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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속주

라이티아

by 금곡동로사 202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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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티아는 라이티아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서쪽으로 헬베티족 정착지, 동쪽으로 노리쿰, 북쪽으로 빈델리키아(빈델리키족의 땅), 남서쪽으로 트란살피나 갈리아, 남쪽으로 로마 이탈리아 지역인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오늘날 스위스 동부와 중부(라인강 상류와 콘스탄츠 호수 포함), 남부 독일(바이에른 및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대부분), 포어아를베르크 및 오스트리아의 티롤 상당 부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북부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빈델리키아(오늘날 뷔르템베르크 동부와 바이에른 서부)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나중에 이 속주에 합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라이티아의 북방 경계는 다뉴브강이었다. 나중에 다뉴브강에서 북쪽으로 166km에 걸쳐 뻗어 있는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가 북방 경계를 표시했다. 라이티아는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가도를 통해 레지아(레셴) 고개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와 연결되었다.

속주의 주도는 아우구스타 빈델리코룸(오늘날 독일 남부 아우크스부르크)이었다.

 


역사

 

기록에 가장 강력하고 호전적인 알프스 부족 중 하나로 등장하는 라이티아족의 기원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리비우스는 그들이 에트루리아 출신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라인홀드 니버와 몸젠이 선호했던 믿음). 유스티누스과 대 플리니우스가 전하는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포강 평야에 정착했다가 침략해 온 갈리아인에 의해 산으로 쫓겨난 민족의 일부였으며, 이때 지도자였던 라이투스에게서 "라이티아인"이라는 이름을 따왔다. 그들의 에트루리아 기원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그 땅이 로마인에게 알려졌을 당시 켈트 부족들은 이미 그 땅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 원 거주민들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하면 켈트족이 아닌 부족들(예. 에우가네이족)이 그들 사이에 정착했지만, 후대의 라이티아인은 켈트족으로 간주될 수 있다.

폴리비우스가 라이티아인에 대해 처음 언급했지만, 부수적으로만 언급했고, 공화정이 끝날 때까지 그들에 대해 거의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BC 15년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 의해 복속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음에 라이티아는 별개의 속주를 형성했지만, AD 1세기말에는 빈델리키아가 추가되었고, 따라서 타키투스(게르마니아, 41)는 아우구스타 빈델리코룸(아우크스부르크)을 "라이티아 속주의 콜로니아"라고 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빈델리키아를 포함한 전체 속주가 군 프라이펙투스 아래 있었고, 그 이후에는 프로쿠라토르 아래 있었다. 상비군은 주둔하지 않았지만 2세기까지 토착 군대와 민병대에 보호를 의존했다.

 

395년 로마 속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기에 라이티아는 179년까지 카스트라 레기나(레겐스부르크)에 기반을 둔 레기오 III 이탈리카의 사령관이 통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라이티아는 비카리우스 이탈리아이 관구의 일부를 구성했고, 쿠리아 라이토룸(쿠어)에서 프라이세스가 통치하는 라이티아 프리마와, 아우구스타 빈델리코룸에서 프라이세스가 통치하는 라이티아 세쿤다로 세분화되었다. 전자는 옛 라이티아에 해당하고 후자는 빈델리키아에 해당한다. 그들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라쿠스 브리간티누스(콘스탄츠 호수)에서 오이누스(인강)까지 동쪽으로 그어진 선으로 언급될 수 있다.

서로마 제국 말기에 이 땅은 황폐한 상태였지만, 테오도리쿠스 대왕 시대에 동고트족이 점령하여 둑스 아래에 둔 덕분에 어느 정도 번영을 되찾았다. 917년 슈바벤 공국에 합병되기 전까지, 라이티아 프리마의 상당 부분은 수세기 동안 별도의 정치 단위인 라이티아 쿠리엔시스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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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그 땅은 매우 산이 많았고, 주민들은 약탈 원정에 나서지 않을 때 주로 소를 기르고 목재를 베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농업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계곡은 풍요롭고 비옥하여 이탈리아의 어떤 것과도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포도주를 생산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것보다 라이티아산 포도주를 더 좋아했다. 피치, 꿀, 밀랍, 치즈 등의 상당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구리와 은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광석은 이탈리아 북부를 거쳐 제국 전역으로 수출되었다. 산길을 통한 목재 운송은 그다지 수익성이 없어 로마인들은 주로 알프스 남부 산기슭에서 목재를 얻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게르만 부족과 로마 직물 및 도자기 무역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거두기 시작했다.

 

 

지리


빈델리키아를 제외한 라이티아의 주요 도시는 트리덴툼(트렌토)과 쿠리아(쿠어)였다. 베로나와 트리덴툼을 지나 레셴 고개와 페른 고개를 넘어 아우구스타 빈델리코룸(아우크스부르크)까지 이어지는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가도와, 콘스탄츠 호수의 브리간티움(브레겐츠)에서 쿠어와 키아벤나를 거쳐 코모와 밀라노로 이어지는 두 개의 큰 로마 가도 노선이 관통했다.

레티콘 산맥은 라이티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캄보두눔(오늘날 켐프텐)의 포룸 모형


중요 도시

알라이 (알렌) 쿠리아 (쿠어)
아르보르 펠릭스 (아르본) 엔디다이 (노이마르크트)
아보디아쿰 (에파흐) 펠트리아 (펠트레)
아퀼레이아 (하이덴하임 안 데어 브렌츠) 포이테스 (퓌센)
아우구스타 빈델리코룸 (아우크스부르크) 군티아 (귄츠부르크)
아우수굼 (보르고 발수가나) 가문디아 로마나 (슈베비슈 그뮌트)
바우자눔 또는 폰스 드루시 (볼차노) 오스켈라 (도모도솔라)
벨루눔 (벨루노) 파르타눔 (파르텐키르헨)
빌리티오 (벨린초나) 세바툼 (산 로렌조 디 세바토/세인트 로렌젠)
브리간티움 (브레겐츠) 소르비오두룸 (슈트라우빙)
캄보두눔 (켐프텐) 수블라비오 (폰테 가르데나/바이트브루크)
카스트라 바타바 (파사우) 트리덴툼 (트렌토)
카스트라 레기나 (레겐스부르크) 벨디데나 (인스브루크 빌텐 지구)
클라벤나 (키아벤나) 비피테눔 (비피테노/슈테르칭)
클루니아 (아마도 펠트키르히 또는 발처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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