고, 이 공로로 신제국(BC 1580-1100년)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열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메소포타미아는 거의 같은 시기에 (BC 1595년) 다른 외국인인 카시테인의 손에 넘어갔고 장기간의 정치적 무기력 상태에 빠졌다.

 

 


이집트 대 미탄니


카시테 시대에 걸친 4세기 중 3세기는 근동의 강대국들 사이의 폭력적인 분쟁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러한 분쟁의 주된 이유는 이집트의 시리아 정복, 새로 등장한 히타이트의 그 지역에 대한 주장, 지중해에서 자그로스까지 확장하고 이집트, 히타이트 및 나중에 아시리아의 야망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거대한 후르리 미탄니 왕국의 형성이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자지라(메소포타미아 상부)의 분쟁 지역이 바빌론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안, 카시테 군주들은 너무 약하거나 지혜로워 맹화에 개입하지 않았고, 14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아시리아의 압박이 그들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BC 1600년부터 1350년까지 바빌로니아인은 씨랜드(바다-땅)에 맞서 승리한 전쟁과 북쪽 국경을 따라 일어난 작은 충돌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한 평화를 누렸다. BC 1480년 이후 오리엔트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그들은 홀로 앉아서 '제국의 스크럼'(엎치락뒤치락하며 접전을 벌이는)이라고 적절하게 묘사된 것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아시리아가 2천 년 기의 큰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바빌로니아가 수행한 비교적 미미한 역할 때문에 여기에서 이러한 복잡한 사건에 대한 요약 이상은 언급하지 않으며 그 세부 사항은 고대 근동의 더 넓은 측면을 다루는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일부는 메소포타미아의 고유한 지역에서 일어났거나 그 나라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강조될 것이다.

BC 1700년경 힉소스의 이집트 침공과 바빌론 제1왕조의 몰락(BC 1595년)으로 인한 새로운 정치적 상황의 영향은 즉시 체감되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에 비추어 볼 때, 16세기는 나중에 시리아의 전장에서 군대가 마주하게 될 국가들이 상처를 휘감거나 무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비교적 안정된 시기로 보인다. 아모시스 1세(BC 1576-1546년) 치세 동안, 힉소스인은 나일 삼각주에서 쫓겨났지만, 제18왕조 초기의 파라오들은 외국 원정을 위해 자국에서 권한을 행사하기에 너무 바빴고, 심지어 투트모세 1세의 시리아를 가로질러 유프라테스까지 벌인 유명한 캠페인(BC 1520년경)도 지속적인 결과가 없는 습격이었다.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 고왕국은 외세의 공격 못지않게 궁정 혁명으로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알레포와 바빌론을 점령한 왕 무르실리 1세는 BC 1590년에 암살당했고, 그의 후계자들은 타우루스 산맥의 남쪽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아수르에서는 바빌로니아의 멍에를 떨쳐버린 군주 아다시의 후손들이 다스렸다. 그러나 몇몇 세워진 비문과 동시사적 역사에서 푸주르아슈르 3세에 대한 언급을 위해 이 군주들은 단지 목록에 이름만을 남겼다. 바빌로니아는 카시테인에 의해 재결합되고 재편성되었는데, 분명 확장의 꿈에 탐닉할 마음이 없거나 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 기간 동안 모든 오리엔트 민족 중 가장 활동적인 것은 후르리인과 그들의 미탄니 전쟁 군주들이었을 것이다. 문헌 증거가 완전히 없기 때문에 어떤 긍정적인 진술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후속 사건에 기초하여 후르리 미탄니인이 함무라비 제국의 붕괴와 히타이트인의 철수로 인해 시리아 북부와 이라크 북부에 생긴 공백을 이용하여 그들이 거대한 왕국을 건설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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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5세기 초 갑자기 근동에서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나일 강 유역과 접한 사막으로 보호를 받던 이집트는 상업적으로는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오리엔트의 나머지 지역에서 격리된 채 2천 년을 지내왔다. 북동쪽 국경은 사실 취약했고, 몇몇 경우, "비열한 아무", "모래 떠돌이"인, 미움받는 아시아인이 수에즈 지협을 건너 삼각주에 무장 기습을 가해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들은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길고 굴욕적인 힉소스 사건은 이집트인에게 교훈을 주었다. 유사한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출신 지역에서 아시아인과 싸워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야 했다. BC 1480년 투트모세 3세가 시리아 정복에 착수하여 이집트의 야망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오늘날까지 역사를 통해 따라갈 수 있는 이집트 정치의 패턴을 설정한 것은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 지역의 주인이 되는데 17년이 걸렸다는 사실은 그가 시리아 팔레스타인 군주들의 보다 훨씬 더 우세한 군대에 맞섰거나 그의 적수들이 강력한 국가만이 감당할 수 있는 병사, 말, 무기의 모든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리아에서 이집트의 진정한 적은 가나안인도 아모리인도 아닌, 오랫동안 그 지역에 정착하여 지금은 강력하게 조직된 후르리 미탄니인이었다. 미탄니 왕국은 아시리아인이 하니갈바트라고 부르는 지역, 즉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사이의 초원지대에서 타우루스 산맥 남쪽을 점령했으며 아마도 카부르(하부르) 강의 발원지 근처의 어딘가에 아직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수도 와슈칸니가 있었다. 히타이트 기록을 통해 후르리인이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나 히타이트 왕국을 위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북쪽과 남쪽 국경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후르리 미탄니인에게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을 것이다. 15세기 동안 서쪽의 시리아 북부와 동쪽의 아시리아는 미탄니의 지배를 받았다. 이름이 남아있는 미탄니의 첫 번째 왕 파라타르나(BC 1480년경)는 그를 자신의 군주로 지칭하는 알라라 왕 이드리미의 조각상 비문과 키르쿠크 근처의 누지에서 발견된 서판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이 도시에서는 파라타르나의 후계자 샤우샤타르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우가리트, 카트나, 그리고 간접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후르리 미탄니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 이라크 북부에서는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고, BC 1500년에서 1360년 사이에 통치한 모든 아수르 왕이 미탄니 왕의 종속 관계였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들 중 하나가 감히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샤우샤타르는 아수르를 약탈하고 '은과 금으로 된 문'을 와슈칸니로 가져갔다고 한다.

투트모세 3세의 승리로 이 광대한 왕국의 일부가 이집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시리아에서 미탄니인은 알라라와 카르케미시를 유지했고, 그곳을 그들은 아메노피스 2세 하에서 이집트의 세 차례 캠페인을 정당화할 만큼 심각한 반란으로 상실했다. 투트모세 4세(BC 1425-1417년) 하에서는, 이러한 영구적이지만 간접적인 적대 관계가 종식되었고, 가장 우호적인 관계가 테베와 와슈칸니 궁정 사이에 수립되었다. 파라오는 미탄니의 아르타타마 1세에게 그의 딸을 달라고 '7번' 요청했고 아메노피스 3세(BC 1417-1379)는 슈타르나의 딸 킬루헤파와 결혼했다. 이러한 갑작스럽고 완전한 정치 변화의 원인으로 히타이트인에 대한 두려움이 자주 언급되지만 이것은 절대 확실하지 않다. BC 1450년경 아나톨리아의 투드칼리야스 2세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즉시 투트모세 3세와 결탁하여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는 알레포를 점령하면서 타우루스 남쪽 지역에 대한 히타이트의 권리를 다시 주장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전쟁에 휘말린 그의 직계 후계자들은 이집트와 미탄니 두 나라 사이에 화해를 하도록 할 만큼 위험하다고 보기 어렵다. 진실은, 십중팔구 이집트가 시리아 전체를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미탄니인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해안에서 그들의 기반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둘 다 현상 유지를 받아들이고 오랜 적대감을 우호적인 동맹으로 바꾸었다.

 

 

 

출처 : Weapons and Warfa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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