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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이슬람제국

이슬람 제국 역사 지도 - 2편 라시둔 칼리파 시대 (632-644년)

by 금곡동로사 2021.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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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망 당시 이슬람 세력과 주변 국가

 

632-634년 아부 바크르

아부 바크르 압둘라 이븐 우스만 아비 쿠하파는 그의 딸 아이샤를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이슬람의 초대 칼리파였다. 그는 무슬림에게 알 시디크라는 존칭으로 알려져 있다.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한 후, 아부 바크르는 초대 라시둔 칼리파로서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를 계승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리다 전쟁으로 알려진 수많은 봉기를 극복했으며 그 결과 아라비아 반도 전체에 걸쳐 이슬람 국가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이웃한 사산 제국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초기 침공을 지휘했고, 그의 죽음 이후 수년간 무슬림은 페르시아와 레반트를 정복하게 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재위 2년 2개월 14일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632-633년 아라비아를 평정한 아부 바크르.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자 많은 반란군이 봉기했다. 반군 중에는 예언자를 칭하는 자가 여럿 나왔으며 많은 이들이 그들을 따랐다. 일부 반군은 무함마드가 예언자이기 때문에 복종했지만 아부 바크르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은 패배하여 칼리파 밑으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통합된 국가가 된 아랍은 이웃한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에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633년 그는 양 제국에 소규모 병력을 보내 공격했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두 제국을 공격한 아랍은 제국 사이에 있는 유목 부족에게 이슬람교를 전파하고 높은 세금에 시달리는 페르시아와 로마 시민의 해방을 기치로 내세웠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공격하여 이슬람 국가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 침공을 통해 상당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 633년 3월 셋째 주에 할리드가 이끄는 1만 명의 무슬림군이 알 야마마에서 출발하여 진군하는 도중에 군세가 1만 8천으로 늘었다. 할리드는 4월 카지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셋째 주에는 리버 전투에서 승리했다. 

 

633년 5월 왈라자 전투의 지도. 페르시아군(파란색), 무슬림군(빨간색). 할리드는 칸나에에서 로마군을 섬멸한 한니발과 같이 전술 기동을 통해 숫적으로 두 배인 페르시아군을 포위해서 격파했다.

 

633년 5월 중순 울라이스 전투의 지도. 페르시아군(파란색), 무슬림군(빨간색). 피의 강 전투라고도 불린다. 전투 결과, 페르시아군에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수의 아랍 기독교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슬람 기록에서는 7만의 병사가 죽어 강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하고 있다. 5월 마지막 주에는 중요한 도시 히라를 점령했다. 할리드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6월에 알 안바르를 포위하여 7월에 점령했다. 그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7월 마지막 주에 아인 알 탐르를 정복했다. 아라비아 북부 두마트 알 잔달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 요청을 받아 8월 마지막 주에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가 돌아왔을 때, 페르시아가 대군을 집결시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리드는 그들이 모이기 전에 격파하기 위해 3개 부대로 나누어 무자야, 사니, 주마일에서 각개 격파하여 사산 왕조의 메소포타미아 중남부 지배를 끝냈다. 수도 크테시폰이 노출되었지만 그는 수도를 공격하기 전에 남아있는 페르시아군을 없애기 위해 국경 도시 피라즈로 진군하여 12월에 페르시아, 비잔틴, 기독교 아랍 부족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할리드가 크테시폰을 향해 다시 동진하는 동안, 아부 바크르는 그에게 시리아 전선의 지휘를 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634년 4월 첫째 주, 아부 바크르는 동로마 제국을 향해 무슬림 원정군을 보내면서 모든 군대가 서로 연락하여 상황에 따라 작전 지역에 집결할 수 있도록 지시했으며 총지휘관으로 아부 우바이다를 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진격은 비잔틴군이 집결한 아즈나다인에서 저지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에게 병력 절반을 이끌고 시리아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할리드는 시리아 사막을 건너는 파격적인 경로를 택해, 5일간의 위험한 행군 끝에 시리아 북서부에 모습을 나타냈다. 사와, 아락, 타드무나(팔미라), 수크나, 카리아타인, 하와린과 같은 국경 요새가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다. 할리드는 보스라로 진격해 아부 우바이다와 슈르하빌의 군대와 합류하여 총지휘권을 넘겨받았으며 634년 7월 도시를 점령하고 가산 왕조를 종식시켰다.

 

634년 이슬람 세력과 주변 국가. 할리드는 나머지 군대 지휘관에게 비잔틴군 9만 명(오늘날 9천 명으로 추정)이 집결해있는 아즈나다인에 합류하도록 지시하여 634년 7월 30일 그곳에서 비잔틴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8월 22일, 아부 바크르는 전쟁을 시작했지만 결과를 보지 못하고 후임자에게 맡긴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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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644년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

우마르는 2대 라시둔 칼리파이며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무슬림 칼리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동료였다. 그는 634년 8월 23일 라시둔 칼리파국의 두 번째 칼리파로서 아부 바크르의 뒤를 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정의로운 천성으로 유명한 이슬람 율법학자였고, 이로 인해 알 파루크(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우마르 치하에서 칼리파국은 전례 없는 속도로 팽창하여 사산 제국을 비롯해 비잔틴 제국의 3분의 2 이상을 통치했다. 사산 제국에 대한 그의 공격은 2년도 안 되는 기간(642–644)에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우마르는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금지령을 철회하여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예배드리는 것을 허용했다. 우마르는 644년 페르시아인 노예 아부 루루아 피루즈에게 암살당했다.

 

할리드가 시리아 전선으로 떠난 후 메소포타미아 방면은 미트나 이븐 하리스가 지휘를 맡았다. 페르시아가 다시 군대를 집결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회복하자 미트나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아라비아 사막 부근으로 철수했다.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드 알 타카피가 이끄는 군대를 보냈지만 634년 10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게 패하고 아부 우바이드는 전사했다.

 

634년 9월 19일 다마스쿠스가 정복되었다. 비잔틴군에 가족과 재물을 가지고 가능한 한 멀리 도피하거나 도시에 머물며 세금을 바치도록 정하는 3일의 기한이 주어졌다. 3일 후, 무슬림 기병대는 알려지지 않은 지름길로 로마군을 따라잡아 공격했다. 칼리파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에게 총지휘권을 돌려주었고 그는 할리드에게 크게 의지하면서 시리아 정복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비잔틴군의 마지막 주둔군은 팔(펠라)에 있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635년 1월 23일 팔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할리드와 함께 에메사를 향해 북진했으며 아므르와 슈하르발은 팔레스타인을 향해 남진했다.

 

야지드가 주둔하고 있는 다마스쿠스가 허술하다고 생각한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에메사로 가는 길에 아부 우바이다와 할리드에게 차단되었다. 비잔틴군이 패배하여 황제는 1년의 평화 조약을 맺고 군대를 모았다. 휴전을 환영한 무슬림은 정복한 영토의 지배력을 강화했고 에메사와 칼키스에 비잔틴 증원군이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에메사로 진격하여 636년 3월에 도시를 점령했다. 포로를 통해 헤라클리우스의 계획을 알게 된 무슬림군은 군사 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마련했다.

 

야르무크 전투가 일어난 장소(네모칸). 비잔틴군이 진군하자 무슬림군은 정복한 지역에서 물러났고 제국 군대는 야르무크로 진격했다. 636년 7월 초 무슬림군이 야르무크에 이르렀지만 8월 셋째 주까지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할리드에게 총지휘권이 이양되어 6일간 전투가 벌어졌고 636년 10월 비잔틴군을 물리쳤다.

 

636년 11월 알 카디시야 전투의 지도. 페르시아군(파란색), 무슬림군(빨간색). 야르무크에서 무슬림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지연되었던 사산 왕조에 대한 공세를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이끄는 36,000명에 시리아 전선에서 파견된 7,500명이 합류하여 페르시아로 향했다. 초반에 페르시아군이 우세했지만 3일이 되자 무슬림군이 우위를 점했다. 페르시아군이 패배했고 그들의 전설적인 장군 로스탐 파록자드가 전사했다.

 

이슬람의 초기 정복을 나타낸 지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를 표기했다. 636년 야르무크와 알 카디시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무슬림은 완전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이들 전투 이후 비잔틴은 레반트 지역을 포기하게 되고 저항할 힘을 잃은 페르시아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크테시폰의 유적 타크 카스라(Taq Kasra). 수도로 가는 길이 지연되어 637년 1월에 무슬림군의 크테시폰 공성전이 시작되었으며 포위는 2달간 이어지게 된다. 지연된 동안 페르시아는 도시 주위로 깊은 해자를 파고 발리스타와 투석기를 준비했다. 무슬림군은 사정거리 밖에서 도시를 포위했다. 그들은 귀순한 페르시아 기술자의 도움으로 공성 무기를 준비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3월이 되자 사산 군대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 도시를 포기했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수도의 서안을 내주면서 티그리스 강의 다리를 모두 없앴다. 750 미터 폭의 강 수위는 높았고 건널 수 있는 배가 없었다. 사드는 아심 이븐 아므르 알 타미미가 이끄는 용사대를 선발해 말을 타고 강을 건너게 했다. 페르시아 기병대가 이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격퇴되었고 선발대를 이어 무슬림군 기병대가 속속 강을 건너왔다. 열세인 페르시아군이 패배하여 크테시폰은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무슬림군은 도시 중심부에 진입하여 제국의 본거지 하얀 궁전 타크 카스라에 입궁했다.

 

637년 4월 잘룰라 전투의 지도.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이 점령되었지만 도시 북동쪽의 잘룰라와 티그리스 강 북부의 티크리트와 모술의 페르시아군은 위협적이었다. 특히 수도에서 철수한 페르시아군은 잘룰라에 집결 중이었다. 칼리파 우마르는 티그리스 북부보다 잘룰라를 우선적으로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637년 4월, 하심 이븐 우스바가 이끄는 무슬림 원정군이 미흐란이 지휘하는 페르시아군에게 승리하고 잘룰라를 7개월의 포위 끝에 점령했다.

 

비옥한 스와드 지역(두 붉은 선 안쪽). 잘룰라에서 승리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티크리트와 모술 지역이 점령되어 메소포타미아 전역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카카가 이끄는 무슬림군에게 페르시아군은 계속 밀려나 훌완으로 철수했다. 페르시아군의 뒤를 쫓은 카카가 도시를 포위하여 638년 1월 훌완을 점령한 뒤, 계속 동진하려고 허락을 구했지만 칼리파 우마르는 이를 거부하고 진격을 멈추도록 했다.

 

비잔틴군에게 승리한 무슬림군은 예루살렘을 4개월간 포위했고 637년 4월 칼리파 우마르가 도착하자 도시는 그에게 항복했다.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와 함께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여 17,000명의 군대로 지역을 탈환했다. 할리드는 하지르로 갔고 아부 우바이다는 카스린으로 이동했다. 할리드는 하지르에서 비잔틴군을 물리치고 아부 우바이다보다 먼저 카스린에 도착해 도시를 점령했다. 얼마 후, 637년 6월 아부 우바이다가 도착하여 알레포를 공격했고 637년 10월 도시를 점령했다. 시리아 북부 정복을 완료한 그들은 아자즈 요새를 점령하고 안티오키아로 가는 길에 철교가 있는 강 근처에서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다. 637년 10월 30일, 안티오키아는 항복했다.

 

637년 말,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와 이야드 이븐 간늠을 아나톨리아로 보내어 아나톨리아 일부, 에데사, 아라라트 평원까지 대부분 별다른 저항 없이 정복했다. 638년 가을에는 할리드가 타우루스 산맥과 마라쉬, 말라티아와 같은 중요한 도시를 정복했다. 타우루스 산맥은 나중에 칼리파국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

 

640년 이슬람 세력과 주변 국가. 638년 후반, 자그로스 산맥 동쪽의 본토로 철수한 페르시아군은 계속해서 메소포타미아를 노렸다. 페르시아의 호르무잔이 계속해서 도발을 했고 640년에는 야즈데게르드 3세가 보낸 증원군으로 강화되었다. 투스타르에서 무슬림군과 전투를 벌인 호르무잔은 패배하여 메디나의 우마르에게 보내져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아부 무사는 투스타르에서 승리한 후 641년 1월 전략적으로 중요한 수사로 진군하여 몇 달간의 공성전 끝에 도시를 점령했다. 그는 후지스탄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준데 사부르로 진군하여 몇 주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639년까지 레반트 정복을 완료한 무슬림은 이제 이집트를 바라보았다.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지만 616-629년 동안 사산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무슬림의 시리아 정복 과정에서 제국의 힘은 이미 약해져 있었다. 639년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이끄는 4천 명의 무슬림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 639년 12월 나일 삼각주로 진격한 무슬림군을 상대로 비잔틴군은 요새로 들어가 1년 이상 버텼다. 640년에 12,000명의 새로운 병력이 합류하여 헬리오폴리스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했다. 알렉산드리아는 641년 11월 8일에 항복했고 테바이드는 거의 저항 없이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나하반드 성채의 모습. 잘룰라 전투 이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4년간 군대를 모아 칼리파와 싸우기 위해 나하반드로 진군했다. 우마르는 메소포타미아가 국경이 되기를 바랐지만 사산 왕조가 존속하는 한 그들의 침공은 계속될 것이라 생각했다. 642년 12월, 누만 이븐 무카린이 지휘하는 무슬림군이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 누만이 전사하자 우마르는 후데이파 이븐 알 야만을 새로운 지휘관으로 삼았고 무슬림군은 저항이 약한 하마단 지역 전체를 점령했다.

 

무함마드(진회색), 아부 바크르(회색), 우마르(연회색)의 이슬람 확장을 나타낸 지도. 우마르는 페르시아군에 승리한 후 제국의 심장부이자 페르시아군의 보급과 연락을 이어주는 이스파한 지역을 정복하기로 했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 할리드를 다시 지휘관으로 임명하기로 했지만 명을 내리기 전에 그는 에메사에서 사망했다. 할리드가 사망하자 우마르는 압둘라 이븐 우스만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한편, 파르스 정복은 638/9년 바레인 총독 알 알라 이븐 알 하드라미가 페르시아만의 섬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섬들을 점령하면서 사산군과 교전을 하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우마르는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를 임명하여 지원군을 보내 무슬림의 바레인 철수를 돕고 나머지는 바스라로 철수했다. 644년, 알 알라는 다시 한번 파르스를 공격하여 이스타크르에 이르렀지만 샤라그의 페르시아 총독에게 격퇴되었다.

 

우마르는 644년 아침 기도 도중 페르시아인 노예 아부 루루아 피루즈에게 암살당했다. 호르무잔이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16세기 사파비 왕조에서는 시아파로 바뀌는 과정에서 억압적인 칼리파 우마르를 죽인 영웅이자 최초의 이맘으로 아부 루루아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이 사원은 그의 마지막 안식처로 여겨지는 장소에 세워진 일 칸국 시대 건축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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