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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중세유럽

부이예 전투

by 금곡동로사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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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년 갈리아 세력도. 프랑크족(파란색), 수아송 왕국(보라색), 알레만니족(빨간색), 부르군트족(연두색), 서고트 왕국(노란색)

 

프랑스의 탄생
날짜 - 507년 봄
위치 - 아키텐 푸아티에 북서쪽 15 km(9 마일) 부이예

 


역사적 배경

서유럽에서 5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발전은 이미 서로마 제국의 옛 속주를 흡수한 게르만 왕국들의 출현이었다. 확인 가능한 주요 집단은 갈리아 남서부와 스페인을 지배했던 서고트족(비시고트족), 론 계곡 상류의 부르군트족, 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부상한 살리 프랑크족, 그리고 5세기 말에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전까지 판노니아에 근거지를 둔 동고트족(오스트로고트족)이었다.

454년 샬롱(카탈라우눔 평원)의 승리자인 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가 죽은 후, 갈리아에서 제국의 권력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461년 살해되기 전에 마이오리아누스 황제(재위 457-461년)가 임명한 로마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인 아이기디우스 치하의 갈리아 북부 수아송 왕국(나중에 네우스트리아)이 로마 잔재 국가로 등장했으며, 그가 동쪽으로는 프랑크족에, 남쪽으로는 서고트족에 맞서 권력을 유지하면서 동시대 갈리아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465년에 뒤를 이어 수아송의 통치자가 되었다.

5세기 중반 이후, 살리 프랑크 왕 킬데리쿠스(재위 457-481년)가 갈리아 북부에서 주요 세력이 되었고, 서고트족, 색슨족, 알레만니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갈리아 북부에 살리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는 463년 오를레앙에서 서고트족을 상대로 승리한 아이기디우스를 더욱 지지했다. 그러나 루아르 강 북쪽의 갈리아 지역 대부분을 통합한 사람은 킬데리쿠스의 아들 클로도베쿠스(클로비스, 재위 481-511)였다.

481년까지 서유럽의 주요 지정학적 충돌은 아키텐 영토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던 세 민족, 즉 갈리아 남서부의 서고트족, 남동부의 부르군트족, 그리고 루아르 강 북쪽의 프랑크족 사이에 일어났다. 48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투르네의 살리 프랑크족의 지도자가 된 클로도베쿠스는 루아르 강과 솜 강 사이의 영토를 점차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486년경 그는 시아그리우스를 물리치고 수아송 왕국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이 승리로 클로도베쿠스는 강력하게 요새화 된 수아송과 상당한 무기 공장을 장악하고 시아그리우스를 섬겼던 로마 부대들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통합되었다.

그가 네우스트리아(옛 수아송 왕국인 루아르 강과 솜 강 사이의 영토)를 완전히 장악한 후, 클로도베쿠스는 부르군트 북쪽의 갈리아 동부에 있는 소수의 투링기족에 관심을 돌렸고, 491년 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클로도베쿠스의 팽창주의 전략이 부르군트족과 라인 강 상부와 중부의 알레만니족을 겨냥한 것임은 빠르게 명확해졌다. 결국 그는 496년 쾰른에서 남쪽으로 약 50 km 떨어진 톨비악 전투에서 알레만니족의 아우스트라시아와 라인 강 하류 침공에 맞서 승리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전투의 정확한 성격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클로도베쿠스는 전투 중에 종교적인 체험을 한 아내 클로틸디스의 정통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또는 아마도 프랑크 왕에게 자신의 이교도 과거를 비난하도록 만든 것은 단순한 외교적 책략이었을 것이며, 이는 항상 이교도 추종자들의 지지를 잃을 위험을 수반했다. 역사가들은 결국 클로도베쿠스에게 세례를 한 랭스의 주교 레미기우스가 보낸 편지를 강조했는데, 그는 이 편지를 통해 프랑크 왕에게 '갈리아 로마 교회의 지지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490년대 후반에는, 아마도 클로도베쿠스는 루아르 강 남쪽 서고트 왕국에 대한 접근을 개선시켜준, 당시 브르타뉴의 아르보리키('아르모리카인')와의 동맹으로 강화되어, 서고트 아퀴타니아에 대한 확실히 입증되지 않은 프랑크의 공격이 잇따랐다. 그러나 서고트는 결국 프랑크의 공격을 격퇴했고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클로도베쿠스가 이끄는 프랑크군이 루아르 강어귀에서 60일간 낭트를 포위했다고 전한다. 서고트는 또한 루아르 강 남쪽 기슭에 있는 투르와 아키텐의 수도인 보르도의 지배권을 505년까지 되찾았다. 이 도시들은 역사가들에게 정복 캠페인보다는 습격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지난 10년 동안 프랑크에게 점령되었었다.

500년경, 클로도베쿠스는 부르군트 왕 고데기셀의 편에 서서 부르군트 내전에 말려든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내렸다. 고데기셀의 패배는 프랑크인 포로들이 툴루즈로 유배되어 알라리쿠스 왕에게 보내지는 등 클로도베쿠스에게는 정치적, 외교적 차질을 빚게 했고, 반면에 고데기셀의 경쟁자였던 군도바드를 지지했던 서고트는 분쟁거리인 아비뇽에 대한 통제권까지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도베쿠스는 아퀴타니아에 대한 설계를 계속했다. 그는 다른 게르만 지도자들과의 동맹을 강화함으로써 서유럽에서의 그의 입지를 향상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 아우도플레다를 야심 찬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와 결혼시켰다.

부이예 전투는 아키텐에서 서고트 왕국을 격파하고 갈리아의 남서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는 군사 조우였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배크러치는 이 군사 작전이 프랑크 왕의 주도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 아리우스파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에 대항하여 북쪽의 주 교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재 니케아 기독교인이 된 프랑크족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제국의 정책은 확실히 [비잔틴]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사실, 주요 사료에서는 아마도 수도 파리에서 클로도베쿠스를 만났던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사절단과 양측이 한 약속에 대해 전하고 있다. 아리우스파 서고트에 대항하여 프랑크 로마 기독교 왕의 대의를 지지하기 위해 파리와 콘스탄티노플 사이를 중재했던 아키텐의 니케아 주교들의 역할 또한 강력한 가능성으로 여겨져야 하지만, 사료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전투 1년 전인 506년, 클로도베쿠스는 두 왕국 사이의 상징적인 국경인 루아르 강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서 회담을 한 후, 서고트 왕 알라리쿠스와 불가침 조약에 합의했다. 그리고 알라리쿠스가 낭트, 앙제, 투르, 오를레앙의 요새 도시들을 클로비스에게 넘겨준 것은 아마도 이때일 것이다. 이 도시들은 엄청난 농업 및 상업적인 중요성으로 루아르 강 하류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도시의 사람들은 아리우스파 서고트족을 경멸하거나 심지어 증오했던 로마 카톨릭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두 지도자가 선의로 협상을 했는지, 아니면 아키텐을 침략하려는 진정한 의도에서 서고트 왕을 몰아내기 위해 클로도베쿠스가 행한 책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침내, 프랑크 왕은 부르군트 왕 군도바드와 군사 동맹을 맺은 가운데, 부르군트 군대가 남동부의 여러 서고트 도시와 거점에 대한 작전을 개시하는 것을 포함했으며 아마도 테오도리쿠스가 그의 사위인 알라리쿠스를 지원하기 위해 동고트군이 침공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방패'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전투의 서막

507년 2월 또는 3월 초에 클로도베쿠스는 레그눔 프랑코룸 전역에 군대를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 후, 이른 봄에, 그는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으로 들어갔다. 클로도베쿠스의 캠페인 전략은 서고트가 지배하고 있는 아키텐을 침공하여 가능한 한 빨리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서고트의 지배에 반대하는 이 지역의 카톨릭 갈리아 로마 사회의 정치적 엘리트들로부터 환영받기를 바랐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클로도베쿠스가 요새화 된 아키텐 도시들의 민병대를 그의 군대에 흡수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에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기록한 역사를 보면 알라리쿠스의 전략은 프랑크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푸아티에에 집중하도록 명령하는 등 대응적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또한 서고트 왕이 아키텐과 오베르뉴의 키비타테스(도시들)에서 이끌고 온 부대에게 루아르 강 남쪽 약 100 km에 있는 견고한 도시 푸아티에에 집중하도록 명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찍 침략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푸아티에의 중요성은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고대 로마 도로의 교차점과 항해할 수 있는 강을 건너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220여 년 후 아키텐이 침공당하여 카롤루스 마르텔루스가 이슬람 군대를 저지할 때도, 비엔 강은 극복해야 할 주요 장애물이었다. 특히 이른 봄비와 녹은 눈이 강을 불게 하는 시기인 4월에 그렇다. 푸아티에는 또한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인 로마 말기의 성 힐라리오 대성당이 있던 곳이기도 했는데, 이곳은 클로도베쿠스가 승리한 직후 재건되고 황금 모자이크와 귀중한 유물로 장식되었다.

비엔 강을 건너는 야생동물이 목격된 후 도강한 클로도베쿠스는, 푸아티에에서 북서쪽으로 약 15 km(9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부이예 주변 지역에 진을 쳤다. 그는 전투 전날 정찰병을 보내 서고트군의 행방을 알아내고, 자신이 선택한 전장에 병사들을 배치할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507-509년 클로도베쿠스의 캠페인


양측 군대

무기

4세기와 5세기에 제국에 침투한 다양한 부족 군대 사이 또는 그 내부에서 표준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야만인' 장비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 유일한 예외는 프랑크의 투척용 도끼인 프랑키스카로, 평균 무게가 1-2kg, 나무 손잡이가 약 40 cm, 도끼머리는 약 18 cm였다.

 

로마 이후 유럽에서 '야만인'과 로마 무기 사이의 유사점은 수세기 동안 국경을 넘어 제국의 막대한 문화적, 경제적 영향의 직접적인 결과뿐만 아니라, 로마인과 함께/로마인을 위해 싸웠던 '야만인'에게 공급한 지역 파브리카이(병기고)에서 제조한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와 갑옷 때문이다. 사실, 후기 로마군이 사용한 무기는 카롤루스 마그누스(재위 768-814년) 통치 시대까지 그리고 치세 동안 전사들의 기본적인 무기로 남아있었다.

보병들은 주로 단검과 창을 사용했다. 이 초기 시기에는 예상대로 창의 표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고학적 발견으로 볼 때 대장장이들은 공식적인 지침 없이 자신만의 방식과 크기의 창을 만들어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가능한 예외는 프랑크 앙곤으로, 로마의 필룸을 닮은 투창이며 쇠로 된 막대 끝에 부착한 뒷부분이 양쪽으로 튀어나온 날로 수정되었고(7세기에), 적의 방패에서 갈고리처럼 걸려 사용되지 못하게 했다.

수많은 '야만인' 묘지에서는 카롤루스 왕조 이전 유럽의 게르만족이 모두 곧게 뻗은 양날 무기인 장검(길이 75-100 cm, 너비 6 cm)과 단검(길이 40 cm, 너비 4 cm)을 들고 다녔으며, 북유럽 민족(바이킹, 색슨족, 프랑크족)이 사용한 한쪽 날 무기 또는 보조무기로 사용한 긴 단도(20 cm)인 스크라마색스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시대의 가장 흔한 무기는 형태와 크기가 엄청나게 다양했던 창이었을 것이다. 기마병은 창과 장검을 가지고 다녔지만 대부분의 기병은 단검도 가지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방어 장비는 지름이 80-90 cm 정도 되는 원형 또는 볼록한 나무 방패였을 것이다. 채색 사본은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사이의 투구가 일반적으로 스팡겐헬름이라고 불리는 형태였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데, 투구의 둥근 부분은 여러 부분으로 만들어져 연결부를 덮는 철갑으로 고정 및 보강했다. 당대 문헌 자료들은 금속 갑옷(메일과 찰갑 모두) 또한 보편적이지는 않았지만 흔했다고 암시한다.

금속 갑옷을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 전사들은 아마도 삶은 가죽이나 패드를 입힌 보호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귀족들은 또한 일반적으로 후기 로마군의 장비와 비슷한 철판 한 장으로 만들어진 투구와 사슬 갑옷을 소유했으며 모두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군대

알라리쿠스의 군대는 알려져 있지 않은 수의 서고트족과 갈리아 로마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고트족은 56년 전에 아틸라와 훈족을 무찌르고 승리한 군대의 후손들이었다. 말과 갑옷을 지원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은 기병으로 싸우는 반면, 가난한 징집병들은 창이나 활을 쓰는 보병으로 싸우도록 징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원정군은 최소한의 요구 재산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말과 정교한 전투 장비가 모두 부족했던 지역의 갈리아 로마인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갈리아 로마 귀족들의 가문 부대인 장비가 좋고 훈련이 잘 된 기마병으로 이루어진 다소 소수의 정예병이 있었다.

클로도베쿠스의 군대는 또한 매우 다양한 출처에서 추출되었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들은 주로 왕과 귀족들의 가문 군대, 프랑크족 또는 갈리아 로마 출신의 정예 전사 집단, 또는 이웃 국가들로부터 온 외국인 용병들이었다. 다른 사료들은 초기 메로베우스 군대에 기여했던 병역 의무가 있는 군사 토지의 지주들과 후기 로마 제도인 라이티(로마 영토에 정착해 후기 로마에서 세습적인 병역 의무를 지고 적을 물리쳤다)에서 온 정규군을 언급한다. 

전투

전투에 대한 목격자들의 진술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두 군대의 전투 배치나 기마병과 보병의 비율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이 전투가 일반적인 화살과 창과 같은 무기를 서로 날리면서 바로 시작되었고, 따라서 수세기 동안 존재해 온 로마의 전투 관행에 확실히 부합했다고 전한다. 50년 전 샬롱에서 있었던 서고트의 기병 돌격을 연상시키는 공격의 맹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위치를 고수했던 프랑크 팔랑크스 보병에 대한 기마 돌격이 뒤따랐다.

사료들은 전투 과정이나 양측 군대가 사용한 전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역사에는 프랑크 팔랑크스 앞에서 서고트 기병이 행한 퇴각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견고한 대형을 깨뜨리기 위한 명백한 시도로 보인다. 이 노력은 실패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레고리우스는 서고트의 퇴각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며, 단순히 '클로도베쿠스 왕이 신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라고만 언급한다. 이 내용은 클로도베쿠스가 예비해 두었을지도 모르는 기병 부대로 역습을 가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다.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알라리쿠스가 전사한 후, 최종 결과는 프랑크의 완전한 승리였다. 전승에 따르면 클로도베쿠스가 알라리쿠스의 죽음에 직접적인 관여를 했다고 한다.

 

500년경 서유럽 민족과 영역. 서고트 왕국은 부이예 전투에서 패한 후 갈리아를 상실하게 된다


결론

전투의 성공적인 결과에 따라 프랑크 왕은 남쪽을 휩쓸고 요새도시 보르도를 포함하여 서고트가 지배하던 아키텐(갈리아 아퀴타니아)의 북부, 중부, 서부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아키텐 남동부(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 있는 서고트의 수도 툴루즈도 왕실 보물과 함께 함락되었고, 부르군트 동맹군은 나르본을 점령했다. 프랑크는 카르카손과 아를을 따라 남쪽과 동쪽으로 더 진격했지만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테오도리쿠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르본과 툴루즈를 모두 점령했다. 프랑크인이 지중해에 접근하기까지는 2세기가 더 걸리게 된다.

클로도베쿠스가 508년 봄에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투르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로부터 파트리키와 명예 집정관 직을 받았다. 이 영예로 클로도베쿠스는 갈리아 북부에서 사실상 왕의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갈리아 남부에서는 제국 총독으로서 통치할 자격을 얻었다. 그는 부이예에서 당대의 떠오르는 또 다른 초강대국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승리로 갈리아의 미래를 완전히 결정지었다. 알라리쿠스 왕이 죽고, 그의 군대는 넝마가 되어 더 이상 아키텐 정복을 견딜 수 없었다. 갈리아의 미래 역사는 고트족이 아니라 프랑크족에 의해 쓰이게 되었으며 그들은 또한 갈리아에 새로운 이름인 프랑스를 부여했다.

 

 

 

출처 : Weapons and War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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