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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중세유럽

동고트족 (Ostrogothi)

by 금곡동로사 2021.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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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은 카탈라우눔 들판에서 서로 싸웠다
537년 비잔틴군과 로마 시민이 방어하고 동고트족이 공격한 로마 공성전
5세기 야만인의 로마 침공.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발상지로 한 고트족은 두 집단으로 갈라져 제각기 왕국을 세웠다

 

동고트족은 "떠오르는 태양의 고트족," 또는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찬미된 고트족," 또는 단순히 "동고트족"을 의미하는 야만인으로, 후기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 작가들에 의해 1세기 초에 확인된 동고트족은 처음에는 서고트족을 포함하는 더 커다란 고트족의 일부였다. 3세기 동안 고트족이 로마 제국과 접촉했고, 종종 폭력적이기도 했다. 제국에 패배하여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한 고트족은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어 그들의 이후 역사는 갈라지게 된다. 서고트족뿐만 아니라 동고트족에게도 4세기와 5세기의 역사는 훈족의 이동과 훈족의 위대한 아틸라 제국의 흥망성쇠에 의해 형성되었다. 5세기에 재건된 동고트 부족은 왕이 이끄는 강력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이들 왕 중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에 참여하였고 5세기 말과 6세기 초에 이탈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테오도리쿠스의 자질과 그의 왕국의 힘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은 테오도리쿠스의 죽음 이후 오래가지 못했다. 530년대에 위대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476년부터 야만인의 지배하에 있던 서부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약 20년 동안, 유스티니아누스의 병사들과 장군들은 동고트족 군대와 싸워 결국 그들을 물리치고, 테오도리쿠스의 창조물을 파괴했으며 동고트족을 제거하여 역사 속의 민족이자 세력으로 만들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고트족 왕이 스칸디나비아에서 비스와 강어귀로 세 척의 배를 타고 백성을 이끌었던 BC 1490년에 고트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결국 고트족은 돈 강과 다뉴브 강 사이의 지역으로 이주하여 AD 3세기 중반에 훈족에게 쫓겨났다. 그러나 요르다네스와 같은 고대 역사가들이 남긴 고트족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고트족의 기원은 더 이상 스칸디나비아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고고학적 발견으로 정교하지만 문자가 없는 문화가 존재한 폴란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고트족이 이주하여, 후에 로마 제국과 접촉했다. 3세기에 고트족은 제국과 충돌을 반복했고, 약간의 승리로 이미 심각한 곤경에 처해있던 제국을 훨씬 더 큰 위험에 빠뜨렸다. 로마 황제들은 점차 전세를 역전시켰고 고트족을 거의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러한 패배의 결과로 290년경에 동고트 왕국을 세운 위대한 왕인 오스트로고타가 등장했다는 전승이 있다. 비록 오스트로고타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낮지만, 고트족이 두 집단으로 분열된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4세기에 두 집단, 즉 테르빙기족 또는 서고트족과 그레우퉁기족 또는 동고트족은 제국과 어느 정도 타협했다. 그러나 370년대까지 다양한 고트족 집단과 제국 간의 관계는 훈족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변화했다. 훈족이 도착하기 전에, 아말 씨족의 일원인 에르마나리쿠스 왕은 동유럽에 실질적인 왕국을 건설했다. 그는 훈족에 대한 투쟁을 이끌었지만 그들에게 패배했으며, 375년에 훈족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그의 후계자와 일부 고트족은 훈족에게 정복되어 흡수되기 전까지 훈족에 대한 투쟁을 1년 더 지속했다. 4세기 말부터 5세기 중반까지, 그레우퉁기족/동고트족은 훈족 제국의 일부로 남아 훈족의 가장 위대한 아틸라의 군대에서 싸웠다.

그러나 아틸라의 죽음 이후 동고트족의 운명과 구성은 변화를 겪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기의 동고트족이 동고트족으로 확인된 초기 집단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5세기 중반 아말 씨족의 발라미르 왕 치하에서 동고트족은 훈족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발라미르는 453년 아틸라의 죽음과 454년 네다오 전투에서 아틸라의 후계자가 패한 후 훈족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했다. 비록 발라미르와 그의 고트족이 다른 부족에 맞서 훈족과 함께 싸웠을 가능성이 높지만, 동고트족은 전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훈족이 붕괴하면서 독립적인 민족으로 부상했다. 발라미르는 그 후 다른 경쟁자들과 맞닥뜨렸고 붕괴하는 훈족의 추가 공격을 견뎌냈다. 그는 468/469년에 게피다이족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발라미르를 계승한 그의 형제 테오데미르는 추종자들을 로마 영토로 이동시켜 그곳에서 제국의 포이데라티(연합 동맹)가 되었으며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 또는 스퀸테르가 이끄는 또 다른 집단과 접촉하게 된다. 두 집단은 황제보다 우위를 점하고 특혜를 얻기 위해 서로 싸웠다. 그러나 제국은 이 기간 동안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470년대에 새로운 황제 제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권력을 잡았고, 476년 야만인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의 황제를 폐위하면서 황통을 끝냈다. 동고트족과 제국 내부의 이러한 변화는 동고트족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73년에 테오데미르가 죽고, 후에 대왕으로 알려지는 그의 아들 테오도리쿠스 아말이 계승했다. 그는 471년에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지명되기 전, 테오도리쿠스는 볼모가 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10년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테오도리쿠스는 제국과 그 관습 및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비록 그가 글 쓰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권력을 잡은 그는 471년과 474년에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다른 테오도리쿠스와 경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중에 일어난 반란은 새로운 황제 제노에 대항한 궁정 쿠데타의 일부였으며, 제노는 지원을 얻기 위해 아말 씨족에 의지했다. 동고트족이나 그들의 지도자 중 한쪽이 너무 강력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노는 협상 또한 시작하여 479년에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와 조약을 맺었다. 황제에 대항하여 서로 가까워지면서 두 테오도리쿠스의 적대관계도 잠시 진정되었다. 481년 스트라보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지만, 도시를 차지하거나 황제를 퇴위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말 뒷발에 걷어차여 날아가 걸어 둔 창에 찔려 죽었다. 테오도리쿠스 아말은 라이벌의 사망으로 수혜를 받았다. 스트라보의 아들 레키타코가 계승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점차 테오도리쿠스 아말에게 합류했으며 484년에 아말은 레키타고를 죽였다.

그에게 좀더 친숙한 이름을 부여한 테오도리쿠스 아말 또는 마그누스는 빠르게 제노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는 거대한 동고트족의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동고트족의 왕은 483년에 잠시 해결된 제노와 투쟁을 계속했고, 황제는 왕에게 크게 양보했다. 실제로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시민이 되어 파트리키 칭호를 받았고, 다음 해에는 집정관직을 수여받았다. 동고트족에게는 제국 내의 영토가 주어졌다. 그러나 제노는 떠오르는 테오도리쿠스의 힘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는 그를 대신하여 집정관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동고트족과 제국 사이의 새로운 적대감으로 이어졌다. 485년 테오도리쿠스의 반란은 제노에게 더 큰 압박을 가했고, 제노는 476년 이래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야만인 왕 오도아케르에 대한 공격 기회를 테오도리쿠스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테오도리쿠스가 479년에 처음 제안했던 이 임무는 왕과 황제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었고 테오도리쿠스는 재빨리 받아들였다.

488-489년에 테오도리쿠스는 약 10만 명에 달하는 동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에 맞섰다. 두 지도자 사이의 투쟁은 493년까지 지속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라이벌의 수도 라벤나를 점령할 수 없었던, 힘든 전쟁이었다. 실제로, 두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오도아케르는 수도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그는 전장에서 테오도리쿠스를 만나러 가는 모험을 했다. 오도아케르의 손은 테오도리쿠스에 합류했다가 함께 있던 고트족 전사들을 죽이며 오도아케르에게 다시 합류한 휘하 장군 중 한 명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 결과, 오도아케르는 공세를 취할 수 있었지만 테오도리쿠스에게 서고트족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잠시뿐이었다. 490년대 초에 테오도리쿠스는 점차 이탈리아를 장악하면서 오도아케르에게 협정을 맺도록 강요했다. 493년 2월 25일, 두 지도자는 조건에 합의하고 큰 연회에서 축하를 했다. 테오도리쿠스는 분명히 경쟁자와 권력을 나누기로 동의했지만, 그는 연회에서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테오도리쿠스의 추종자들은 오도아케르의 추종자들을 죽여 전쟁을 끝내고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테오도리쿠스에 가져다주었다.

승리 후 테오도리쿠스는 이탈리아의 왕으로 환영받았지만 처음에 그는 이탈리아 귀족들의 호의를 위해 그 칭호를 거절해야만 했다. 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재위 491–518)는 테오도리쿠스가 황제의 재량에 따라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함축적으로 독립적인 의미를 가진 왕의 칭호 승인을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테오도리쿠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왕으로 인정받았고 526년 사망할 때까지 이탈리아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이탈리아에 매우 유익했고, 그의 아리우스주의와 로마 카톨릭교에도 불구하고, 로마 원주민과의 관계는 대체로 좋았다. 그는 오도아케르처럼 전통적인 로마 행정의 많은 부분을 보존하고 원로원과 협력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식량 공급을 보장했고 문화 부흥의 일환으로 보이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를 후원했다. 그는 또한 라벤나에 그의 유명한 궁전과 영묘뿐만 아니라 공공 기념물과 교회들을 세우는 등 이탈리아 전역에서 활발한 건축자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이탈리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아프리카의 반달족과 스페인의 서고트족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는 야심 찬 외교 정책을 포함했다. 클로도베쿠스와의 경쟁에서 테오도리쿠스는 메로베우스 왕의 갈리아 남부 확장을 제한할 수 있었다. 비록 명목상 왕이었지만, 동시대의 사람들이 인정했듯이 테오도리쿠스는 어떤 황제보다도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테오도리쿠스의 말년과 그의 사후 몇 년은 증가하는 혼란으로 특징지어졌고, 결국 동고트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 상황은 부분적으로 동부 제국의 변화로 인한 것이기도 했고, 그의 실수 때문이기도 했다. 518년 새로운 황제 유스티누스가 즉위하면서 제국의 교리적인 불확실성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그는 전통적인 정통 가르침을 장려한 카톨릭 기독교 신자였고, 523년에 그는 제국에서 아리우스주의를 금지했다. 정통 가르침에 대한 지지와 교리의 안정은 제국의 지도력에 대한 이탈리아 민중의 믿음을 회복시켰다. 게다가 테오도리쿠스는 서고트족에 대항한 카톨릭 클로도베쿠스의 성공으로 인해 종교 문제에서 더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의 우려는 고문 보이티우스를 포함한 다수의 원로원 의원이 연루된 음모에 의해 고조되었다. 그는 보이티우스에게 처형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대사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막 돌아온 교황을 투옥시켰다. 이러한 행동들은 로마인 신하들과의 관계를 긴장시켰고 그의 계몽 통치를 어둡게 했다.

남자 후계자가 없는 테오도리쿠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는 죽기 직전에 추종자들에게 그의 손자 아탈라리쿠스의 섭정으로 미망인 딸 아말라스빈타를 받아들이도록 조장했다. 처음에는 테오도리쿠스의 소망이 받아들여졌지만, 점차 동고트족 귀족들은 아말라스빈타에게서 등을 돌렸다. 비록 그녀가 지성과 용기로 칭송받았지만, 귀족들은 그녀의 아탈라리쿠스 지도와 친로마 외교 정책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533년 아탈라리쿠스가 성년이 되었을 때, 많은 귀족들은 그가 모친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반란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아말라스빈타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지만, 결국 남아서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그녀는 왕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534년에 사촌 테오다하두스와 결혼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했고, 아탈라리쿠스가 같은 해에 사망했다. 6세기 비잔틴 역사학자 프로코피오스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내 테오도라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황제의 이탈리아 침공을 빌미로 삼아 그녀를 체포하고 살해했다고 한다.

 

535-554년 동고트 왕국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정복 캠페인


처음에는 벨리사리우스가, 나중에는 나르세스가 이끈 유스티니아누스의 이탈리아 침공은 동고트족 역사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534년부터 552년까지 지속된 고트 전쟁은 이탈리아와 동고트족 모두에게 치명적이었다. 전쟁의 시작 단계에서 테오다하두스의 약점으로 인해 침략군은 빠른 승리와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벨리사리우스는 536년에 로마에 도착했고, 테오다하두스는 비티기스를 위해 폐위되었다. 비티기스의 부상과 두 번째 비잔틴 장군 나르세스의 도착은 제국의 진척을 둔화시켰다. 나르세스가 소환되었을 때,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공세를 펼쳤고, 아마도 벨리사리우스가 황제 칭호를 수락하는 것을 포함하여 비티기스가 필사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내용은 불확실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540년에 소환되면서 동고트족의 왕을 데리고 갔다. 541년 비티기스를 대신하여 토틸라가 왕이 되었다.

토틸라의 지도 하에 동고트족은 성공적으로 반격하여 전쟁을 11년 더 연장시켰다. 토틸라는 비잔틴 군대에게서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고 544년에 벨리사리우스를 강제로 복귀시켰다. 545년 토틸라는 로마를 포위하기 시작하여 546년 그곳을 점령하는 과정 속에서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벨리사리우스는 보급품과 병사의 부족 때문에 그에게 큰 압력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짓지 못하고, 도시의 통제권은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양측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벨리사리우스는 548년 스스로 요청하여 귀국했고, 2년 후 나르세스로 교체되었다. 나르세스는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요구했고 그것을 손에 넣었다. 552년 나르세스가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승리하여 토틸라가 전사하고 고트족의 저항은 끝났다. 비록 토틸라의 뒤를 이은 후계자 왕과 동고트족 잔존 세력이 562년까지 저항했지만,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은 비잔틴 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졌다. 동고트족은 더 이상 독립된 민족이 아니었고, 마지막 동고트족은 아마도 568년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동안 랑고바르드족에게 흡수되었을 것이다.

 

 

 

출처 : Weapons and War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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