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을 목격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아보에 따르면 885년 가을 어느 날 고성능 선박 700 척과 아주 많은 작은 선박들이 강 하류 2 리그[10 km 또는 6 마일] 이상까지 뻗어 있는 기둥처럼 센 강을 감쌌다. 젊은 베네딕도회 수도승은 또한 이 선박들을 조종하는 '음산한 자들'이 4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아마도 바이킹의 맹공 중 가장 야심 찬 침공이었던 885-6년 파리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간 바이킹 군대는 앨프레드의 방어책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쫓겨난 소위 대군세의 다양한 요소들과 플랑드르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다른 습격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탄한 아보가 그의 라틴어 서사시 "벨라 파리시아카이 우르비스"(파리시 전쟁)에서 전한 숫자는 200여 명의 방어자들의 '신성한 영감을 받은' 행동을 강화하기 위한 문학적 자수였다. 존경받는 중세 군사 사학자 캐롤 길모어는 양적 방법론을 통해 바이킹 함대는 각각 약 26명이 탑승할 수 있는 스쿨델레우 5 선박(길이 17.3 미터 / 57 피트, 폭 2.5 미터 / 8 피트, 깊이 0.5 미터 / 1 피트 8 인치) 크기의 200-300 척 이하의 배로 구성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전체 인원은 많아야 5,000명에서 8,000명 정도였다. 실제 총계는 아마도 더 작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습격은 그 시대 서프랑키아 심장부에 대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된 바이킹의 공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대한 바이킹 함대의 목표는 원래 파리가 아니라 아직 손상되지 않은 수도원과 마을들이 있는 부유한 센 강 상류 유역과 부르고뉴였다. 885년 11월, 노르드인이 센 강을 노를 저어 오를 때, 그들은 대머리왕 샤를이 뽕드라흑슈(Pont-de-l'Arche)에 건설한 요새화 된 다리를 지나는 데 성공했는데, 아마도 다리의 경비가 불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인근에는 주요 인구 중심지가 없었다. 반면에 파리는 5,000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로 센 강을 가로막는 두 개의 요새화 된 다리인 오른쪽 기슭(북쪽)으로 뻗어있는 그랑 퐁(Grand Pont)과 왼쪽 기슭(남쪽)으로 뻗어있는 쁘띠 퐁(Petit Pont)을 통제하고 있는 시테 섬에 위치했다. 아보에 따르면, 이것이 바이킹이 11월 말에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주요 족장 시그프리드가 단지 통행을 요청한 이유였다고 한다. 도시의 최고 권위자인 고즐린 주교가 허락을 거부하자 적대 행위가 촉발되었다.
바이킹은 11월 26일 다리를 지키는 탑이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른쪽 기슭에 있는 그랑 퐁을 먼저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아보는 데인인이 배에서 탑을 공격했지만, 미완성이든 아니든 탑의 기초는 돌로 견고하게 지어졌고 그들은 격퇴당했다고 전한다. 밤 동안 방어군은 원 구조물의 절반 높이에 있는 나무 층을 탑 꼭대기에 올렸다. 단념하지 않은 포위군은 다음 날 평소와 같이 발리스타와 슬링샷으로 '다트, 돌, 투창...'의 폭격을 퍼부으며 요새를 공격했다. 그들은 철제 곡괭이를 들고 탑 아래까지 갔지만, 고즐린 주교와 파리 백작 오도가 효과적인 저항을 조직했다. 방어군은 공격자들에게 기름, 밀랍, 역청을 섞어 '데인인의 머리카락을 태우고 두개골이 갈라지게 했다'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다음으로, 데인인은 탑의 문을 불태우려고 시도했지만, 몇몇 초기 버전의 오리플램(프랑스 왕실 군기)과 같은 '샤프란으로 황금빛의 색을 넣은' 깃발을 든 두 명의 기수가 이끌고 도시에서 출격하여 공격자들을 쫓아냈다. 오도의 동생 로베르가 전투 중에 쓰러졌지만, 시민들은 단호했다. 탑은 밤에 다시 수리되었다. 포위전이 신속하게 되지 않을 것을 깨달은 스칸디나비아인은 오른쪽 기슭으로 후퇴하여 생제르맹 오세루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돌과 토공으로 요새화 된 진영을 세웠다. 그곳에서 그들은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사방을 습격했다. 이것이 끝나자, 그들은 힘차게 공격을 재개했다. 이어지는 몇 주 동안 바이킹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계략을 시도했다. 그들은 '괴물 같은 바퀴'가 달린 지붕이 있는 공성 램 여럿을 만들었다. 그들은 성벽을 공격할 때 화살을 빗나가게 하고 액체를 뜨겁게 태우는 곧은 막대기로 높이 고정한 수많은 천막을 만들었다. 그들은 심지어 납을 녹여 만든 수많은 병 수류탄도 만들어 투석기로 도시의 로마 성벽 위로 던졌다. 한때 데인인은 3개 부대를 편성하여, 그중 한 부대는 탑을 우회 공격했고, 다른 두 부대는 '도색된 배'를 타고 다리를 들이받으려 했다. 어느 것도 효과가 없었다. 다리와 탑은 굳게 유지되었다. 문제의 일부는 방어군이 탑 주위에 구덩이를 파서 바이킹이 공성탑을 제 위치로 옮기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었다. 테스투도('거북이'처럼 방패를 이용해 촘촘히 정렬하여 진격하는 전사들의 부대 단위)로 전진한 바이킹은 가축과 죽은 포로의 시체를 포함하여 흙과 보이는 모든 파편들로 도랑을 채우려 했다.
결과는 엇갈렸고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또 다른 동시대 자료인 프륌의 레기노에 따르면, 바이킹은 너무 좌절해서 연말이 오기 전에 포위를 아예 포기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요새화 된 다리를 우회하기 위해, 그들은 오늘날의 퐁 디에나(Pont Die'na) 지역에서 생제르맹데프레 부지를 통해 3 km(2 마일) 정도 떨어진 생루이 섬의 바로 동쪽 지점까지 배를 롤러(통나무로 추정)로 운반하거나 끌고 가는 복잡한 운송 작전을 시도했다. 바이킹은 그들의 선원들이 처녀항해하는 센 강 상류 유역을 수색할 수 있도록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의 작은 선박 중 일부를 막힌 곳을 통과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해결책은 분명히 스쿨델레우 5 또는 그 이상의 크기인 200-300 척의 함대에게는 분명히 실행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막힌 것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바이킹은 '노 젓는 배 3 척'을 골라내어 오른쪽 기슭에 있는 육지로 끌고 가서 도시 상류에 다시 띄웠다. 일단 이 배들이 나뭇가지와 잎 더미를 가득 채운 채 불길에 휩싸이자, 데인인은 강둑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물이 배들을 그랑 퐁으로 데려갈 수 있는 곳까지 밧줄로 배들을 이끌었다. 그 모험은 극적으로 실패했다. 화선이 석조 교두보에 무해하게 매달리자, 방어군은 불길을 잡고 함선들을 온전하게 끌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바이킹이 그랑 퐁에서 반복적으로 해내지 못한 것을 자연은 쁘띠 퐁에서 해냈다. 886년 2월 6일 밤, 센 강은 비 때문에 불어난 것으로 보인다. 강물은 기슭을 덮어 그 범위의 '가운데 구역'을 가져갔다. 이것은 물론 왼쪽 기슭에 있는 목조 경비탑을 고립시켜 도시의 사람들이 더 이상 탑에 있는 그들의 동포들을 지원할 수 없게 했고, 오직 12명이 남아있었다. 아침에 바이킹은 배로 목조탑을 포위할 수 있었다. 아보는 "그러고 나서 데인인은 마른 건초를 높이 쌓은 수레를 끌고 왔다"라고 회상했다. 그들은 불을 붙이고 가련한 탑에 밀어붙였다. 다리의 남은 부분으로 쫓겨난 12명의 수비병은 항복했지만, 결국 도살당했다.
바이킹은 단순히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이때까지 너무 많은 투자를 한 것이 분명했고, 그래서 도시의 포위는 비참하게 비틀거렸다. 포위군이 공성 램으로 문을 두드리는 동안 방어군은 끝에 날카로운 쇠 이빨이 달린 무겁고 단단한 나무로 된 안전한 축과 거대한 돌을 발사하는 망고넬로 성문을 방어했다. 봄에 비만왕 샤를(카롤루스 제국의 황제이자 서프랑키아의 왕)은 마침내 작센의 하인리히와 같은 형태로 도움을 보냈지만, 그는 포위를 해제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바이킹 야영지 주변에서 발굴된 3 피트 깊이의 말뚝이 가득한 참호에 부주의하게 말을 타고 들어갔다가 사망했다. 4월 16일 도시에서 발생한 역병이 고즐린 주교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그프리드 또한 이 사업에 질려버린 것이 분명했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에서 그와 그의 분견대가 떠나도록 설득하는 데는 단 60 파운드의 은이 필요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공격을 계속했고, 그래서 오도는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스칸디나비아인을 지나쳐 갔다.
그 해 여름 바이킹은 마지막으로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아보는 "도시의 치명적인 적들이 성벽을 둘러싸고 있어서 사방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라고 증언했는데, 이는 센 강 한가운데의 섬에 위치한 것을 볼 때 바이킹이 도시를 배로 에워쌌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노력은 부족했다. 비만왕 샤를은 마침내 10월에 도시를 구하기 위해 도착했다. 그의 해결책은 700 파운드의 은을 지불하고 부르고뉴로의 자유로운 통행을 위해 바이킹으로부터 몸값을 받는 것이었는데, 그 후 3년 동안 남아있는 노르드 약탈자들이 약탈을 자행했다. 파리의 요새화 된 다리가 정확히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이러한 결의는 기개가 없는 것으로 널리 간주되었고, 이듬해 가을 샤를은 카페 왕가의 조상인 파리의 오도 백작에게 밀려나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출처 : Weapons and War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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