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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이슬람제국

이슬람 제국 역사 지도 - 1편 이슬람의 발흥

by 금곡동로사 2021.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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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경 아라비아 반도와 두 강대국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610-632년 무함마드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는 아랍의 종교, 사회, 정치 지도자이자 이슬람교의 창시자이다.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그는 아담,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의 유일신론적 가르침을 전파하고 확인하는 신의 영감을 받은 예언자였다. 그는 이슬람교의 모든 주요 분파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여겨지지만, 일부 현대 교파들은 이 믿음에서 벗어나 있다. 무함마드는 아랍을 하나의 이슬람 정치로 통합하고, 코란과 그의 가르침과 실천은 이슬람 종교 신앙의 기초를 형성했다. 무함마드는 서기 570년경(코끼리의 해) 메카에서 압둘라 이븐 압드 알 무탈리브와 아미나 빈트 와브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압둘라는 쿠라이시 부족 지도자 압드 알 무탈리브 이븐 하심의 아들이며,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사망했다. 모친 아미나는 그가 6세 때 죽었다. 그는 조부 압드 알 무탈리브와 외숙부 아부 탈리브 밑에서 자랐다. 세월이 흘러, 그는 주기적으로 히라라는 이름의 산 동굴에서 며칠 밤을 기도했다. 40세 때, 무함마드는 동굴에서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신으로부터 첫 번째 계시를 받았다고 전한다. 613년 무함마드는 이 계시를 공개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께 완전한 "복종"(이슬람)을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식(딘)이며, 이슬람의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자라고 선언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처음에는 수가 적었고, 13년 동안 메카의 다신교도들로부터 적대감을 경험했다. 계속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그는 615년에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를 아비시니아(악숨 왕국)로 보냈고, 이후 622년에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당시 야스립으로 알려짐)로 이주했다. 이 히즈라 사건은 히즈리 달력으로도 알려진 이슬람 달력의 시작을 나타낸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메디나 헌장에 따라 부족을 통합했다. 629년 12월, 메카 부족과의 8년간의 간헐적인 전투 끝에 무함마드는 10,000명의 무슬림 개종자 군대를 모아 메카로 진군했다. 정복은 대체로 저항이 없었고 무함마드는 유혈사태가 거의 없이 도시를 점령했다. 632년, 고별 순례에서 돌아온 지 몇 달 후, 그는 병에 걸려 타계했다. 그가 죽기 전,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아라비아 반도는 대부분 건조하며 오아시스 또는 샘 부근을 제외하고는 농사를 짓기 어렵다. 도시가 곳곳에 산재해 있었고 메카와 메디나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메디나(야스립)는 농업이 번창했고 메카는 주변 부족의 중요한 금융 중심지였다. 가혹한 환경으로 혈연이든 동맹이든 공동체가 중요했다. 6세기 후반, 아라비아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예멘 지역에 유대교가, 페르시아만 지역은 기독교가 퍼지면서 다신교 풍습이 줄어들고 더 영적인 종교의 관심이 증가했다.

 

메카 근처의 자발 알 누르 산의 히라 동굴. 610년 무함마드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계시를 받았다. 무함마드의 부인 카디자는 그가 예언자임을 믿은 첫 번째였으며 무함마드의 10세 된 사촌 알리 이븐 탈리브, 친한 친구 아부 바크르, 양아들 자이드가 뒤를 이었다. 

 

613년 무함마드는 민중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그가 우상숭배와 메카 선조들의 다신교를 비난하는 구절을 전하자 반대가 일어났다. 특히 메카 신앙의 중심지 카바의 수호자인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 쿠라이시에게는 모욕적이었다. 615년 박해가 일어나 많은 추종자가 피난처를 찾아 에티오피아로 이주했다. 616년 또는 617년 쿠라이시족의 주요 세력이 무함마드의 보호를 철회하려고 하면서 그는 모든 적대 행위가 중지되는 성지 순례 기간에만 설교를 할 수 있었다. 619년 아내 카디자와 숙부 아부 탈리브가 세상을 떠났다. 아부 탈리브의 죽음으로 일족의 통솔권이 적대 세력에 넘어가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의 보호를 철회했다. 암살 위협을 받은 그는 622년 6월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했다.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는 100년간 이어져 온 분쟁을 조정하고 그들의 공동 지도자가 되었다. 무함마드가 메카의 캐러밴을 포획하려고 관심을 가졌다. 아부 수피안 이븐 하브가 이끄는 메카 캐러밴이 레반트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무함마드는 300여 명의 소규모 원정군을 꾸렸다. 무슬림의 계획을 알게 된 아부 수피안은 진로를 바꿔 돌아가는 길을 택해 메카로 향했다. 수피안의 요청으로 메카의 아부 자힐은 약 1천 명을 이끌고 바드르에서 무함마드와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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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커다란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인 바드르 계곡은 메카로 가는 주요 경로였다. 624년 3월 11일 밤, 이 지역에 비가 내려 진창이 되어 있었다. 무슬림군은 전장에 있던 우물을 파괴하거나 차지했다. 전장 상황으로 의욕이 떨어진 메카군은 지휘관의 강압에 못 이겨 전투에 돌입했다. 메카군이 돌격하자 무함마드는 그들을 급습했고 의욕이 사라진 메카군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포로가 된 메카군은 무함마드의 선처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게 되었다.

 

바드르 전투에서 여러 중요한 지도자가 전사한 후, 쿠라이시의 지도부는 아부 수피안에게 넘어갔다. 아부 수피안은 무슬림에게 복수하기 위해 3천 명이 넘는 병력을 모았다. 메카군이 메디나로 진격하자 624년 12월 21일 무슬림군 1천 명이 우후드 산을 향해 출발했다. 전투 직전, 카즈라즈의 족장 압달라 이븐 우바이가 이끄는 300명이 지지를 철회하고 메디나로 회군했다. 무슬림군은 산을 등지고 진을 쳤으며 무함마드는 궁수 50명을 진영 서쪽의 바위 언덕에 배치했다. 메카군이 공격했지만 무슬림군에게 밀렸으며 메카 기병이 무슬림의 좌익을 공략하려 했으나 무슬림 궁병의 공격으로 좌절되었다. 무슬림군이 메카 대열을 뚫었지만 메카 기병이 무슬림 궁수를 공략하여 무슬림군의 측면과 후방이 노출되었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무슬림군은 퇴각하여 우후드 언덕 더 높은 지대에서 재집결했다. 전황이 유리해진 메카군 보병과 기병은 언덕 위를 올라가 무슬림을 공격할 수 없었다. 결국, 아부 수피안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메카로 돌아갔다. 무슬림군은 패배했지만 패인을 불순종에서 찾은 그들은 오히려 결속력이 더 단단해졌다.

 

메디나에서 추방된 나디르족은 보복을 위해 627년 쿠라이시족과 연합하여 메디나를 침공했다. 연합군은 대략 1만 명의 병사와 600의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방어군은 주민을 포함하여 3천 명으로 이루어졌다. 무슬림군은 페르시아인의 참호 전술을 채택하여 6일간 참호를 구축하고 수비에 나섰다. 메디나 공방전은 627년 1월에 시작되어 20일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포위전은 아라비아에서 드물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참호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동원한 기병대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일부 연합군이 참호를 뚫고 진입했지만 대응한 무슬림군에 패배하여 도주했다. 밤이 되어 참호를 건너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무슬림의 백병전 실력을 두려워한 연합군은 근접 교전을 꺼렸다. 남쪽에 있던 쿠라이자족은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 했지만 연합군의 병력을 보고 결국 그들에게 합류했다. 쿠라이자족이 메디나를 공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시의 사기가 심각하게 떨어지고 식량난과 수면 부족으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무함마드가 가타판족과 협상을 하여 결렬되었지만 이로 인해 연합군의 내부 불화는 커지게 되었다. 그 무렵, 비밀리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랍 지도자 누암 이븐 마수드가 무함마드를 방문했고 무함마드는 연합군에 불화를 일으켜 포위를 풀도록 부탁했다. 누암은 연합군 진영으로 가서 분열이 일어나도록 했다. 계략이 먹혀 연합군은 서로의 입장을 고수하고 여러 부족을 대상으로 한 무함마드의 협상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들은 식량이 바닥나고 있었고 말과 낙타가 굶주림과 상처로 죽어가고 있었다. 며칠간 날씨가 추워져 강풍으로 천막이 찢어지고 불이 꺼지면서 그들은 이 같은 징조에 겁을 먹었다. 이미 사이가 틀어질 정도였던 연합군은 밤사이 철수했다.

 

연합군의 철군 이후, 쿠라이자족은 무슬림군에게 포위되었다. 25일이 지나 항복하자 무슬림군은 그들의 요새와 소유물을 차지했다. 쿠라이자족과 동맹을 맺은 아우스족의 요청에 따라 그들 중에서 사드 이븐 무아드를 중재자로 선택했다. 사드는 남자 전사는 죽이고 여자와 자식은 노예로 삼으라는 판결을 내려 무함마드는 이 결정을 승인하고 선고했다.

 

카이바르의 유적. 628년 무슬림은 쿠라이시족과 후다이비야 조약을 맺어 적대행위를 중단했다. 메디나에서 150 km(93 마일) 떨어진 오아시스 카이바르에 거주하는 유대 부족을 상대로 무함마드는 원정을 떠났다. 그들은 유대-로마 전쟁 이후 헤자즈 지역에 정착한 부족이다. 무슬림은 그들이 다른 유대 부족과 아랍 부족과 연합하여 공격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전투는 무슬림의 승리로 끝났고 생산물의 절반을 바치는 조건으로 계속 거주할 수 있었다. 나중에 2대 칼리파 우마르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몇 년 더 오아시스에 거주하게 된다.

 

메카 공략을 나타낸 지도 이미지. 조약을 맺었지만 메카의 부족이 지속적으로 무슬림 세력을 공격하자 무함마드는 메카에 최후통첩을 했다. 조건 중 조약의 무효를 택한 메카 부족은 실수를 깨닫고 아부 수피안을 보내 협상을 하려 했지만 무함마드는 이를 거부했다. 630년 1만 명의 무슬림 군대를 이끌고 메카를 침공한 무함마드는 도시를 장악한 후 분쟁의 원인이 된 10명의 남녀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에게 사면을 선언했다. 대부분의 메카 부족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카바 주변의 아라비아 신상이 모두 파괴되었다.

 

무함마드가 정복한 지역(갈색). 630년 메카를 정복한 후 무함마드는 메카 부족의 경쟁자인 타키프족을 상대로 후나인 전투에서 승리했다. 같은 해, 무슬림에 적대감을 가진 아라비아 북부에 대한 공격을 하여 타부크에서 그 지역 족장들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무슬림에 저항한 마지막 서부 도시 타이프를 공격하여 이슬람 개종을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아라비아 동부의 이교도 우상도 모두 파괴하도록 명하고 많은 베두인족을 조건부로 받아들였다.

 

632년 이슬람의 세력권. 메디나로 이주한 지 10년이 지난 632년, 무함마드는 자신의 첫 이슬람 성지 순례를 마쳤다. 무함마드는 마지막 설교에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지 않고 흑인도 백인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하고, 부족 체제에 기초한 오랜 분쟁을 폐지하고 새로운 이슬람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에서 여성의 취약성을 언급하며 남성들에게 그녀들은 가정의 힘없는 포로이기 때문에 잘해주고 아내를 훈육할 권리는 있지만 친절하게 해야 하며, 상속 문제 등 이슬람 이전의 관습을 버리도록 충고했다. 그는 632년 6월 8일 메디나에서 62세 또는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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