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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문명

로마 제국의 교역로

by 금곡동로사 2022.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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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이 건설하고 개발한 도로와 경로는 모든 민족을 연결하고, 가장 다양한 문화의 혼합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들이 거쳐간 모든 민족의 생활 수준을 높였다. 로마의 선전은 도로를 만든 사람에게 많은 공로를 돌리긴 했지만, 국가 간의 전체 연락망으로서 도로 시스템을 완성하고 통합하는 천재성이 없었다면 훨씬 더 느리고,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로마 무역로 및 각 지역의 주요 상품


로마인은 도로 건설에 대한 열정으로 세상에 더 나은 방향으로의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기에 현대인은 여전히 그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다.

AD 180년 로마 제국의 교역로

 

그리스와 인접한 대륙 영토의 교역로

그리스는 무역국으로서 작은 역할을 했다. 그 중요성은 그들이 동방과의 연결고리라는 사실에 있었다. 코린토스와 에그나티아 가도는 그 연결 고리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카이아 속주는 로마에게 별로 가치가 없었다. 제품은 오일, 와인, 꿀, 모직, 대리석, 말이다. 펠로폰네소스를 통과하는 길은 험난했고 종종 위험했다.

코린토스는 뭄미우스가 파괴한 지 한 세기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복구했다. 그곳은 두 바다 사이의 반도에 위치했기 때문에 번창하는 도시였다. 반도를 가로지르는 운하는 코린토스의 번영이나 그리스의 빈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테네는 하드리아누스의 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코 예전의 화려한 중심지가 아니었다. 항구는 거의 폐허가 되었고, 수출하는 물품도 적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외곽에 있는 그리스의 주요 도로는 북방의 에그나티아 가도를 삼면 중 하나로 하여 대략적인 삼각형을 이루었다. 삼각형의 서방에는 니코폴리스, 아폴로니아, 디라키움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오는 배들의 정기적인 기항지였다.

에그나티아 가도는 아폴로니아와 디라키움에서 동쪽의 비잔티움을 향해 이동했다. 여행자들은 종종 네아폴리스에서 여행을 멈추고 소아시아로 가는 배를 탔다.

수익성 있는 광산은 마케도니아(필리포이 지역)와 다키아에 존재했다. 그리스에서 다키아로 가는 고속도로는 테살로니카에서 에그나티아 가도가 갈라졌다.

비잔티움은 상업 및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AD 73년까지 자유 동맹 도시였던 이곳은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트라키아의 일부가 되었다.

 


소아시아의 교역로

소아시아는 BC 129년에서 AD 63년 사이에 로마가 획득했다.

 

세 개의 주요 동서를 잇는 간선도로는 자연이 깔아놓은 길을 따라갔다.

 

소아시아 지역의 주요 로마 가도. 지선 도로는 표시하지 않음


1. 남부 도로(에페소스 - 마그네시아 - 마이안드로스 유역에서 리코스 지류의 라오디케아 - 아파메아 -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 이코니움 - 티아나 - 타르수스)
2. 중앙 도로(사르디스 - 헤르모스 유역을 따라 - 안키라까지 북쪽으로 - 유프라테스의 멜리테네). 이후 이 경로의 종착지는 사르디스가 아닌 에페소스였다.
3. 북부 도로(니코메디아 - 클라우디오폴리스 - 크라테아 – 아마세아 - 코마나 - 니코필리스 - 사탈라). 그다음 아르메니아로 이어진다. 니코메디아에서 남쪽으로 안키라에 이르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남부 도로는 상업 고속도로로서, 북부 도로는 군사 고속도로로서 가장 중요했다. 중앙 도로는 세 곳 중 가장 중요도가 낮았다.

흑해에서 시모페와 아미소스를 연결하여 타르수스에 이르는 남과 북을 잇는 멋진 고속도로가 펼쳐졌다.

소아시아의 주요 도시

· 에페소스 (타우루스 산맥 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
· 타르수스 (세계의 모든 도시와 상업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레그마 호수의 멋진 항구)
· 니코메디아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의 소아시아 주도 도시)


주요 상품 : 와인, 생선, 과일, 목재, 양모(및 2차 생산품), 대리석, 일부 금속, 특히 구리

모든 도로의 재편은 도미티아누스 치세에 이루어졌다. 플라비우스 황제들은 군사적인 이유로 북방 도로에 관심을 가졌고, 네르바와 그의 후계자들도 그들의 관심을 이어받았다.

특히 키지코스, 미틸레네, 키오스, 스미르나, 에페소스, 밀레토스, 로도스가 위치한 서해안을 따라 교통량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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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가는 실크로드

비단과 비단길에 대한 로마의 관심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시작되었다. 티베리우스의 치세에 이르러, 비단의 사용은 부유한 계층 사이에서 널리 확립되었다.

중국으로 가는 최초의 실크로드 탐사는 BC 20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일하던 그리스 탐험가들은 칸다하르에 도착했고, 카락스의 이시도로스도 마찬가지였다. 마이스 티티아누스의 요원들은 탐사(AD 120년경)를 계속했고 카슈가르에서 몇 마일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다. 나중에는 로프노르와 미란에서도 서양인 여행객을 볼 수 있었다.

 

고대의 실크로드


최초의 실크로드 : 제우그마 - 셀레우키아 및 크테시폰 - 자그로스 산맥을 가로질러 카스피해 관문 - 헤카톰필로스 - 메르브 - (두 길 중 하나를 통해 [사마르칸트 - 카슈가르(Kashgar) - 미란(Miran) - 로프노르(호수 서안에 누란(Loulan)이 위치)] 또는 [박트라 - 스톤 타워 - 카슈가르 - 미란 - 로프노르])

셀레우키아 및 크테시폰은 무역로에서 운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큰 이점을 누렸다. 셀레우키아는 두 토대 중 더 컸다.

박트라는 로마 제국과 접촉하기 전 수 세기 동안 위대한 무역 중심지였다. 아시아에서의 위치를 시각화하려면, 바퀴살처럼 파르티아, 옥서스 강, 인더스 유역, 중국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뻗어 나가는 바퀴의 중심이라고 상상하면 된다.

로마인은 중국인과 제대로 된 친분을 쌓지 못했다. AD 97년 중국이 파르티아와 시리아에 대사를 파견하면서 서방세계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중국으로 가는 두 번째 육지 경로는 파르티아인을 피할 필요성 때문에 개발되었다. 코스는 소아시아 해안에서 파시스 - 키루스 (평행 계곡들 참고) - 카스피해 - 옥소스 강 - 사마르칸트 또는 박트라까지 이어졌다.

카스피해 및 그 주변의 땅에 대한 탐사는 AD 150년에 완료되었다. 스르다리야 강의 동쪽과 북쪽의 땅은 로마 제국 시대에는 탐험되지 않았다.

누에는 AD 6세기에 중국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전해졌다. 장래의 유럽 및 서아시아 누에는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시리아의 교역로

시리아의 상업적 중요성은 자원이 아니라 위치 때문이었다. 이 지방은 "동방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도로 시스템은 로마가 점령하기 훨씬 전에 완성되었다. 아마 소아시아를 제외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고속도로가 지형의 특성에 따라 방향이 통제되었을 것이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3대 고속도로는 다음과 같다.

 


1. 가자에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와 안티오키아로 가는 해안도로
2. 카이사레아에서 해안을 떠나 요단 강 상류, 리타스 및 오론테스 강 유역을 따라있는 길
3. 페트라 - 다마스쿠스 - 팔미라 - 유프라테스 도로

 

페트라에서 팔미라와 안티오키아는 시리아와 아라비아 및 극동을 연결하는 경로를 시작했다.

풍부한 토종 자재가 도로 매설 작업을 쉽게 만들었다. 트라야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고속도로에 많은 개선 사항을 추가했다.

시리아의 주요 항구는 카이사레아, 티레, 시돈, 베리투스, 아라두스, 라오디케아, 셀레우키아였다. 티레와 시돈은 염료와 유리로 유명했다.

시리아의 주요 도시는 안티오키아, 다마스쿠스, 팔미라, 페트라였다. 마지막 두 곳은 트라야누스 치세에 로마의 통제하에 놓였다.

이집트의 교역로

이집트에서 가장 큰 교통로는 나일 강이었다. 이집트 첫 번째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이기도 했다.

이집트가 생산할 수 있는 곡물의 양과 후기 통치자들의 무능함은 나라를 로마의 손에 넘어가게 했다.

나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교통은 시에네에서 멈췄다. 이티오피아 물자는 육로로 운반될 수 있었지만 홍해를 통해 더 쉽게 북쪽으로 운반되었다.

나일 강 배는 다양하고 특이한 유형이었다. 무거운 짐의 경우, 바리스를 사용했다.

삼각주에서 운하가 도로를 대신했다

이집트인은 교통량이 페르시아만-유프라테스 항로를 떠나 홍해-나일 항로로 향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나일 강과 홍해 사이의 연결을 개선했다.

프톨레마이오스 강(트라야누스 강)은 동쪽 종점이 위험한 홍해 수역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낙타는 로마 시대에만 운송 동물로 흔했고 상인들에게 큰 이점은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장소는 그 장점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도시의 좋은 항구 세 개 중, 마레오티스 호수에 있는 항구가 가장 번창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출용으로 제조된 물품은 종이, 유리, 모직, 리넨 및 연고 등이 있었다. 이집트 도시는 세계의 모든 부유한 도시들이 중개 무역으로 번영을 얻었다는 법칙의 예외였다.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사이를 항해하는 배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컸다. 그린 선박은 특히 잘 건조되고, 인력과 방비가 잘 되어 있었다.

지중해 항해 계절은 3월 10일부터 11월 10일까지였다. 7월 중순까지 배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이탈리아로 항해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소아시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는 항로를 따랐다. 보통 여름 항해 기간은 18-20일 사이였고, 겨울 항해는 40일이 필요했다.

 


인도와 실론으로 가는 바닷길

인도와 서방을 오가는 배들은 제국 초기에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이 제한되었다. 따라서 중개상들은 해안을 따라 지나다니는 동서양 무역을 희생시키면서 번창했다.

동방으로의 로마 교역로를 획득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로마 시대 아덴만과 주변 지역


1. 아우구스투스 치하 - (아일리우스 갈루스 및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아덴을 공격하려는 시도
2. 클라우디우스 치하 - 아덴 약탈
3. 네로 치하 - 시아그루스 곶의 점령


아덴만과 인도 사이의 바다를 직접 가로지르는 항로 개발

1. 아덴에서 인더스까지 히팔로스의 항해
2. 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 시아그루스 곳으로부터 자이가르로 항해
3. 이후 아덴에서 무지리스(날킨다 또는 바라케가 상륙하기 더 좋은 지점)까지 항해


인도와 서방 사이의 해안 교통의 지속. 인도로의 해안 항해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페리플루스 마리 에리트라이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 제품 : 목재, 면화, 비단, 상아, 보석, 쌀, 기(버터기름), 후추, 향신료.

타밀(인도) 해안과 로마 사이의 항해에 필요한 시간 - 16주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3주, 알렉산드리아에서 홍해 항구까지-이집트 또는 나바테아 항구에서 오켈리스까지 4주, 아덴만에서 무지리스까지 6주)

로마 시대에는 타밀인이 섬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론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인도 동부 해안의 탐험은 주로 AD 2세기에 진행되었다. 일부 선박은 중국에 도착했지만, 그 나라와의 해상 무역은 발전하지 못했다.

3세기 인도와의 교역이 쇠퇴한 것은 3세기에 국가에서 로마 주화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1세기와 2세기 로마 주화는 무역이 처음에는 진주 및 향신료 지역인 인도 남부로, 그다음에는 면화 지역인 인도 북부로 향했음을 보여준다.

 

 

 

출처 : Vivid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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