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장군이자 뛰어난 전술가인 한니발 바르카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로마가 두려워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고대 로마의 군사력과 패권은 대중의 의심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BC 3세기 대부분 동안, 로마는 또 다른 강력한 지중해 국가 카르타고와 일련의 투쟁을 벌였다. 그 갈등 중 가장 잔혹했던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를 역사상 가장 큰 위험에 빠뜨렸다. 로마가 결국 승리했지만,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를 계획한 한니발 바르카를 결코 잊지 않았다.
거의 20년 동안, 한니발은 로마인과 싸웠다. 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가 생존을 위해 싸우도록 강요했다. 한니발이 우세한 적들을 제압하고 무찌르기 위해 일련의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면서, 그를 상대하기 위해 보낸 모든 군대는 소멸되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로부터 필요한 지원이 없었고, 로마가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에서 그의 전술을 차용하면서 한니발은 결국 패배했다. 로마로부터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한니발은 헬레니즘 왕들의 여러 궁정에서 말년을 보냈다. 죽음에서, 그는 로마인이 그들의 최악의 악몽을 잡기 전에 독약을 먹음으로써 다시 한번 적을 압도했다.
한니발 바르카의 유년 시절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스페인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아홉 살 난 아들을 카르타고의 신전으로 데려가 로마에 대한 영원한 적개심을 맹세하게 했다. 이 유명한 에피소드는 한니발의 성격과 그의 평생 숙원인 신생 공화국을 패배시키고 굴욕을 주고 카르타고를 위대하게 회복시키는 것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이긴 쪽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아있는 카르타고 사료들은 없다. 한니발의 생애와 전쟁에서의 그의 역할을 기록한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어쨌든 로마를 섬겼다.
명백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을 수 있다. 한니발의 가문 바르카(또는 바라크)는 카르타고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였다. 그들은 또한 로마의 맹렬한 적이었다.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저명한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20여년에 걸친 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고, 부유한 시칠리아 섬을 포함한 해외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게다가, 카르타고는 로마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조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오늘날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카르타고의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역은 자원이 풍부했고, 이베리아 금광과 은광은 로마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카르타고 군대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하밀카르는 BC 237년에 어린 아들과 함께 이 임무를 위해 떠났다. 한니발이 고향 도시를 다시 보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9년 동안 하밀카르는 이베리아에서 원정을 벌여, 카르타고의 범위를 반도 깊숙이 확장했다. 한니발의 어린 시절은 군사 캠프에서 보냈고, 18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군대를 지휘했다. BC 228년 그의 아버지가 죽고 7년 후 그의 형제가 사망하면서 한니발은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카르타고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겨우 26살이었다.
한니발은 빠르게 스페인에서 권력을 공고히 했고, 해안 도시 카르타헤나(새로운 카르타고)를 가문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바르카 가문의 통제되지 않은 급속한 영향력 확장은 로마 원로원을 우려하게 했고 조치를 결단하게 했다. 이 지역에서 한니발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로마는 사군툼 시와 동맹을 맺었다.
이전의 조약에 따르면, 에브로 강은 로마와 카르타고 세력권 간의 경계선 역할을 했다. 사군툼은 에브로 강 남쪽 먼 곳에 있었고, 한니발은 이를 조약 위반으로 간주했다. 그는 도시를 포위하고 8개월 만인 BC 219년에 도시를 점령했다. 로마는 이 기회에 달려들며 카르타고에 한니발을 고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불리한 전략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로마 해군의 패권은 바다로부터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았고, 로마 군단은 그의 군대보다 훨씬 많았다. 평범한 지휘관이라면 방어 전략을 택하여, 에브로 강을 강력한 요새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니발 바르카는 다른 종류의 지도자였다. 사실, 그는 군사적 천재였고, 그의 재능을 가능한 한눈에 띄는 방법으로 세상에 보여주려 했다. 한니발은 안방에서 적을 공격하여 전쟁을 이탈리아로 가져왔다.
BC 218년 늦은 봄, 한니발과 그의 군대는 에브로 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 여정은 쉽지 않았다. 피레네 산맥에서 적대적인 부족들에게 승리를 거둔 후, 한니발은 일부 부대를 분리하여 통로를 지키고 후방을 보호했다. 사료에 따르면, 한니발은 40,000명의 보병, 12,000명의 기병(유명한 누미디아 기병 포함), 38마리의 전쟁 코끼리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에 진입했다. 한니발은 갈리아인과 싸우는 대신, 지역 지도자들과 거래를 하고 로마군이 그의 진격을 저지하기 전에 론 강을 건넜다. 10월 말, 한니발은 로마군을 성공적으로 회피하고 적대적인 원주민들을 제압하여 알프스 산기슭에 도달했다.
적이 벗어난 사실을 알게 된 로마군은 다음 봄을 대비하여 방어를 준비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정신 나간 사람만이 연말에 알프스 고개를 넘는 모험을 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로마인에게 불행하게도,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미친 사람이었다. 그의 알프스 모험은 전설의 소재가 되었다. 군대는 넘기 전에 모든 공성 병기와 보급 수레 열의 일부를 포기하고 진격을 시작했다. 횡단은 길고 힘들었다. 군대는 혹독한 겨울 환경, 거친 지형, 눈사태, 눈보라, 영하의 기온을 견뎌야 했다. 그동안 내내 길게 늘어선 부대는 산에 사는 적대적인 부족들의 공격에 직면했다. 식량은 부족했고, 일부 병사들은 반란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니발은 불가능한 일을 해냈고, 17일 후 포 강 유역에 시련을 겪은 종대의 전면이 나타났다.
칸나이의 전주곡
한니발 바르카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지만 거의 모든 코끼리를 잃었고, 남은 병력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카르타고 장군에게 운 좋게도 지역 부족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외교와 무력의 혼합을 통해 한니발 군대는 빠르게 보충되어 전투 준비를 마쳤다. 그들의 문 앞에 갑작스러운 적대 세력의 출현은 로마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재빨리 행동했고, 스키피오 장군(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을 보내 그들을 가로막았다. BC 218년 11월, 양측 군대는 티키누스 강에서 만났다. 로마군은 패배했고 중상을 입은 스키피오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니발이 로마를 최악의 순간으로 몰아넣은 이탈리아에서 거둔 많은 승리 중 첫 번째였다.
티키누스는 카르타고의 작은 승리였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전조였다. 한 달 후, 트레비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많은 로마군이 살기 위해 도망치다가 죽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얼음같이 차가운 강에서 익사했다. 한니발의 몇 천명에 비해 로마군은 2만-3만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트레비아 전투는 지역 부족들 사이에 승전 소식이 빠르게 퍼지면서 한니발의 대의에 합류함에 따라 한니발의 대성공이었다. 곧 새로운 승리가 뒤따랐다.
BC 217년 봄, 한니발은 아펜니노 산맥을 지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주요 경로를 차단한 로마군을 다시 놀라게 했다. 대신, 한니발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전통적으로 지나갈 수 없는 습지대인 아르노 강 유역을 통과했다. 행군에 손실이 없지는 않았다. 많은 병사들이 늪에서 익사하거나 감염으로 죽었고, 한니발 자신도 한쪽 눈을 실명했다. 트라시메노 호숫가에서 한니발 바르카는 군사 역사상 가장 크고 성공적인 매복으로 여겨지는 카르타고군을 추격하던 로마군을 섬멸했다. 15,000명 이상의 로마군이 죽고, 1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제 로마로 가는 길은 열려 있었다.
로마인의 피로 그려진 걸작, 칸나이
군사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원로원은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임명했다. 파비우스는 회전을 피하고 한니발 군대에서 필수적인 식량을 빼앗는 초토화 정책을 채택한 지구전론자(쿤크타토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전략은 효과가 있었지만, 빠른 승리를 원하던 원로원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거대한 영지가 한니발 군대에 약탈당한 귀족들에게는 훨씬 더 인기가 없었다.
결정이 내려졌다. 건방진 카르타고인은 로마인에게 너무 오랫동안 굴욕을 주어 제거되어야만 했다. BC 216년, 파비우스는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공화국은 테렌티우스 바로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두 명의 새로운 집정관을 선출했다. 그들은 약 8만 명의 거대한 군대의 공동 지휘권을 받았다. 로마가 배치한 최대 규모의 군대는 한니발을 저지한다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따라 준비를 했다. 로마군이 공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그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정착지인 칸나이 부근의 중요한 보급고를 점령했다. BC 216년 8월 2일, 두 군대는 칸나이 외곽에서 만났다. 그날 군대를 지휘하던 바로(집정관은 매일 지휘권을 교대함)는 전열 중앙의 카르타고 보병을 박살내기 위해 군단병들을 단단히 뭉쳤다. 한니발은 이 움직임을 예상했고, 바로의 두터운 대형을 이용했다. 그는 전열 중앙에 경보병을 배치하고 측면에 베테랑 중장보병을 배치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사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동이 되었다.
칸나이에서 살해된 로마 귀족들의 반지를 세는 한니발 바르카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 1704년 세바스티안 슬로츠
로마군이 전진하자 한니발의 보병 중앙은 물러섰고 측면은 견고했다. 천천히, 한니발의 전열은 초승달 모양을 갖추었고, 중앙을 공격하려는 점점 더 많은 수의 군단병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로마군은 그들이 덫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수만 명의 로마 병사들이 적에게 포위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꽉 찬 대형은 더욱 촘촘해져서, 많은 로마군이 검을 휘두를 수 없을 정도였다. 카르타고 기병대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전장에서 로마 기병을 몰아낸 후, 로마군의 후방을 향해 돌격했다. 최전방에 있던 로마 병사들은 자신의 위태로운 위치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너무 늦었다. 어둠이 깔릴 무렵, 로마군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완전히 전멸했다.
집정관 중 한 명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했고, 바로와 소수의 생존자들은 전장에서 달아났다. 한니발의 형제 마고는 카르타고 원로원 앞에서 금으로 된 인장 반지가 가득 찬 커다란 항아리를 넘어뜨리며 승리의 규모를 보여주었다. 칸나이 전투는 로마가 공화국으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제국으로서 겪은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4세기 후반에 쓴 글에서,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발렌스 황제의 하드리아노폴리스 패전을 칸나이 이후 최악의 로마 군사 재앙이라고 불렀다.
승리부터 패배까지
칸나이에서의 승리는 한니발의 이탈리아 원정의 최고봉이자 그의 군사 경력의 정점이었다. 또한 그의 고민의 시작이었다. 로마는 완전히 패배했고, 강력한 군대는 사라졌으며, 대부분의 고위 지휘관들은 2년간 잇따른 패배로 사망했다. 공화국의 핵심인 아펜니노 반도는 황폐해졌고, 로마의 통제에서 크게 벗어났다. 하지만 공화국은 회복력이 있었다. 한니발이 평화협상을 제의했을 때, 원로원은 이를 거부했다. 그것은 위험을 수반한 조치였다. 칸나이 이후, 로마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한니발 안테 포르타스(한니발이 문 앞에 있다)가 그날의 대명사였다. 요새는 서둘러 보수되었고, 초병들은 거대한 적군이 올 것을 예상하고 지평선을 관찰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오지 않았다. 한니발 바르카가 왜 로마로 진군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여전히 평화가 마련되기를 바라고 있었을까? 한니발의 군대는 승리했지만, 그들 역시 지쳐 있었고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로마의 자랑스러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수세기 후에 존재했지만, 도시의 방어는 공성 장비가 부족하고 오랜 노력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군대에게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어떠한 지원도 보내기를 주저했다.
한니발 가문은 카르타고 원로원에서 여러 강력한 파벌 중 하나에 불과했고 그들은 한니발의 이탈리아 모험보다 금광과 은광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방어를 더 중요하게 고려했다. 한니발을 보강하려는 유일한 시도는 BC 208년 로마가 증원군을 물리쳤을 때 실패했다. 필요한 병력 대신 한니발은 그들의 지휘관인 그의 형제 하스드루발의 머리를 받았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그의 베테랑 부대를 이탈리아 남부에서 온 경험이 적고 의욕적인 용병으로 대체해야 했다.
로마 역시 칸나이 이후 전략을 바꿨다. 로마는 한니발과 직접 대치하는 대신, 바르카 가문 권력의 중심인 스페인을 향해 노력을 기울였다. 칸나이의 생존자 푸블리우스 스키피오(훗날 아프리카누스로 알려짐)가 로마군 지휘권을 받아 해외로 보내진 반면, 이탈리아에서 로마군은 파비아누스의 전술로 돌아가 전투를 피하고 게릴라전을 벌였다.
비록 패배는 없었지만, 한니발은 스키피오의 군단이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군을 몰아내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로마의 전력은 점차 증가하였고, 동맹국은 하나씩 한니발을 등졌다. 마침내 BC 204년 스키피오가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카르타고의 문 앞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수도의 함락을 두려워한 카르타고인은 한니발을 소환했다.
말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BC 202년 10월 19일 자마 평원에서 펼쳐졌다. 한니발은 대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80마리의 전쟁 코끼리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베테랑 병사들을 의지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코끼리를 이용하여 로마군에게 충격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 한니발은 자신의 전술을 연구하고 이에 대항할 방법을 개발한 새로운 적과 마주했다.
코끼리가 로마군의 전열을 향해 돌격하자, 로마군은 흉포한 짐승들이 통과하도록 대열의 틈을 벌렸다. 일부 동물들은 조련사를 잃고 카르타고군 전열에서 미친 듯이 날뛰며 불운한 병사들을 짓밟았다. 주도권을 잡은 스키피오는 누미디아와 로마 기병에 한니발의 측면을 보호하는 카르타고 기병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스키피오의 기병대가 추격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적의 보병(로마군과의 싸움에서 갇힌)을 뒤에서 공격했다. 결과는 로마군의 결정적인 승리였다.
자마 이후, 카르타고는 열등한 지위로 전락했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 외에도 카르타고는 모든 해외 영토를 포기해야 했고, 로마의 승인 없이는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패배와 스페인에서의 권력 기반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 바르카는 카르타고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의 군사적 성공은 그에게 강력한 지지자들을 확보했고, 몇 년 동안 한니발은 카르타고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로마는 전쟁에서 당한 굴욕을 잊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공화국 사절단은 계속해서 한니발의 송환을 요구하며 또 다른 전쟁을 위협했다. 한니발은 이제 두 번째로 카르타고를 떠나야 했다. 이번엔 영원히.
몇 년 동안 한니발 바르카는 안티오코스 3세의 셀레우코스 궁정에서 최고 군사 고문으로 일했다. BC 189년 로마가 마그네시아에서 안티오코스를 격파하면서 로마를 다시 공격하려던 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니발은 이제 도주 중이었다. 그는 크레타 섬으로 도피했거나 아르메니아에서 반군과 함께 무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 그의 마지막 군사행동은 로마 동맹국인 페르가몬 왕국에 맞서 싸운 비티니아의 왕 프루시아스 1세를 섬긴 것이다. 그곳에서 한니발은 해전에서 페르가몬 함대를 물리치고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가 비티니아에 한니발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개입했다. 궁지에 몰린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마지막으로 적을 압도했다. 로마 군단병들이 그의 집에 접근하고 있을 때, 노(老) 장군은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한니발 바르카 :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인가?
카르타고는 한니발보다 겨우 35년 더 생존했다. BC 146년 로마는 이전의 경쟁자를 완전히 없애기로 결심하고 카르타고와 세 번째로 전쟁을 치렀다. 이번에는, 군단이 도시를 점령하고 땅을 불태웠다. 로마는 이제 지중해의 지배자였고, 고대 초강대국이 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유령은 로마인을 계속 따라다녔다. 한니발 안테 포르타스는 로마 시민에게 재앙이 닥칠 때마다 유명 문구로 남았다. 더 중요한 것은 한니발이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동안 잇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로마의 군사 전략과 교리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길고 긴 전쟁은 일반적인 로마의 징병 전략을 바꾸었다. 그들은 시민군에서 전문적인 상비군으로 점차 바뀌었고, 원로원과 공화국에 대한 충성에서 자신들의 지휘관에 대한 충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황제에 대한 충성으로 옮겨갔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아마도 로마 최악의 악몽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또한 직간접적으로 그들의 군대와 사회를 재편성한 가장 위대한 스승이기도 했다. 리비우스에서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이르기까지 가장 위대한 로마 작가들은 한니발을 존경했다. 이 위대한 장군이 죽은 지 수세기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그를 위해 대리석으로 덮은 새로운 무덤을 만들었으며 수세기 동안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로마인은 부분적으로는 궁극적인 승리의 증거로, 부분적으로는 마지못해 존경의 표시로 가장 큰 적의 조각상을 세웠다.
한니발이 사용한 전략과 전술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조지 S. 패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지휘관들에게 필수 연구였다. 로마인에게 재앙을 안겨준 칸나이의 이중 포위는 가장 권위 있는 사관학교에서 여전히 "완벽한 전투"의 교과서적 사례로 가르치고 있다. 한니발은 로마에 패배했지만, 그의 전설은 살아있다.
출처 : The Col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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