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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이슬람제국

이슬람 제국 역사 지도 - 3편 라시둔 칼리파 시대 (644-661년)

by 금곡동로사 2021.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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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무함마드와 라시둔 칼리파 시대의 무슬림 확장

 

644-656 우스만 이븐 아판

우스만 이븐 아판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6촌이자 사위이자 주목할만한 동료이자 라시둔 또는 "정당한 칼리파"의 세 번째였다. 메카 일족인 쿠라이시 우마이야 부족 출신의 그는 초기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쿠란 표준본을 편찬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리파 우마르가 59/6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칼리파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64/65세의 나이로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지도하에 이슬람 제국은 650년 파르스(현재의 이란)로, 651년 호라산(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지역으로 확장했다. 아르메니아 정복은 64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는 광범위한 저항과 불안이 있었고, 결국 무장 반란과 그의 암살을 초래했다. 우스만은 루카이야와 결혼했고, 그녀가 죽자 움 쿨툼과 결혼했다. 무함마드와 카디자의 손위 딸이었던 그의 아내들은 그에게 '두 빛의 소유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는 무함마드의 막내딸 파티마를 부인으로 둔 4대 라시둔 칼리파 알리의 동서이기도 하다.

 

643년 무슬림에게 정복된 데르벤트에 위치한 사산 왕조의 요새. 무슬림은 페르시아 제국의 북동쪽, 북서쪽, 남동쪽 세 방면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부카르 이븐 압달라는 파루크자드의 아들 이스판디야르가 이끄는 페르시아 대군에 승리했으며 우트바 이븐 파르카드는 이스판디야르의 형제 바흐람을 무찔러 아제르바이잔은 아랍에 항복했다.

 

6세기 아르메니아 지역. 638-639년에 비잔틴 아르메니아(반 호 서쪽)를 정복한 무슬림은 645/646년이 되자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아르메니아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다. 테오도시오폴리스를 공략한 무슬림은 드빈으로 향해 점령하고 코카서스 이베리아의 트빌리시도 장악했다. 한편, 살만 이븐 라비아가 이끄는 아랍군은 코카서스 알바니아를 정복했다.

 

칼리파 우마르가 정복한 이스파한. 하마단 지역을 장악한 무슬림은 북동쪽, 북서쪽, 남동쪽 방면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651년 하마단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무슬림은 지역을 탈환하고 통치권을 회복했다.

 

파르스와 케르만 지역의 지도. 648년 무슬림은 페르시아 총독에게 항복을 요구하여 이스타르크를 점령했다. 649/650년 무슬림이 고르를 점령하기 위해 신경을 쓰는 동안 도시는 반란을 일으켰고 총독 우바이드 알라 이븐 마마르는 살해되었다. 650/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아랍에 대한 저항을 계획하기 위해 이스타르크와 고르에 갔지만 이스타르크는 다시 점령되어 약탈당했고 고르, 카제룬, 시라프가 점령되었으며 페르시아 샤한샤는 케르만으로 도피했다.

 

레이와 카스피 해 남쪽 지역. 651년 누만의 형제 누아임 이븐 무카린은 격렬한 전투 끝에 레이를 점령했다. 정복을 위해 북동쪽으로 진군해 있는 동안 하마단 지역과 레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누아임은 하마단을 진압하고 레이를 탈환했다. 그 후 누아임은 타바리스탄으로 진군하여 그곳을 정복했다.

 

케르만을 확보한 무슬림은 650년 사카스탄을 침공했지만 대패하여 퇴각했다. 1년 후 라비 이븐 지야드 하리티가 이끄는 아랍군이 즈랑을 포위하여 페르시아 총독 아파르비즈가 항복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18개월이 지나, 라비가 바스라로 소환되고 압드 알 라흐만 이븐 사무라가 대신 부임한다는 소식에 사카스탄은 반란을 일으켰다. 도착한 압드는 반란을 진압하고 부스트와 주변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호라산과 동쪽 지역의 지도. 651년 호라산의 정복은 아흐나프 이븐 카이스에게 맡겨졌다. 니샤푸르에 무혈입성한 그는 요새화 된 도시 헤라트로 진군했다. 몇 달간의 포위 끝에 헤라트가 항복하자 남부 호라산 전체가 무슬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흐나프는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가 있는 메르브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아랍의 진격 소식에 야즈데게르드는 발흐로 물러나 병력을 모으고 파르가나의 튀르크 칸과 동맹을 맺었다. 나중에 파르가나의 칸은 자신의 왕국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동맹을 파기하고 철수했다. 아흐나프가 옥수스 강 전투에서 야즈데게르드를 격파하여 샤한샤는 간신히 중국으로 도주했다. 아흐나프는 트란스옥시아나 침공 허가를 구했지만 옥수스 이남에서 지배를 강화하라는 명을 받았다. 

 

칼리파 우스만의 치세에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동안 수차례 반란이 일어나 탈환을 위해 캠페인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651년 사산 왕조의 마지막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가 돈을 노린 메르브 근처의 방앗간 주인에게 살해되면서 왕조와 조직적인 저항은 종식되었다.

 

654년 라시둔 칼리파국의 최대 영역. 이란 지역이 무슬림에게 정복되었지만 그들은 아랍화되지 않았다. 이후 페르시아인은 이슬람 내에서 다시 분리되고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칼리파 우스만의 무덤. 656년 6월 17일, 우스만의 저택을 발견한 하리지트 일당은 뒷벽을 타고 몰래 안으로 잠입했다. 우스만의 방에 들어간 하리지파가 그를 살해하고 목을 베려했지만 우스만의 두 미망인의 저항으로 이를 포기하고 저택을 약탈한 뒤 떠났다. 우스만이 주요 요직을 가족들에게 맡기고 종교적 규율보다 경제적 번영을 중시하면서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한 것과 이슬람의 등장 이후 소외된 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가운데 일어난 일로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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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661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자 동반자였다. 그는 시아파 이슬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으로 무함마드의 정당한 직계 후계자이자 시아파 무슬림의 모든 분파에서 최초의 이맘으로 여겨진다. 그는 아부 탈리브와 파티마 빈트 아사드의 아들이자 파티마의 남편이며, 하산, 후사인, 자이납을 낳았다. 어렸을 때, 무함마드는 그를 돌보았다. 무함마드는 그를 그의 형제, 수호자, 후계자라고 불렀다. 메디나에서 그는 대부분의 전쟁에서 기수였으며 그의 용맹함으로 유명해졌다. 무함마드 이후의 칼리파 체제에서 그의 권리 문제는 무슬림 사이에 큰 균열을 일으켰고 그들을 시아파 집단과 수니파 집단으로 나누었다. 가디르 쿰의 고별 순례에서 돌아온 무함마드는 "누구든지 내가 그의 마울라라면, 이 알리는 그의 마울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울라(수호자, 조력자와 같은 다의어)의 의미는 시아파와 수니파에서 논쟁되었다. 이를 근거로 시아파는 알리에 대한 이맘의 직분과 칼리파의 성립을 믿으며, 수니파는 이 단어를 우정과 사랑으로 해석한다. 알리가 무함마드의 시신을 매장할 준비를 하는 동안, 한 무리의 무슬림이 사키파에서 모여 아부 바크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알리는 6개월 후 아부 바크르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3대 칼리파 우스만 선출을 제외하고는 전쟁과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세 칼리파에게 종교, 사법, 정치적인 문제에서 그들이 원할 때마다 조언을 해주었다. 우스만이 살해된 후 알리는 차기 칼리파로 선출되었고, 이는 무슬림 간의 첫 내전과 동시에 일어났다. 알리는 메카에서 칼리파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할 것을 원하는 아이샤, 탈하, 주바이르가 이끄는 무리와 우스만의 피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는 레반트의 무아위야가 이끄는 또 다른 무리의 반정부 세력에 맞섰다. 그는 낙타 전투에서 첫 번째 무리를 물리쳤지만, 결국 무아위야와의 시핀 전투는 군사적으로 효과가 없었고, 정치적으로 그에게 불리한 중재로 이어졌다. 그리고 히즈라력 38년에 그는 나흐라완에서 알리의 중재 수용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반란을 일으킨 하지리파와 싸워 그들에게 승리했다. 알리는 쿠파 모스크에서 하리지 중 한 명인 이븐 물잠 모라디의 칼에 맞아 살해되었고 쿠파 시의 외곽에 묻혔다. 나중에 그의 사원과 도시 나자프가 그의 무덤 주변에 세워졌다.

 

 

616-661 하산 이븐 알리

이맘 하산 알 무즈타바라고도 불리는 알 하산 이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알리와 파티마의 장자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이다. 그는 아버지 알리에 이어 두 번째 시아파 이맘이다. 그는 아흘 알 키사(무함마드, 파티마, 알리, 하산, 후사인을 지칭)뿐만 아니라 아흘 알 바이트(무함마드의 가족을 지칭)의 일원으로 여겨지며 무바할라 사건에 참여했다. 무함마드는 하산과 그의 형제 후사인을 "낙원의 젊은이들의 주인"이라고 묘사했다. 알리가 칼리파로 있는 동안, 하산은 그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다. 알리가 암살된 후 그는 칼리파로 인정받았다. 하산이 선택되었다는 소식이 칼리파 자리를 위해 알리와 싸우고 있던 무아위야에게 전해지자마자 그는 발탁을 비난하며 그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군대가 서로 대치하기 전에 주고받은 편지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산은 선봉대 만 이천 명을 보내어 우바이드 알라 이븐 알 아바스 휘하의 마스킨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하산이 본대와 함께 도착할 때까지 무아위야의 군대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하산은 알 마다인 근처의 사바트에서 문제에 직면했고, 그곳에서 설교를 했다. 이를 하산이 전쟁을 포기하고 무아위야와 화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그의 군대 중 일부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산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도주했지만 하리지파에 부상을 당했다. 공격당한 소식을 무아위야가 퍼뜨리자 이미 낙담한 하산군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우바이드 알라는 무아위야의 뇌물을 받고 등을 돌렸다. 라우라 베치아 발리에리에 따르면 12,000명 중 8,000명이 장군의 예를 따랐다. 이미 하산과 협상을 시작했던 무아위야는 고위 사절단을 파견하여 그의 통치권을 자신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다른 조건과 함께 하산을 후계자로 임명하겠다고 서신을 통해 확약했다. 그리하여 하산은 제1차 피트나를 끝내기 위해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인 무아위야에게 양위했다. 하산은 메디나에서 은퇴하여 죽을 때까지 무아위야에 대한 정치적 개입에 초연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아내 자다 빈트 알 아샤트는 무아위야의 사주로 그를 독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칼리파 알리(연두색)와 무아위야(붉은색) 간에 일어난 무슬림의 첫 내전을 나타낸 지도. 쿠라이시족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가까운 알리가 칼리파를 이어받음으로써 한 씨족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칼리파는 쿠라이시 중에서 선출하기로 정했다. 칼리파 우스만 사후, 알리가 칼리파가 되어 무함마드의 가문 하심 일족의 권리를 옹호하자 쿠라이시는 그를 외면했다. 알리는 또한 우스만 살해범의 처벌을 거부하고 우스만을 따랐던 자들을 요직에서 축출한 혐의도 받았다. 몇몇 총독은 교체되었지만 레반트 총독 무아위야와 같은 총독들은 알리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게다가, 알리의 지지자들은 대부분이 유목민과 농민으로 그는 농업에 관심이 있었다.

 

656년 바스라 외곽에서 벌어진 낙타 전투. 알리와 무함마드의 미망인 아이샤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아이샤는 칼리파 우스만의 암살을 복수하기 위해 이를 거부한 알리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알리가 승리하여 탈하와 주바이르가 처형되고 아이샤는 포로가 되었다.

 

유프라테스 강기슭의 라카 주변에서 벌어진 시핀 전투. 657년 알리와 무아위야 간에 벌어진 전투로 양군은 두 달 이상 그 장소에서 대치했으며 알리의 군대가 거의 승기를 잡으면서 무아위야는 패배 직전에 있었지만 그는 창끝에 무샤프를 매달았다. 무샤프는 양측이 칼을 내려놓고 코란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라는 뜻을 내포했다. 알리는 무샤프는 코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휘하 병사들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고 하며 전투를 계속하면 그를 적에게 넘기겠다고 위협하는 자도 나왔다. 이 중재로 인해 알리는 정당성이 약화되고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무아위야는 그의 입지를 강화하고 알리에 대항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쿠파, 바스라, 푸스타트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칼리파 우스만이 살해되었고 뒤이은 첫 내전에서 하리지파가 생겨나게 된다. 하리지파는 알리에게 무아위야와의 전쟁을 재개하도록 요구했지만 그가 거절하자 그들은 등을 돌리고 독립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쿠란의 가르침을 통해 반란군과 싸워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아위야가 세력을 모으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알리는 하리지파의 말대로 다시 싸우려 했지만 그들이 알리가 먼저 뉘우쳐야 한다고 주장하자 화가 나서 거부했다. 658년 하리지파가 사람들을 죽이자 알리는 나흐라완에서 그들과 전투를 벌이고 격파하여 대부분의 하리지파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과 휘하 병사의 이탈로 알리는 무아위야에게 진군할 수 없었다.

 

오늘날 쿠파의 대모스크. 알리는 쿠파에 틀어박혀 수세적인 입장을 고수했고 무아위야의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캠페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후 무아위야의 지배와 정책에 민중이 환멸을 느끼면서 알리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대다수가 무아위야에 대한 반감으로 그를 지지했다. 661년 1월 26일, 나흐라완 전투의 복수를 원한 하리지파 이븐 물잠이 62세 또는 63세의 알리를 공격하여 부상을 입혔고 그는 이틀 후에 사망했다.

 

661년 이슬람 세력과 주변 국가. 칼리파 알리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하산이 칼리파를 이었다. 이에 무아위야는 12만의 병력을 이끌고 쿠파로 진군했다. 그는 조약을 통해 무아위야에게 통치권을 넘겨준 뒤 메디나에 은거했다. 670년 하산은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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