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붐비는 신비로운 도시 중 하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공동 수도로 세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를 추종하는 상속자였다.
이 글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도시를 세운 330년부터 시작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1453년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채울 만큼 긴 이야기를 블로그 포스트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역사적인 건물들을 통해 비잔틴 제국과 그 영원한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사(小史)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이스탄불에서는 이러한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고대 말과 중세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이스탄불은 지중해 동부 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하여 지리적 발견이 있을 때까지 이 양상을 유지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 제국이 몰락할 위기에 처한 시기에 공동 수도로 선포되었고 갑자기 제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비잔티움에서 잠재력을 발견하고 324년에서 330년 사이에 재건하여 "새로운 로마"로 탈바꿈시켰다. 도시는 나중에 설립자를 기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되었다.
라틴추종 또한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황제들과 함께 이동했다. 하지만, 비잔티움은 고대 그리스의 유산이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 황제들을 헬레니즘화 했다.
이 글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를 간략하게 들려주기 위해 여러 교회와 궁전, 기념물 등을 나열했다. 글에서 로마 건축물은 대체로 연대순을 따르지만, 그중 몇 가지에는 사소한 변화를 가했다.
일부 구조물(예. 하기아 소피아)은 한 번 이상 지어졌다. 반면에, 그중 일부는 제국의 특정 시기에 중요성을 얻었다. 그리고 그 외 건물들은 도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과 동일시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통치자와 성직자들을 강조하기 위해 연대표를 바탕으로 몇 개의 구조물을 배치했다. (예. 하기아 에이리니와 스투디오스 수도원).
제목 중 일부는 심지어 비잔틴 건축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충분히 중요하다. 그중에 갈라타 타워와 루멜리 요새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 글은 이스탄불에 있는 비잔틴 유적지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이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비잔틴 제국 역사에서 이러한 구조물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 콘스탄티누스 포룸
콘스탄티누스 포룸은 300년대 로마 제국의 위대한 변혁을 가장 잘 묘사한 장소 중 하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세 동안 기독교가 부흥하면서 로마의 중심지는 동방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주요 개혁에 사회가 적응하기 위한 과도기가 있어야 했다.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이교도였던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포룸에 세워진 콘스탄티누스 동상으로 구현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부에 있는 광장에는 태양신 아폴로를 닮았지만 십자가를 손에 들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동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제국의 기독교화는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까지 반세기가 걸렸다.
2. 대궁전
대궁전은 로마 제국의 찬란함을 반영하는 장소였다. 황제들은 거의 천 년 동안 이곳에 살았다. 궁전에서 히포드롬의 황실 스탠드까지 이어지는 복도가 있었다.
대궁전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확장되었고 많은 새로운 건물들이 추가되었다. 이는 고대 말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표하는 궁전이었다.
대궁전은 13세기부터 버려졌고, 후기 비잔틴 황제들은 골든 혼 해안에 있는 블라케르나이 궁전에 지냈다. 궁전을 장식하는 바닥 모자이크 중 일부는 오늘날 대궁전 모자이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3. 메세(Mese)
메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강처럼 흐르는 로마의 도로였다. 메세는 하기아 소피아와 매우 가까운 밀리온 스톤에서 시작하여 도시의 정문인 금문까지 확장되었다.
메세는 도시의 가장 중요한 광장인 콘스탄티누스 포룸과 테오도시우스 포룸을 통과했다. 승리한 황제들은 금문을 통해 도시로 들어가 이 길을 따라 하기아 소피아까지 나아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축하 행사가 이 길의 광장에서 열렸다. 황제들이 죽으면 메세에서 옮겨져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4. 성사도 교회
성사도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이 교회는 기독교화된 로마의 강력한 상징이었고 일부 사도들의 유물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했을 때, 그는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그의 유명한 후계자 아나스타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헤라클리우스도 이곳에 묻혔다.
6세기에 3대째 하기아 소피아가 지어지기 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큰 교회로 남아 있었다. 도시의 중요한 총대주교 중 일부도 여기에 묻혔다.
5. 발렌스 수도교
발렌스 수도교는 수자원이 제한적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생명을 불어넣은 구조물이었다. 수도교의 건설은 고트족과 싸우다 죽은 발렌스 황제 치세에 완성되었다.
기사의 처음 네 개의 제목에서, 우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핵심을 이루는 초기 시대의 건축물들을 열거했다. 이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에 도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자 로마 귀족들이 이곳에 몰려들었고 도시의 인구는 갑자기 증가했다. 하지만, 도시의 수자원이 부족했다. 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거대한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발렌스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충분한 물을 얻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로마는 위기에 처했고 무너질 뻔했다.
6. 테오도시우스 기둥
테오도시우스 기둥은 사실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이다. 화강암 기둥에는 파라오 투트모세 3세의 승리를 묘사하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실제로 높이가 35 미터였고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운반되던 중 부서졌다. 기둥의 상부 20 미터는 오늘날 이스탄불에서 볼 수 있다.
로마를 멸망에서 구한 테오도시우스 대제를 언급하기 위해 이 오벨리스크를 목록에 추가했다. 발렌스가 죽은 후의 혼란을 끝내고 로마에 안정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기독교화는 테오도시우스 재위 동안 가속화되었다. 니케아 공의회와 함께 세워진 교회 체계도 합병 정리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이교도들이 과거 기독교인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또한 단일 로마의 마지막 황제였다. 395년 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영구적으로 동서로 나뉘었다.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 통치)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림)의 초대 황제였다. 그의 다른 아들 호노리우스는 서로마의 통치자였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이 곧 무너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일한 세력으로 남았다.
7. 하기아 소피아
하기아 소피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에 처음 지어졌다. 당시 이 건물은 하기아 에이리니를 포함하는 복합 단지의 일부였으며, "거대한 교회"를 의미하는 메갈리 에클리시아라고 불렸다.
하기아 소피아는 분명히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귀중한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1대 하기아 소피아는 도시 역사상 첫 번째 대규모 반란 동안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 반란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성직자였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유배에서 비롯되었다. 유명한 대주교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의 생활 방식을 비판했다.
비록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유배 중에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를 통해 잊히지 않았다. 로마에 기독교가 들불처럼 번진 세월 동안 설교로 큰 족적을 남긴 초기 교회 교부였다.
8. 테오도시우스 성벽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존속을 천 년 동안 보장해준 방어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대포의 발달로 성벽이 허물어지면서 도시는 역사가 되었다.
오늘날,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존재했던 이스탄불의 일부는 역사적 반도로 알려져 있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한쪽에서만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사두정치 시대 내전의 마지막 전투인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비잔티움을 수도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의 적수 리키니우스의 비잔티움 방어에서 영감을 받았다.
당시 로마의 주요 적이었던 야만인들은 해군이 없었기에 비잔티움의 서쪽에 튼튼한 성벽을 쌓아 적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설적인 성벽은 콘스탄티누스 통치를 지나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에 걸쳐 여러 세대 동안 건설되었다. 완성된 성벽은 훈족, 아바르족, 아랍인, 불가르족의 공격을 견뎌냈다.
9. 킨스테르나 테오도시우(테오도시우스 저수조)
테오도시우스 저수조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물을 공급한 수십 개의 저수조 중 하나였다. 이 수조를 특별히 주목한 이유는 최근에 박물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이스탄불에 중요한 건축 공헌을 한 통치자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테오도시우스 저수조와 도시 성벽이 건설되었다. 게다가, 하기아 소피아는 완전히 재건되었다.
그가 지은 2대째 하기아 소피아는 또 다른 반란으로 파괴되어 오늘날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2세와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여한 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0. 성 세르기우스와 바쿠스 교회
세르기우스와 바쿠스 교회는 비잔틴 제국의 가장 유명한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지어졌다. 이 교회가 세워진 이유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사 내내 지속된 권력 투쟁 중 하나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임자 유스티누스 1세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가 엑스쿠비토레스(제국 근위대)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제위를 계승했다. 이는 도시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발렌티니아누스 가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가문의 아니키아 율리아나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제위 계승에 반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전설적인 교회를 세웠다. 비록 성 폴리육토스 교회는 남지 있지 않지만 웅장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아내 테오도라는 아니키아 율리아나의 도전에 대응하여 세르기우스와 바쿠스 교회를 세웠다. 이 건물에 사용된 몇몇 기술들은 마지막 하기아 소피아에 대한 용례가 되었다. 그래서 이 건물은 이스탄불에서 "작은 하기아 소피아"로 알려져 있다.
11. 콘스탄티노폴리스 히포드롬
콘스탄티노폴리스 히포드롬은 1,000년 동안 비잔틴 수도의 오락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열린 전차 경주는 약 5만 명이 관람했다.
히포드롬은 원래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지어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첫 건축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히포드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일어났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사상 가장 큰 반란은 532년 1월 13일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항하여 봉기하는 동안,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건물들은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탔다. 여기에는 하기아 소피아와 제우시푸스 목욕탕과 같은 상징적인 건축물들이 포함되었다.
반란은 38년간 통치한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 5년에 일어났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잔틴 장군인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4만 명을 죽이고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비록 니카 반란은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대한 건축 변혁을 촉발했다. 재건된 3대째 하기아 소피아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2. 바실리카 저수조
바실리카 저수조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대궁전과 주변 황실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비잔틴 수조였다.
바실리카 저수조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지하 궁전이라고 부를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다. 니카 반란 이후 유스티니아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작한 위대한 재건 과정의 일부였다.
13. 고트족 기둥
고트족 기둥은 톱카프 궁전 옆에 있는 귈하네 공원에 위치해 있다. 비록 이 기둥은 도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대다수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잔티움의 절정기를 나타낸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동로마 황제였고 자신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의 상속자로 여겼다. 이탈리아가 없는 로마 제국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장군 벨리사리우스, 문두스, 나르세스는 6세기에 서유럽을 재정복 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오랜 투쟁 끝에 이탈리아는 물론 스페인 남부까지 탈환했다.
고트족의 패배와 고대 수도 로마의 탈환은 대성공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한 곳에 고트족 기둥이 세워졌다.
14. 금문
금문은 비잔틴 제국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를 상징한다. 벨리사리우스가 로마를 탈환했을 때, 그는 이 문을 통해 도시로 들어갔고,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
반면에 헤라클리우스는 로마의 최대 숙적 페르시아를 물리쳤을 때 이 문을 통해 도시로 진입했다. 비잔티움의 모든 전사 황제들은 자랑스럽게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의 말년에 도시를 강타한 흑사병은 제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비록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리우스의 통치 동안 일시적으로 회복되었지만, 쇠퇴가 시작되었다.
15. 코라 교회
코라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보호하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바로 옆에 있었다. 원래 수도원이었던 코라 교회는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비잔틴 모자이크들의 보금자리이다.
비잔틴 제국의 쇠퇴기에 도시는 페르시아인, 아랍인, 아바르족, 불가리아인에게 여러 번 포위되었다. 그런 때 교회 안에 있는 호데게트리아(성모 마리아 이콘)가 성벽을 돌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랍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도시의 물리적인 방어를 제공한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수호자로 믿었던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성스러운 이콘이 영적 방어를 제공했다.
16. 스투디오스 수도원
스투디오스 수도원은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 기관 중 하나였다. 수도원의 수도원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스투디오스 수도원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시기는 비잔틴의 성상 파괴 운동이었다. 레온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비잔틴 수도원들과 그들의 이콘들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는 동안, 스투디오스의 성 테오도로스는 그들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아랍과의 계속되는 전쟁과 600년대의 대규모 영토 손실은 비잔틴 제국을 소진시켰다. 황제들은 이 시기 국가의 권위를 무색하게 하는 수도원들을 목표로 삼았다.
수도원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제국 전역에서 이콘이 금지되었다. 성상 숭배자들과 성상 파괴자들의 투쟁이 8세기를 장식했다. 반면에 스투디오스 수도원은 그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다.
17. 하기아 에이리니
하기아 에이리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였다. 하지만, 폭동으로 여러 번 불에 탔고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교회는 성상파괴 시대의 건축 양식을 반영한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교회는 성상 파괴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콘스탄티노스 5세 시대에 완전히 재건되었다. 이런 이유로 평범한 십자가 모양만 포함되어 있다.
비잔틴 제국은 역사적으로 종교적 모자이크로 유명하다. 성상 파괴 운동은 제국의 초기 예술을 파괴했다. 그러나 결국, 100년이 넘는 투쟁 끝에 성상 숭배자들이 승리했다.
그리하여, 이스탄불의 역사적인 건물에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비잔틴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18. 미렐라이온 수도원
미렐라이온 수도원은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에 지어진 교회 중 하나이다. 로마노스 1세와 그의 가족을 위해 지어진 이 교회는 후기 비잔틴 건축의 훌륭한 예 중 하나이다.
마케도니아 왕조는 867년 바실레이오스 1세에 시작되어, 1025년 바실레이오스 2세가 죽을 때까지 비잔티움의 마지막 전성기를 주었다. 이 시기의 군사적, 경제적 성공은 비잔틴 르네상스를 촉발했다.
마케도니아 왕조는 처음에는 페르시아와 그다음에는 아랍인과의 싸움으로 지쳐있던 비잔티움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게다가, 성상 파괴 운동 동안 쇠퇴했던 비잔틴 예술이 부활했다.
19. 블라케르나이 궁전
블라케르나이 궁전은 후기 비잔틴 황제들의 거주지였다. 골든 혼 해안에 위치한 궁전은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인접해 있었다.
동로마 황제들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수세기 동안 대궁전에 살았다. 그러나 11세기부터 대궁전은 구식이 되어 선호되지 않게 되었다.
이 새로운 궁전의 벽은 부조로 장식되었고, 기둥은 금과 은으로 장식되었다. 궁전의 웅장함은 당대 역사가들에 의해 극찬을 받았다.
20. 파나기아 무클리오티사
파나기아 무클리오티사는 비잔틴 시대의 작은 교회 중 하나이다. 이것은 몽골의 통치자 훌라구 칸의 신부였던 마리아라는 이름의 비잔틴 공주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비잔틴 제국은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 느리지만 꾸준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수세기 동안 페르시아와 아랍인들과 싸운 후, 비잔티움은 이제 새롭고 매우 위험한 적이 생겼다. 셀주크 튀르크는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이후 비잔티움의 심장부인 아나톨리아로 진군했다.
셀주크 제국에 대항하여 몽골과 동맹을 맺기를 원했던 비잔틴인은 위대한 칸에게 신부를 주었다. 남편이 죽은 후, 마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자신의 교회에 은거했다.
현지 언어로 불리는 몽골의 성 마리아 교회는 이스탄불에서의 페네르 발라트 도보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비잔틴 유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21.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 수도원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교회였다. 교회는 세 개의 별도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후기 비잔틴 황제들의 매장 예배당이었다.
이 교회는 콤니노스 왕조가 통치하던 12세기에 지어졌다. 콤니노스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일어난 해에 비잔티움을 통치했다. 십자군의 도움으로 그들은 튀르크로부터 아나톨리아의 많은 지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십자군과의 동맹은 비잔틴 제국을 위한 불장난을 의미했다. 현명한 콤니노스 가문은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애썼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원정이 진행되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22. 테오토코스 키리오티사
테오토코스 키리오티사는 5개의 다른 시기 건물들이 있는 매우 오래된 교회이다.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교회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십자군 원정은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에 진입하면서 촉발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1-3차 십자군 전쟁에서 영토의 보전을 유지했고, 라틴군대의 도움으로 셀주크 튀르크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다.
하지만, 제4차 십자군은 비잔티움에 재앙을 가져왔다. 십자군 사령관인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적이었으며 비잔티움의 혼란을 이용하여 수도를 약탈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약탈은 1204년에 일어났다. 이 날에 세워진 라틴제국은 1261년까지 존속했다. 비잔틴은 결국 수도를 탈환했지만, 도시는 이제 황폐해졌다.
테오토코스 키리오티사 교회(현재 칼렌데르하네 모스크)에는 라틴인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프레스코화들이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묘사한 이 작품들은 프란치스코회 사제들이 교회를 사용하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23. 갈라타 탑
갈라타 타워는 제노바 식민지가 골든 혼 해안에 세운 망루였다. 오늘날, 이 탑은 이스탄불의 가장 상징적인 역사 기념물 중 하나이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식민지는 수세기 동안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존재했다. 정교회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 안에 사는 동안, 골든 혼의 맞은편 기슭에는 카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지중해 동부 무역의 중심 항구였기 때문에 실크로드의 상품이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이탈리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참사로 인해 베네치아인은 도시에서 쫓겨났다. 어쨌든, 침략한 십자군은 베네치아 도제가 이끌었다. 반면에 제노바인에게는 추가적인 특권이 주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항구를 지배하던 갈라타 지구는 이제 완전히 제노바인의 소유가 되었다. 제노바인은 또한 갈라타 탑과 요로스 성과 같은 장소들을 건설함으로써 그들의 군사력을 증가시켰다.
제노바인은 그들에 대한 비잔틴인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탄불이 오스만에게 포위되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했다. 오스만 제국의 첫 번째 시도는 격퇴되었지만, 그 끝은 불가피했다.
24. 루멜리 요새
루멜리 요새는 사실 비잔틴 건축물이 아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목록에 포함시켜야 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이 성이 역사의 흐름을 바꿨기 때문이다.
오스만은 술탄 바예지드 1세와 무라트 2세의 통치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지중해와 흑해에서 기독교인의 원조도 한몫했다.
메흐메트 2세가 아직 어린 왕자였을 때, 그는 왜 그의 아버지(무라트 2세)가 실패했는지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흑해에서의 지원을 막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에 거대한 요새를 지었다.
루멜리 요새에 배치된 거대한 대포는 흑해에서 베네치아 선박들이 도우러 오는 것을 막았다. 이는 1453년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할 수 있게 만들었다.
25. 골든 혼 사슬
골든 혼 사슬은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가장 상징적인 조각 중 하나였다. 이 사슬은 페르시아, 아랍, 튀르크의 해군이 수세기 동안 도시를 포위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1453년 최후의 공성전에서 정복자 메흐메트는 기름칠한 썰매에 태운 오스만 갤리선을 육로로 몰고 가서 골든 혼까지 내렸다. 이는 천사들이 도시를 지키고 있다고 믿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공성전에 저항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5월 29일에 함락되었다.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선포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다시 한번 떠오르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 도시는 바로 "이스탄불"이 되지는 않았다. 도시는 세월 동안 콘스탄티니예(이름의 터키어 버전)로 알려졌다.
출처 : IstanbulC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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