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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제국

로마 제국 - 고대부터 15세기까지의 영토 변화 (上)

by 금곡동로사 2022.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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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790년간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시기의 로마 제국을 보여준다. 19개의 지도에는 그 시작과 끝, 그리고 대략 100년마다의 다양한 영토 확장과 축소가 포함되어 있다. 수세기 동안 지속된 팽창기(BC 338-AD 9년) 중 가운데 3개의 지도는 모두 영토 축소를 나타낸다. 이들은 가장 흥미로운 시기인 위기의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지속된 수축기(1040-1452년)의 마지막을 제외한 모든 지도는 영토 확장을 나타내며,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더 흥미롭다. 중간의 천년기(9-1040년)에는 확장과 축소가 번갈아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BC 338년 - 시작 : 라틴동맹 정복


전승에 따르면, 로마는 BC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트로이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도시는 510년경 에트루리아 통치자들을 몰아내고 공화국이 되었을 때 전설에서 벗어나 역사 속에 명확한 모습을 드러냈다. 규모와 힘이 빠르게 성장한 도시는 이탈리아 중부의 주요 도시이자 전시(戰時) 라틴도시 연맹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다. 340년에 라틴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는 그들을 물리쳤고 338년에 라틴도시들은 로마의 직접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초기 로마가 정복한 이 지역은 위의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빨간색 점묘로 된 지역은 카푸아로, 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독립적인 지역이다. 이러한 규칙은 아래의 모든 지도에 적용된다.

 


BC 279년 - 축소 : 피로스에게 패하다


BC 326-290년에 로마는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에서 주요 경쟁자였던 남동쪽의 삼니움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삼니움 동맹에는 에트루리아인과 북서쪽의 갈리아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중부 및 남부 거의 전체가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위협을 받는 이탈리아의 "발바닥"에 위치한 그리스 도시들은 에페이로스(이탈리아의 "발뒤꿈치"에서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 있는)의 그리스 왕 피로스를 불러들였다. 그는 로마 군단을 격파하고 279년에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여기서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나왔다. 피로스는 이 전쟁에서 로마와 동맹을 맺은 카르타고인으로부터 시칠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갔다.

 


BC 212년 - 축소 : 한니발의 캠페인


로마인은 BC 275년에 결국 피로스를 이겼고, 272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전체를 확보했다. 로마의 다음 공격 대상은 카르타고 해양 대제국이었다. 264-241년의 제1차 포에니 전쟁(카르타고가 원래 포에니인, 즉 페니키아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지중해 서부의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 섬은 로마에 양도되었다. 로마는 220년대에 해적 퇴치 캠페인을 통해 아드리아 해 건너편의 영토를 획득했고, 동시에 이탈리아 북부의 켈트족을 정복했다. 한편, 카르타고는 스페인의 많은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입지를 다시 다졌고, 218년 이곳에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카르타고의 위대한 장군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로마군을 물리치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 군단에게 패배를 거듭해서 안겨주었는데, 최악의 상황은 216년 로마 군단이 약 5만 명의 군단병을 잃은 칸나이에서였다. 피로스 침공 때처럼 삼니움족과 그리스 남부가 그에게 귀순했고, 214년 시칠리아에서 시라쿠사이(시라쿠사)가 뒤를 이었다.

 


BC 86년 - 축소 : 미트리다테스에게 패하다


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로마 군단은 마침내 BC 211년에 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다른 곳에서도 로마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203년 한니발은 로마군의 공격으로부터 카르타고를 방어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202년 그곳에서 그는 로마 장군 스키피오에게 패했고, 전쟁은 카르타고에 가혹한 조건이 부과되면서 끝이 났다. 로마는 스페인의 동부 해안 전체를 획득했고, 133년까지 스페인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여느 때처럼 로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으로 보냈고, 로마 군단은 모든 곳에서 결국 성공했다. 마케도니아는 148년에, 그리스와 카르타고는 2년 후에 합병되었다. 이 시기에 로마 시의 인구는 10만 명에 이르렀고, 경쟁도시는 급격히 위축되고 있는 셀레우코스 왕국의 수도인 안티오케이아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뿐이었다. 로마의 위신은 아나톨리아 서부의 페르가몬 왕이 피할 수 없는 일에 굴복하고 133년 그의 왕국을 로마에 물려줄 정도였다. 100년경 로마의 동방 영토는 위의 지도에서 점선 경계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의 패권에 도전한 왕국은 흑해 남쪽 해안에 있는 폰토스뿐이었다. 110-100년 사이에 미트리다테스 왕(120-66년)은 동쪽과 남쪽(중앙 아나톨리아의 로마 보호령들을 일시적으로 정복) 및 북쪽(흑해 북쪽 해안에 있는 보스포루스 왕국을 정복)으로 확장하여 영토를 4배 이상 늘렸다. 88년, 이탈리아가 "동맹시 전쟁"(로마에게 시민권을 이탈리아 전체로 확대하도록 강요한)에서 막 벗어나고 있을 때, 미트리다테스는 서쪽으로 진격했다. 로마의 아시아 속주를 덮쳤고 6만 명의 로마인이 처형당했다. 86년, 그리스 남부가 미트리다테스에게 귀순하여 폰토스 군대를 받아들였다. 동방에서 로마의 전략적 거점이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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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9년 - 확장 :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복


미트리다테스를 그의 자리로 다시 돌리려는 로마의 노력은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와 술라가 이끄는 귀족들 사이의 내전으로 인해 방해받았다. 그러나 술라는 BC 85년 미트리다테스를 무찌르고, 동부 국경은 81년에 복구되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포기하지 않았고, 술라의 후계자 폼페이우스는 다시 동방으로 보내졌다. 66년까지 로마의 승리가 완료되었다. 미트리다테스는 자살했고, 폰토스에서 시리아를 포함하는 해안이 로마에 합병되었으며, 내륙은 속국으로 전락했다. 서쪽에서는 폼페이우스의 경쟁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마리우스의 조카)가 그의 군사 임기 동안 훨씬 더 눈부신 성과를 거두어 51년까지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심지어 브리튼을 급습하기까지 했다. 이 무렵 공화정 체제는 경쟁하는 장군들이 절대적인 권력이나 그 몫을 추구하면서 확실히 붕괴되고 있었다. 49-30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종손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쥐면서 끝났다. 27년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다. 로마의 초대 황제로서, 그는 공화정의 제도들과 정부에서의 역할에 대한 허구를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법적으로 그는 단지 첫 번째 시민이었던 프린켑스에 불과했기에 이 제도는 원수정으로 불린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임자들이 남긴 제국의 국경을 다뉴브 강 남쪽과 라인 강, 유프라테스 강 서쪽, 사하라 사막 북쪽의 모든 땅을 합병하거나 축소하여 봉신으로 삼았다. 그의 가장 야심 찬 계획은 AD 9년까지 손에 들어오는 것으로 보였던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116년 - 확장 :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인에게 이기다


게르마니아는 AD 9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3개 군단(약 15,000명)이 매복 공격을 받고 전멸했을 때 가치보다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을 입증했다. 국경은 라인 강으로 후퇴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친족인 율리오-클라우디아 왕조 아래 완만한 확장이 계속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브리튼이 정복(43-80년)되었다는 것이다. 68년, 율리오-클라우디아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매우 인기가 없었던 네로가 자살했다. 이어진 내전에서 동부군 사령관 플라비우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96년에 짧은 왕조가 끝나고 거의 한 세기 동안 입양 황제들에 의한 안정적이고 능력 있는 통치가 뒤따랐으며, 이는 각자가 가장 유망한 부하들을 후계자로 입양(채택)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기번은 이 시기를 "세계 역사상 인류의 상태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라고 불렀다. 이를 반영하여 로마 시의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아마도 세계 최대였다. 대부분의 입양 황제는 제국의 영토 제한을 유지하는 데 만족했지만, 주목할만한 예외는 트라야누스(98-117년)이다. 그는 다뉴브 강 북쪽 기슭에서 골칫거리인 다키아인을 정복(101-106년)했고, 114년에는 로마의 동쪽 라이벌인 파르티아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는 114년에 아르메니아를, 115년에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합병했으며, 116년에는 페르시아만까지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점령했다.

 


269년 - 축소 :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의 분리


트라야누스의 동방 정복은 유지하기 어려웠고, 그의 후계자 하드리아누스(117-138년)는 아르메니아가 여전히 클리엔테스 국가로 남아있었지만, 즉시 국경 지역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되돌렸다. 팍스 로마나는 마지막 입양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가 살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어진 내전(193-97년)은 세베루스가 승리하였으며 그의 왕조는 235년까지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정복과 약탈로 부자가 된 제국에게 평화가 반드시 번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주화는 약 170년부터 반복적으로 평가절하되었고, 이 지도의 시점에서 은 함유량은 몇 퍼센트 되지 않았다(내전과 불확실성으로 안토니아누스 은화(2 데나리우스 가치)의 은 함유량이 2%까지 하락). 212년, 제국의 모든 자유민이 시민이 되었고, 이는 세금 기반을 늘리기 위한 시도였다. 경제 쇠퇴와 함께 정치적 불안이 찾아왔다. 235년 이후 반세기 동안 15명의 황제가 있었고, 대부분 몇 년 동안만 통치했다. 동시에, 로마의 적들은 더욱 강력해졌다. 226년 동방에서 파르티아는 700년 전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들은 253년 안티오케이아를 약탈하고 260년에는 에데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동시에 게르만족은 제국 깊숙이 쳐들어와 여러 지점에서 지중해에 도달했다. 제국의 무력함으로 인해 지역 사령관들이 최악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통제권을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서쪽에서, 260년 포스투무스는 스페인과 브리튼을 포함한 갈리아 제국을 세웠다. 동쪽에서는 반독립적인 무역도시 팔미라가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의 통치자 오데나투스는 페르시아군을 물리치고 그들의 수도 크테시폰을 약탈하기도 했다. 267년 그가 죽자, 더 야심 찬 미망인 제노비아가 권력을 잡고 269년까지 로마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통치했다.

 


336년 - 확장 : 콘스탄티누스의 재통일


아우렐리아누스 황제(270-75년) 치하에서 제노비아는 273년에 패배하여 사로잡혔고, 갈리아 제국은 275년에 완전히 탈환되었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3세기의 위기"에서 살아남았고, 주변 영토만 잃었으며, 심지어 사산 왕조에 맞서 이득을 얻기까지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년) 치하에서 회복되어 정부는 안정되었지만, 인플레이션은 억제되지 않았다. 지역 기반 지휘관의 필요성을 인식한 그는 제국을 둘(동방과 서방)로 나누어 각각의 아우구스투스 아래에 두었다. 원수정의 법적 기만은 사라졌고, 시민들은 그들의 군주(도미누스, 정부 형태는 전제정이라고 함)인 황제의 신민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두 명의 하위 황제인 카이사르를 포함한 4명의 황제(테트라르키아), 즉 제위를 계승하기 위한 정기적인 수단을 마련하였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까지 한 번만 효과가 있었다. 그 후, 예상대로, 과잉한 황제들과 그들의 상속받지 못한 아들들이 내전을 일으켰다. 324년부터 337년까지의 최종 승리자이자 유일한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두 가지 결정으로 유명하다. 먼저,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고, 그의 왕조(363년까지 지속) 아래에서 기독교는 제국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둘째, 330년에 그는 비잔티움 부지에 기독교 수도인 새로운 로마를 세웠다. 콘스탄티노폴리스(곧 알려지게 되는)에 두 번째 원로원이 만들어졌고, 이제 각 원로원은 매년 한 명의 집정관을 임명했다. 공화국(두 집정관이 집행권을 공유한)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이름은 연도를 식별하는 데 사용되었다.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황제의 궁정 또한 있었지만, 서방에서는 밀라노에 있었고, 405년부터는 라벤나에 있었다. 두 개의 수도(로마와 비잔티움)가 있는 제국의 새로운 상황은 위 지도에서 빨간색에서 보라색으로 변경됨으로써 나타난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는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새로운 금화 솔리두스를 만들었고, 다뉴브 강 북쪽의 일부 영토도 다시 정복했다.

 


485년 - 축소 : 게르만 왕국들에 서부를 상실하다


375년 서고트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침입한 훈족을 피해 다뉴브 강 남쪽에 정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푸대접을 받은 그들은 378년에 반란을 일으켜 그들에게 맞서도록 파견된 제국 군대를 격파했다. 로마 신민들이 군대 복무를 점점 꺼리자 제국은 서고트족을 시작으로 게르만 부족들로 대부분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395년 동서방 전체의 마지막 황제인 테오도시우스가 죽고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었. 이 상황을 이용하여 서고트족은 395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결국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410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한편, 반달족과 수에비족이 라인 강을 건너 침공했고, 브리튼은 반란을 일으켰다. 서방 제국은 420년에 다소 회복되었지만, 430년대에 반달족이 아프리카를 점령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의 마지막 위대한 장군 아이티우스 휘하에서, 서방은 게르만 동맹들의 도움으로 451년 갈리아에서 훈족을 격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힘을 가졌다. 그 후 돌이킬 수 없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476년에는 이탈리아 외에 영토가 거의 없었다. 그 해에 마지막 서방 황제인 로물루스는 그의 군사령관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었다. 20년 동안 재임한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도아케르는 게르만족 태생이었고, 이제는 스스로를 이탈리아의 왕이라고 칭했다. 오도아케르는 동방의 제노 황제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했다. 동방은 항상 더 부유한 반쪽이었고, 게르만족과 훈족의 침략에서 대부분 무사히 살아남았다. 처음에 제노는 오도아케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480년에 황제는 그에게 파트리키 칭호를 부여했고, 483년부터는 로마 원로원이 황제 밑에서 했던 것처럼 두 집정관 중 한 명을 임명하도록 허용했다. 485년경의 이 기이한 상황은 위 지도의 색상으로 표시된다. 오도아케르의 왕국은 옅은 빨간색을 띠고 있는데, 왕국은 실제로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였지만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국은 명목상 통일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점묘 보라색이 칠해져 있기도 하다.

 

 

 

출처 : Howard Wis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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