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그외

15세기-18세기 근세 유럽

by 금곡동로사 2024. 3. 30.
728x90

피렌체 성문 밖의 로렌초 데 메디치(1449-92)와 그의 추종자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한창일 때 피렌체 공화국의 통치자였다.

 

1400년부터 1800년까지 유럽의 역사는 종교적 갈등과 계속된 전쟁의 역사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과 학문이 재발견되던 시기인 르네상스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세기에 서유럽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 주요 국가들은 강력한 군주제를 배경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계속해서 수많은 독립 국가로 나뉘어 있었지만,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잉글랜드(훗날 그레이트브리튼)는 점차 실질적인 왕국을 건설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백년전쟁 당시 전투

프랑스에서, 프랑스가 마침내 잉글랜드와의 백년전쟁(1337-1453)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잉글랜드인들은 칼레 항만 유지한 채, 나머지 프랑스에 있던 소유물을 프랑스에게 내주었다. 잉글랜드는 장미전쟁으로 알려진 두 라이벌 왕가 간의 내전에 빠져들었다. 헨리 튜더가 1485년 왕위를 장악하고 헨리 7세로서 강력한 정부를 세우면서 갈등이 끝났다.

프랑스는 브르타뉴와 프로방스를 포함한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하기 위해 나아갔다. 1494년 프랑스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요청한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이 참전하여 그들과 맞서 싸운 오랜 분쟁으로 이어졌다.

 


부르고뉴

1477년 낭시에서 패배한 용담공 샤를의 시체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 독립 왕국을 세우려 한 부르고뉴 공작들의 시도는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이 스위스군에 패하고 전사하면서 끝이 났다. 부르고뉴 공국은 그 후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샤를의 상속녀 마리가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을 때, 프랑슈콩테와 네덜란드, 옛 부르고뉴 영토는 중앙유럽에서 확장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관

합스부르크가는 중앙유럽에 위치한 수백 개의 작은 왕국과 공국, 공작령으로 이루어진 신성 로마 제국을 1452년부터 통치했다. 15세기가 진행되면서, 합스부르크가는 점점 더 강력해졌다.

스페인에서는 1469년 아라곤의 페란도와 카스티야의 이사벨이 결혼하면서 1479년에 스페인이 통일되었다. 1492년 스페인의 마지막 무어인(무슬림) 왕국인 그라나다가 마침내 정복되었다.

 

 

종교개혁

카를 5세의 유럽 제국 지도. 제국은 카스티야(자주색)와 아라곤(붉은색), 오스트리아(노란색), 옛 부르고뉴 땅(오렌지색), 신성 로마 제국(옅은 노란색)으로 구성되었다.

 

16세기 초반의 두 사건이 다음 세기와 그 이상 동안 유럽 역사를 지배했다. 첫 번째 사건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간 종교개혁을 촉발시켰을 때였다. 1517년에 발행된 그의 95개 조항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담고 있었다. 그와 다른 "프로테스트들(항의자들)"이 새로운 개신교 운동에 이름을 부여했다.

두 번째 사건은 1516년부터 스페인 국왕이자 합스부르크가의 일원이었던 카를로스가 카를 5세로서 신성 로마 황제가 되고 나서 2년 후에 일어났다. 그의 광대한 제국에는 스페인과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저지대 국가들, 이탈리아 일부, 그리고 스페인이 정복한 아메리카와 필리핀 땅이 포함되었다.

 


종교 전쟁

티치아노의 카를 5세 초상화

종교개혁 이후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독일의 많은 지역, 스위스와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개신교가 되었고, 나머지 카톨릭 유럽 국가와 분열이 발생했다. 곧이어 독일에서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1547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뮐베르크에서 독일의 주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을 물리쳤지만, 개신교의 물결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이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는 무너졌다. 카를은 또한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 사이의 갈등도 해결해야 했다. 프랑스인들은 합스부르크가(남서쪽의 스페인, 동쪽의 거의 모든 땅을 지배했던)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두려워했고, 특히 이탈리아에서 그들과 자주 싸웠다.

 


합의와 개혁

펠리페 2세

이러한 다양한 문제는 결국 1550년대에 해결되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독일의 종교 갈등을 종식시켰고, 1559년 카토 캉브레지 조약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사이의 이탈리아 전쟁을 끝냈다.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하고 제국을 둘로 나누었다. 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가 독일의 합스부르크 영토를 통치하며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고,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통치했다. 한편, 카톨릭 교회는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자체 개혁을 결의하고 반종교개혁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조치를 시작했다.

 

 

반란

1545년 반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 유럽의 카톨릭(올리브 그린), 개신교(파란색), 무슬림(빨간색) 지역

 

그러나 1560년대의 다양한 합의는 유럽에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프랑스의 칼뱅주의 위그노들은 1562년 프랑스 왕좌에 맞서 무기를 들고, 1566년 네덜란드인들이 스페인 통치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1600년까지, 유럽 인구의 거의 40%가 더 이상 카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한편, 스페인은 1580년에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하며 이미 막대한 세력을 더욱 강화했다. 8년 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개신교 잉글랜드를 상대로 아르마다(함대)를 보냈다. 아르마다는 침략의 위협을 막아낸 영국해협에서 패했다.

1566년은 네덜란드에서 칼뱅주의자들이 우상 파괴 운동을 시작한 해이다. 그들은 교회를 습격하고 카톨릭 성인 조각상과 성상을 파괴했다.

 

728x90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

합스부르크가는 스위스의 합스부르크 성에서 이름을 따왔다. 1100년대 초, 오토 2세가 합스부르크의 첫 번째 백작이 되었다. 1276년까지 합스부르크가는 이웃 오스트리아에서 권력을 잡았고 그곳에서 1918년까지 통치했다. 그때부터 일련의 영리한 결혼과 영토 정복을 통해 유럽에서 그들의 땅을 엄청나게 넓혔다.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1806년 제국이 폐지될 때까지 그 칭호와 권력을 유지했다. 1500년대 초까지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부르고뉴,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부, 스페인 및 신세계 제국을 지배했다. 이 광대한 영토의 집합은 통치하기에 너무 큰 것으로 판명났고, 1556년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분파로 나뉘었다. 오스트리아 분파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패배할 때까지 오스트리아를 계속 통치하는 동안 스페인 분파는 1700년에 소멸되었다.

 


튀르크와의 전쟁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다

튀르크를 장악한 오스만은 유럽으로 관심을 돌렸다. 1354년, 그들은 발칸반도 전역으로 확장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453년 한 때 강대했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오스만군은 1456년 베오그라드를 포위했지만 실패하고, 1526년에 돌아와 모하치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1529년, 그리고 다시 1683년, 오스만 제국은 빈 성문에 도달했지만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이때쯤 그들의 광대한 제국은 북아프리카 전역과 헝가리와 발칸반도에서 중동을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뻗어 있었다. 비록 1680년대 이후 그들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지만, 오스만은 이 시기 내내 기독교 유럽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스웨덴

스웨덴의 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1397년 스웨덴은 덴마크와 연합했지만 1523년에 독립했다. 그때부터 왕국은 발트해 주변으로 꾸준히 확장하여 1561년에 에스토니아를, 1629년에 오늘날 라트비아를 얻었다. 1630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재위 1611-32) 왕 아래의 스웨덴 군대가 30년 전쟁에 개입하여 결국 북부 독일의 일부를 얻었다. 덴마크와의 전쟁으로 발트해의 고틀란드 섬과 스웨덴 남부의 영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 대서양 연안의 항구인 노르웨이 트론헤임도 갖게 되었다.

스웨덴의 팽창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을 위협했다. 1700년에 그들은 스웨덴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스웨덴은 1700년 나르바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1708년에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1709년에 그들은 폴타바에서 러시아군에 결정적으로 패했다. 1721년 화의가 선언되었을 때, 스웨덴은 발트해의 모든 영토를 러시아에게 빼앗겼고 왕국의 패권은 종말을 고했다.

 


30년 전쟁

30년 전쟁의 군인(1618-48)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 중 가장 복잡하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 하나였다. 전쟁은 1618년 보헤미아(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개신교도들이 카톨릭 합스부르크가의 통치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일어났다. 합스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의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고 또한 프로테스탄트 지역인 팔츠를 정복했다. 1625-29년 덴마크는 독일의 개신교도들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지만 1626년 루터에서 패했다.

1620년 보헤미아 화이트 마운틴 전투

4년 후, 스웨덴이 개신교도들을 돕기 위해 개입했고, 1635년에는 프랑스가 합류했다. 이제부터 전쟁은 한쪽은 프랑스와 스웨덴, 다른 한쪽은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이 유럽 패권을 놓고 벌이는 다툼이 되었다. 그러나 1640년 카탈루냐와 포르투갈에서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스페인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1642년 내전으로 찢어졌던 잉글랜드를 제외하고 서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30년 전쟁에 참여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독일의 많은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스페인 세력도 무너졌다. 80년간의 투쟁 끝에 마침내 더치(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스위스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확정했다.

 

 

태양왕 루이

루이 14세와 그의 신하들, 베르사유

1643년 루이 14세는 5세의 나이로 프랑스 왕이 되었다. 처음에 마자랭 추기경이 그를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했지만, 1661년 루이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1715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루이는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로 만들기 시작했다. 더치 공화국과 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로 한 일련의 전쟁에서 그는 프랑스 국경을 동쪽으로 라인 강까지, 그리고 북쪽으로 오늘날 벨기에까지 확장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1704년 블레넘 전투에 참전한 잉글랜드군

루이가 1700년에 자신의 손자 필리프를 비어있는 스페인 왕좌에 앉히려고 했을 때, 당시 윌리엄 3세가 모두 통치하고 있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연합하여 그를 반대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시킨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으로 확정되었지만 그의 왕좌를 프랑스 왕좌와 통합할 수는 없었다.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 있는 많은 소유권을 오스트리아에게 내줬고, 그레이트브리튼은 지브롤터를 얻었다.

1685년 프랑스를 탈출하고 있는 위그노들

프랑스에서 루이 14세는 절대 군주로서 통치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여러 장관의 도움으로 통치하면서 의회 없이 통치했다. 그는 자신의 궁정을 위해 베르사유에 거대한 궁전을 지었고 태양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확고한 로마 카톨릭 신자인 그는 1685년 프랑스에서 위그노로 알려진 개신교도에 대한 관용을 끝냈다. 20만 명 이상이 망명길에 올랐고, 그중 다수가 그레이트브리튼, 다른 개신교 국가 또는 남아프리카에 새로 설립된 더치 케이프 식민지로 갔다.

 


열강의 부상

1748년 유럽 지도

1700년대 유럽은 프랑스, 그레이트브리튼,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군사 대국과 무역 국가인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했다. 부상하는 프로이센이 1740년 오스트리아로부터 슐레지엔을 점령했고,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를 복수하려고 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가 그레이트브리튼과 프로이센에 맞서 동맹을 맺었고, 그레이트브리튼과 프로이센은 1762년 러시아가 전쟁에서 물러나면서 비로소 패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763년 전쟁을 끝낸 파리 조약으로 그레이트브리튼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로부터 상당한 이득을 얻었고, 오늘날 캐나다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획득했다.

중앙유럽과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오스만제국을 희생시키면서 발칸반도의 영토를 계속 확장했다. 1772년, 1793년, 1795년에 맺은 협정으로 폴란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로이센, 러시아의 영토로 나뉘면서 지도에서 사라졌다.

728x90

'유럽 > 그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혁명 전야의 유럽  (2) 2024.04.24
프랑스 혁명  (2) 2024.04.02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4) 2024.03.28
유럽의 경계 변화  (2) 2022.11.09
소련을 설명하는 역사 지도  (0) 2022.10.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