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국은 BC 1세기에 급속하게 확장되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갈리아 전쟁(BC 58-50)에서 서유럽 대부분과 영국 제도 일부를 정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래였다. 갈리아 전쟁은 대부분 갈리아인과 싸우는 것이었지만, 다양한 게르만 부족과의 싸움도 포함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 부족과 싸우기 위해 두 번이나 라인 강을 건넜지만, 교전은 전술적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정복 활동은 카이사르의 내전(BC 49-45)이 가까워지면서 일찍 끝날 수밖에 없었다.
권력 투쟁으로 공화국이 황폐화되면서 유럽 대륙은 갈리아 전쟁 이후 20년 동안 거의 잊혔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간의 마지막 대결을 위해 갈리아 땅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철수했다. 갈리아인들은 더 이상 촉구할 필요가 없었고,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의 지배권은 BC 28년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BC 27년에 갈리아와 로마 전체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로마 공화국은 로마 제국으로 개편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초대 황제로 선포되었다. 프린켑스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보내 갈리아 봉기를 진압했다. 갈리아 봉기 동안, 반란에 필요한 무기는 게르마니아에서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로 밀수입되었다. 당시 라인란트에서 로마군의 규모는 미미했고, 유일한 군사 작전은 침공에 대한 징벌적 원정이었다. 제국은 갈리아를 확보하고 그곳에서 저항의 징후가 보이면 이를 소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갈리아를 평정한 이후 아그리파는 BC 20년에 로마 도로망을 포함한 기반시설을 정비했다. 로마는 라인 강을 따라 군사력을 강화했고, BC 19-17년 사이에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향후 제국의 번영은 국경 확장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고, 제국 확장의 다음 목표는 게르마니아가 되었다.
BC 17/16년 라인 강 동쪽에서 로마군을 붙잡고 처형한 시캄브리(수감브리"Sugambri")족, 우시피"Usipii"족, 텐크테리"Tencteri"족은 강을 건너 로마 기병대를 공격했다. 뜻밖에도 그들은 마르쿠스 롤리우스가 이끄는 제5군단과 마주쳤고, 로마군을 격파하고 군단기를 노획했다. 이 패배로 아우구스투스는 라인 강 너머로 원정을 할 군단을 준비하기 위해 갈리아에서 군대를 재편성하고 개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롤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가 공격하자 침입자들은 게르마니아로 후퇴하여 로마와 화평을 청했다.
BC 16년부터 13년까지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에서 활동했다.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비한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의 루그두눔(리옹)에 조폐국을 설치하여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불할 화폐를 마련했고, 갈리아에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인구조사를 조직했으며, 라인 강 서안의 군사기지 건설을 조정했다.
바루스의 재앙(클라데스 바리아나) 이전의 캠페인
드루수스의 원정
경험 많은 장군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BC 13년에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갈리아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시행한 로마의 인구조사와 조세 정책에 대한 봉기가 일어났다. 그 해 대부분 동안 그는 정찰을 수행하고 보급과 연락망을 처리했다. 그는 또한 아르겐토라툼(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모군티아쿰(독일 마인츠), 카스트라 베테라(독일 크산텐)를 포함하여 라인 강을 따라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드루수스는 처음에 시캄브리족과 우시피족이 갈리아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고, 라인 강을 건너 보복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써 로마는 28년 동안 라인 강 하류를 횡단하여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라인 강을 건너 우시피족의 땅을 침공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시캄브리족을 상대로 북쪽으로 진군하여 그들의 땅을 약탈했다. 라인 강을 따라 내려가 지금의 네덜란드에 도달한 그는 프리슬란트인을 정복했고, 그들은 그 후 로마의 동맹군으로 복무했다. 그런 다음 그는 게르마니아 북서부(오늘날 니더작센 지역)에 살고 있는 카우키"Cauci"족을 공격했다. 겨울 즈음, 그는 라인 강을 다시 건너 로마로 돌아왔다.
다음 해 봄, 드루수스는 라인 강을 건너 두 번째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우시피족을 진압한 뒤, 비수르기스(베저 강)를 향해 동쪽으로 진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엠스 강에서 엘베 강까지 뻗어있는 케루스키"Cherusci"족의 영토를 지나 베저 강까지 동쪽으로 밀었다. 이는 이제까지 로마 장군의 여정에서 가장 먼 동쪽의 북유럽이었고, 그에게 많은 명성을 가져다준 업적이었다. 보급품이 고갈되고 다가오는 겨울 사이에, 그는 우호적인 영토로 다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돌아오는 길에 드루수스의 군단은 아르발로에서 지형을 이용하여 그들을 괴롭힌 케루스키 전사들에 의해 거의 괴멸되었다.
그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는 것이 의결되었는데, 이는 제국이 평화롭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평화는 지속되지 않았는데, BC 10년 봄에 그는 다시 한번 라인 강을 건너 캠페인을 벌였으며, 1년 중 대부분을 카티"Catti"족을 공격하는 데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세 번째 원정에서 카티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들을 정복한 다음, 이전 캠페인 기간이 끝날 무렵에 그랬던 것처럼 로마로 돌아왔다.
BC 9년, 그는 이번에는 집정관으로서 네 번째 원정을 시작했다. 나쁜 징조에도 불구하고, 드루수스는 다시 카티족을 공격했고,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영토를 어렵게 정복하고 상당한 피를 흘린 후에야 그를 공격한 군대를 물리쳤다"는 수에비"Suebi"족의 영토까지 멀리 진격했다. 그 후, 그는 다시 한번 케루스키족을 공격했고, 후퇴하는 케루스키족을 따라 베저 강을 건너 엘베 강까지 진격하여 카시우스 디오의 표현대로 "그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약탈했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드루수스는 최근에야 발견된 새로운 땅까지 로마의 지배권을 확장했다. 라인 강으로 돌아오는 길에, 드루수스는 말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 그의 부상은 심각하게 감염되었고, 30일 후에 드루수스는 괴저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티베리우스를 급히 그에게로 보냈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당시 티베리우스는 파비아에 있었고, 형제의 상태를 알게 된 후 죽어가는 동생의 곁에 있기 위해 말을 탔다고 한다. 그는 제때 도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드루수스는 숨을 거뒀다.
티베리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비니키우스의 원정
드루수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는 라인 강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BC 8-7년에 걸쳐 게르마니아 내에서 두 차례의 원정을 벌였다. 그는 군대를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로 진군시켰는데, 시캄브리족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시캄브리족을 거의 말살할 뻔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가까이에서 감시할 수 있도록 라인 강의 로마 지역으로 이송했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게르마니아를 본질적으로 정복한 것으로 묘사하고, 6세기 카시오도루스의 글에서는 엘베 강과 라인 강 사이에 사는 모든 게르만족이 로마의 힘에 굴복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르마니아의 군사 상황은 제국의 선전이 시사하는 것과는 크게 달랐다.
아우구스투스는 BC 6년에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게르마니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3년 후인 BC 3년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엘베 강을 건넜다. 그의 지휘 아래 엠스 강과 라인 강 사이에 있는 습지를 가로질러 폰테스 롱기라 불리는 방죽길이 건설되었다. 다음 해에 로마와 케루스키족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한 파벌의 정예 구성원들이 로마 지도자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동안, 케루스키 부족 전체는 이후 20년 동안 계속해서 저항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엘베 강으로 진군하여 라인 강 동쪽 지역의 기반시설 건설을 지휘했지만, 티베리우스가 시캄브리족을 다룬 것처럼 처리하려고 했던 그는 케루스키 전사 무리를 상대로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BC 2년에 아헤노바르부스를 로마로 불러들이고, 좀 더 노련한 군사 지휘관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로 교체했다.
BC 2년과 AD 4년 사이에 비니키우스는 게르마니아에 주둔한 5개 군단을 지휘했다. 그가 임명되었을 즈음, 역사가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가 "광범위한 전쟁"이라고 칭한 전쟁에서 게르만 부족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니키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승리의 영예(오르나멘타 트리움팔리아)를 받았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다시 AD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게르마니아 사령관으로 라인 강 경계에 보냈다. 그는 이후 2년 동안 북부 게르마니아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첫 해에 그는 칸니네파티"Canninefati"족, 카투아리"Chattuarii"족, 브루크테리"Bructeri"족을 정복하고 케루스키족을 제압했다. 곧이어 그는 케루스키족을 "로마인의 친구"라고 선언했다. 그는 5년에 카우키족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뒤, 육로와 강을 통해 게르마니아 심장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로마 함대와 군단이 엘베 강에서 합류했고, 티베리우스는 이 동쪽 지점에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고 여름이 끝날 무렵 엘베 강을 떠나 서쪽으로 진군했다. 이로써 그의 군대가 게르마니아를 관통하여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군대와 로마와 게르만 민족에게 보여주었지만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것은 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의 군대는 라인 강으로 돌아오는 길에 게르만 군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AD 5년 티베리우스의 원정 이후, 케루스키 부족의 지배층은 로마의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이전 몇 년 동안 권력 투쟁으로 한 무리가 로마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 부족에는 케루스키족과 로마 사이의 우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지배 혈통이 있었다. 당시 22세 정도였던 젊은 아르미니우스가 이 지배 일족에 속했다. 이 일족에 속한 그는 로마에 특별한 호의를 가졌다. 티베리우스는 케루스키족에 대한 통제권을 얻기 위해 이 지배 일족을 후원했으며, 그는 이 부족에게 게르만 민족 사이에서 자유로운 지위를 부여했다. 케루스키족을 계속 주시하기 위해 티베리우스는 리페에 월동 기지를 건설했다.
AD 6년까지 게르만 부족들이 정복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평정되었다는 것이 로마의 생각이었다. 마로보두스 왕이 이끄는 마르코만니족만이 남아 있었다. 로마는 게르마니아, 일리리쿰, 라이티아에서 12개 군단이 참여하는 대규모 협공을 계획했지만 일리리쿰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격은 중단되고 마로보두스와 화평을 맺고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로마 전략 중 하나는 골치 아픈 부족민을 재정착시키고, 그들을 더 잘 감시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그들의 정규 동맹들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에게 특별한 문제를 일으켰던 시캄브리족을 라인 강 서쪽의 새로운 지역에 재정착시키고, 그곳에서 그들을 더 면밀히 감시할 수 있었다.
바루스의 원정
AD 6년 초 레가투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와 집정관 레가투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13개 군단과 그 수행원으로 구성된 약 10만 명(중보병 군단병 65,000명, 기병 1만-2만 명, 궁병, 민간인 1만-2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수에비 부족이었던 마르코만니족의 왕 마로보두스에 맞섰다.
그 후 티베리우스는 일리리쿰의 발칸반도 지방에서 일어난 일리리아 대반란이라고 알려진 벨룸 바토니아눔으로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이시티아테스족의 바토(부족장), 브레우키족의 바토, 판노니아의 핀네스, 마르코만니족의 일원이 주도한 이 반란은 거의 4년 동안 지속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마로보두스에 대한 캠페인을 중단하고 그를 왕으로 인정하면서 휘하의 8개 군단(제8군단 아우구스타, 제15군단 아폴리나리스, 제20군단 발레리아 빅트릭스, 제21군단 라팍스, 제13군단 게미나, 제14군단 게미나, 제16군단 갈리카 및 알려지지 않은 부대)을 보내 발칸반도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서 돌아온 후 바루스의 신임받는 조언자가 되었지만, 비밀리에 전통적으로 적이었던 게르만 민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아마도 케루스키족, 마르시"Marsi"족, 카티족, 브루크테리족이 여기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당시 게르만 50개 부족 중 일부였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의 포악한 무례함과 피정복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잔인함에 대한 집단적 분노를 이용하여, 음침한 증오로 로마의 지배에 굴복한 무질서한 집단들을 통합하고 가장 적절한 때까지 동맹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르마니아에 있던 11개 군단 중 8개 군단이 발칸반도로 이동한 후, 오직 3개 군단만이 게르만 부족민들을 상대했다. 이는 아르미니우스가 바루스를 물리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바루스는 베저 강 서쪽에 위치한 여름 캠프에서 라인 강 근처의 월동 본부로 가는 도중에 아르미니우스가 조작한 지역 반란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에드워드 셰퍼드 크리시는 "이는 바루스에게 그 자리에 즉각 참석해야 하는 상황으로 제시되었지만, 그는 그것이 연합된 민족적 봉기의 일부라는 사실에 대해 세심하게 계획된 무지 속에 갇혀 있었고, 그는 여전히 아르미니우스를 자신의 순종적인 봉신으로 여겼다"라고 썼다.
지휘관과 그들의 군대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바루스의 재앙이라는 이름은 불운한 로마 사령관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덕분이다. 바루스는 장래가 촉망되는 지도자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가 젊은이였던 BC 22년에 쿠아이스토르(재무관)로 임명했는데, 그 직위는 보통 최소한 30세 이상을 요구했다. 그는 BC 15년에 제19군단을 지휘했고, 하급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BC 8년에 아프리카 총독으로, 7년에는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시리아 공직은 명망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제국 동부와 그 국경 국가들의 정치적 투쟁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직책이었다. 바루스는 BC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계승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등 자신이 유능한 총독임을 입증했다. 총독으로서 그의 궁극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당대 소식통들에 의해 논쟁의 여지가 있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바루스의 암묵적인 공직 부패를 비난하는 반면, 요세푸스(그 일이 있은지 수십 년 후에 기록)는 바루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어쨌든, 바루스는 총독 임기가 끝난 후 황제의 종조카와 결혼하여 황제의 측근 자리를 확보했다. 바루스는 AD 7년에 게르마니아 사령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로마에서 황제 곁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맥널리는 바루스가 군사적 능력 때문에 게르마니아에 배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수완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게르만 부족을 괴롭힌 파벌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황제가 그의 정치가로서의 능력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의 무자비함과 반란군에 대한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바루스의 이름과 업적은 제국 너머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로마 원로원에서는 높은 존경을 받았다. 라인 강에서 그는 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을 지휘했다. 이들은 이전에 승리의 영예를 수여받고 로마로 소환된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장군이 이끌었다. 모군티아쿰 병영도시의 월동장소에 있던 다른 두 군단은 바루스의 조카인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와 아마도 루키우스 아룬티우스가 이끌었다.
바루스는 처음에 게르마니아에서 5개 군단과 보조병을 지휘했다. 제국 초기에 각 군단의 병력은 120기의 경기병/정찰 기병의 지원을 받는 4,800명이었다. 일반적으로 공병 그룹과 장교를 합치면, 1개 군단은 약 5,000명의 전투원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군단에 통합되는 1,200명의 비전투 수행원은 포함되지 않았다. 바루스의 초기 지휘권은 약 25,000명(보조병 제외)으로 로마 최전방 군대의 약 20%를 차지했다. 그러나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병력이 실제로 그의 지휘하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며, 추정치는 일반적으로 20,000명에서 30,000명 사이이다. 처음의 5개 군단 중, 단지 3개 군단만이 전투에서 그의 지휘를 받았고(~15,000명), 9개의 소규모 보조 부대(~4,500명)의 지원을 받았다. 사상자, 질병 및 기타 원인으로 인한 월동 소모가 군단의 힘을 감소시켰을 것이다. 로마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많은 수의 민간인이 진영의 일부였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맥널리는 이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개혁은 군단병의 미혼화를 요구했는데, 이는 가족이 더 이상 진영 아래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맥널리는 민간인의 수를 수백 명으로 추정했는데, 대부분 상인들로 긴 캠페인 기간 동안 자신의 상품이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군대를 따랐을 것이다. 맥널리는 월동 소모율이 10%이고, 소모 후 보조병력이 약 4,000명이라고 가정하면, 약 3,800명의 비전투 수행원의 지원을 받는 17,000명의 전투원이 나오게 된다. 민간인을 합치면, 원정이 시작될 때 군대의 수는 약 21,000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 수비대를 분리해야 하는 필요성과 추가 소모가 결합되어 군대의 힘이 약화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전투 당시에는 이 숫자가 아마도 더 적었을 것이다.
로마의 주요 군대는 고도로 전문적이고 장비는 국가에 의해 갖춰졌다. 그들에게는 글라디우스(단검), 스쿠툼(커다란 방패), 필룸(투창), 헬멧, 메일갑옷, 일부 세그멘타타 갑옷으로 이루어진 표준화된 무기와 갑옷이 주어졌다. 보조 부대 장비는 로마가 지급하지 않았고, 대신 고국의 장비와 전투 방식을 대표하는 게르만 군대와 동등한 수준이었다.
아르미니우스
게르만 연합군은 케루스키 부족의 아르미니우스가 이끌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의 전술과 전략을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게르마니아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약 10세였을 BC 9년에 부족이 전투에서 드루수스에게 패한 뒤 로마인의 인질로 잡혔다. 그는 비록 인질이었지만, 귀족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귀족 교육을 받았다. 그는 성년이 되자 훗날 로마 보조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오르도 에쿠이스테르(로마 기병대)에 입대했다. AD 4년까지 그는 판노니아(발칸반도 북서부)에서 복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로마에 충성을 유지하면서 고국 게르마니아로 돌아왔다.
역사학자 맥널리는 로마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의 관점을 형성한 두 가지 중요한 사건, 즉 BC 11년 드루수스에 대항한 케루스키족이 이끈 매복과 BC 9년 케루스키족에 대한 드루수스의 승리를 제시한다. BC 11년의 매복 공격에서 케루스키족은 드루수스의 군대를 불리한 지형에 가두었고, 로마군은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탈출했다. 패배로 인해 인질이 되었지만 BC 8년 드루수스의 승리는 아르미니우스에게 잊히지 않았을 것이다. 맥널리는 이 사건들로부터 아르미니우스가 "로마인들은 패배할 수 있지만, 전술적인 유연성과 규율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그럴 것이다"라는 중요한 교훈을 추측했다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의 병력 규모는 게르만 민족에 대한 기록 문서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기껏해야 추측일 뿐이다. 따라서 추정치는 시작 가정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역사학자 아드리안 머독은 25,000명의 병력을 제안한다. 역사학자 피터 웰스는 군대가 넓은 지역에서 철수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17,000명에서 10만 명 사이의 다양한 추정치를 제시하지만, 로마군이 패주하는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 18,000명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제안한다. 역사학자 맥널리는 웰스의 인구통계학적 계산 방식에서 결함을 발견하고, 그의 상한 추정치인 10만 명은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여긴다. 역사학자 한스 델브뤼크는 관련된 각 부족의 전사들이 아마도 6,000명에서 8,000명이며, 총 2만 명에서 3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델브뤼크는 이들 군대가 단순한 농부가 아니라, 비록 로마군처럼 국가에 의해 무장되지는 않았지만, 그들 스스로 숙련된 군인이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게르만 군대는 전반적으로 로마군보다 장비가 더 나빴다. 대부분 갑옷이 없었고, 단순한 방패와 사냥용 창이나 도끼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전사의 부와 지위에 따라 장비 품질에 차등이 있었다. 지휘 역할을 맡거나, 부족장의 경비대에 속한 전사들은 무거운 창과 수많은 투창과 그 밖의 다양한 보조 무기들을 갖췄을 것이다. 그 전사들은 또한 고품질의 방패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옷은 매우 희귀했고, 패배한 로마군으로부터, 혹은 아마도 로마 보조병으로 복무할 때 전리품으로 획득했을 것이다.
전투를 위한 사전준비
단순한 캠페인
고대의 전투는 계절과 날씨의 제약을 받았다. 보통 캠페인 시즌은 3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끝나며, 그 시점에 군대는 월동 캠프로 돌아가곤 했다. AD 8년에서 9년의 겨울 동안, 바루스는 다음 해를 위한 단순한 캠페인을 계획했다. 군대의 서로 다른 부대들은 베테라(오늘날 독일 크산텐)에서 만나 라인 강을 건너, 도중에 수비대를 재보급하면서 케루스키족 영토로 진군한 다음, 명목상으로는 평화로운 케루스키 땅에 여름 작전의 근거지가 될 여름 캠프를 설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루스는 모르는 사이에 이미 배신을 당한 상태였다. 케루스키 땅에 여름 캠프를 설치한다는 발상은 여전히 바루스의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던 아르미니우스의 계략이었다. 아르미니우스의 고향에 있음으로써 케루스키족은 여름 동안 로마군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었고, 로마군이 월동 본부로 돌아가려면 더 먼 길을 가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긴 행군을 하는 동안 로마군은 아르미니우스에게 유리한 지형에서 매복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아르미니우스가 언제 로마에 등을 돌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어쩌면 인질로 있을 때였는지, 아니면 바루스 아래의 게르마니아에서 복무할 때인 더 늦은 시점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9년 초에 바루스를 속이고 자신의 대의를 위해 게르만 족장들을 모집하기 시작하면서 결심을 굳혔다. 아르미니우스가 로마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의심스러우며, 따라서 그는 장기간의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부족 연합체를 구축해야만 했다.
하절기 작전
로마군은 3월 어느 날 월동 캠프에서 나와 바루스의 계획을 따랐다. 병참 문제로 군대는 어려움을 겪었고, 안보도 허술했다. 여름 캠프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지금의 독일 민덴이나 그 근처였을 것이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바루스는 그 해 여름에 군사 행동을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았고, 대신 법정을 열고 정치적, 법적 의미에서 게르만 부족을 다루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맥널리는 여름을 서술한 동시대 연대기 작가는 파테르쿨루스뿐이었고, 그는 바루스를 싫어할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요점에 대한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기록들은 차례로 파테르쿨루스의 서술에 의존했고, 그래서 파테르쿨루스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부대들에게 있어서 전형적인 여름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훈련을 하거나 현지 도로와 요새를 강화하는 것과 같은 토목 공사에 시간을 소비했을 것이다.
보조병들과 함께 로마의 주력 군대에 배속된 아르미니우스에게 여름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초여름에 그는 때를 기다렸지만, 시간은 다 되어가고 있었고 그는 여전히 복병을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7월에 그는 일부 동맹군에게 로마군을 급습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그는 바루스에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군대를 분할하라고 조언했다. 바루스는 이에 동의하고 자신의 병력을 분산시켰다. 아르미니우스도 자신의 케루스키 보조병들에게 로마군의 작업 부대를 찾아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접근한 다음, 로마군이 한창일 때 그들을 배신하도록 지시했다. 역사학자 맥널리는 안보를 강화하지 않거나 더 큰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바루스를 질책한다.
아르미니우스의 신중한 계획은 그의 장인 세게스테스가 바루스에게 아르미니우스의 배신을 알렸을 때 거의 무너졌다. 그러나 세게스테스가 딸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고 아르미니우스에게 원한을 품었기 때문인지, 바루스는 이 보고를 믿지 않았다.
바루스의 운명적인 선택
늦여름이 다가오면서 불안이 고조되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바루스의 다른 고문들은 시즌이 불안을 가라앉히고 월동 캠프로 돌아갈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게르만 군대가 집결되기 전에 로마군이 떠날 뿐만 아니라, 로마군이 그들이 왔던 대로 잘 보호된 길을 따라 후퇴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아르미니우스의 계획을 좌절시켰을 것이다. 필사적인 도박 속에서 아르미니우스는 군대의 경로를 되돌아가는 대신 앙그리바리"Angrivarii"족에 대한 캠페인을 벌이면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앙그리바리족 영토를 통과하면 돌아가는 길이 더 단축되고, 로마군은 반란도 진압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루한 여름은 바루스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설 의지를 높였고, 그는 아르미니우스의 계획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9년 9월 7일 아침, 로마군은 철수를 위해 집결했다. 소집은 그해의 세 번째 급여일과 결합되어 많은 양의 주화가 군대에 지급되었다. 약 2천 년 후에, 밀도가 높은 주화들이 전투 장소의 고고학적 표지 역할을 하게 된다. 군대가 보급로 너머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하여 고위 지휘부가 앙그리바리족 캠페인에서 약탈을 승인했다는 소식은 군대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날 저녁,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케루스키 보조병들의 집결을 마치기 위해 떠나서 2, 3일 안에 본대로 복귀할 것을 전했다. 이는 그들의 마지막 회합이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명목상 가이드 역할을 하기 위해 소수의 케루스키족를 남겨두었지만, 그들의 진짜 목적은 스파이 역할이었다. 아르미니우스가 떠나자 로마군의 규모는 4분의 1로 줄어들었고, 정찰 능력도 크게 축소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앙그리바리족과 브루크테리족의 군대를 모으기 위해 서둘러 북쪽으로 향했다.
전투
9월 8일 아침, 로마군은 진을 떠나 그 지역의 울창한 숲을 계속해서 헤쳐나갔고, 이로 인해 이동 속도를 늦추고 군대는 점점 더 거리가 벌어졌다. 아르미니우스는 이제 앙그리바리족이 매복해 있는 칼크리즈를 향해 로마군이 진격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를 위해 브루크테리족 동맹군은 늦은 아침에 로마군 행렬을 공격했다.
행군 대열은 이제 15-20 km(9.3-12.4마일)까지 위험할 정도로 길게 뻗어 있었다. 이 상태에서 검과 커다란 랜스, 그리고 프레마이라고 불리는 날이 좁은 짧은 창으로 무장한 게르만 전사들이 공격을 받았다. 공격자들은 로마군 전체를 포위하고 불청객들에게 투창을 퍼부었다. 공격은 로마군을 지치게 하고 보급품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기 위한 짧은 교전이었다. 브루크테리족은 재빨리 철수했고, 아마도 로마군 내에 있던 케루스키 스파이들을 데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
폭우가 쏟아지면서 로마군의 운은 더욱 나빠졌다. 전진할 수 없게 된 바루스는 군대에 진을 치도록 명령했다. 튼튼한 캠프가 세워지고, 바루스는 전쟁 회의를 소집했다. 사상자 보고에 따르면 손실은 경미했지만, 수송 수레들과 정찰 기병이 특히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군은 탈출을 위해 야간 행군을 감행했지만, 아르미니우스가 칼크리즈 언덕 기슭에 설치한 또 다른 함정으로 진군했다. 그곳은 로마군이 행군할 수 있는 모래가 뒤덮인 좁고 기다란 평지가 언덕으로 제한되어 있고, 숲 가장자리와 큰 늪지대 사이는 불과 100미터(330피트) 정도의 간격밖에 되지 않았다. 길은 참호로 더 막혀 있었고, 숲 쪽으로는 길가를 따라 흙벽을 쌓아 게르만족 연합군이 엄폐물에서 로마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 로마군은 필사적으로 벽을 향해 뛰쳐나갔지만 실패했고, 바루스 다음으로 높은 장교인 레가투스 누모니우스 발라는 기병대와 함께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그는 게르만족 기병대에게 추월당하고 그 직후 전사하는 바람에 그 퇴각은 헛된 일이었다. 그런 다음 게르만족 전사들이 전장으로 쳐들어가 붕괴하고 있는 로마군을 학살했다. 바로스는 자살했고, 벨레이우스는 지휘관 중 프라이펙투스 케이노니우스가 항복한 뒤 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동료인 프라이펙투스 에기우스가 운이 다한 군대를 이끌다가 전사했다고 적었다.
로마군의 사상자는 15,000-20,000명으로 추정되며, 많은 장교들이 승인된 방식으로 검을 향해 쓰러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타키투스는 많은 장교들이 솥에 삶아지고 뼈가 의식에 사용되는 등 게르만 군대에 의해 토착 종교 의식의 제물로 바쳐졌다고 썼다. 다른 이들은 몸값이 지불되고 일부 평범한 병사들은 노예가 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모든 기록이 완벽한 로마의 패배를 강조하고, 칼크리즈에서 6,000점의 로마 장비가 발견되었지만 확실히 게르만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신발 뒤꿈치의 일부) 밖에 없어 게르만족의 손실은 거의 없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승자들은 전사들의 시체를 치웠을 가능성이 높고, 전사들의 장비를 그들과 함께 묻었던 관행이 게르만 유물이 없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게다가, 수천 명에 달하는 게르만 병사들이 그들의 부실한 장비 대신 로마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 발굴에서는 "로마인"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또한, 게르만 민족은 가죽과 같은 부패하기 쉬운 유기 물질과 로마 군단병보다 금속을 덜 착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승리는 라인 강 동쪽에 있는 로마의 모든 요새, 수비대, 도시(최소 2곳)를 완전히 휩쓸었고, 바루스의 조카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지휘하는 게르마니아에 남아있던 두 개의 로마 군단은 라인 강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었다. 오늘날 할테른 암 제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은 알리소 요새는 몇 주, 아마도 몇 달 동안 게르만 동맹군을 저지했다. 상황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자, 토이토부르크 숲의 생존자들을 동반한 루키우스 카이디키우스 휘하의 수비대는 포위망을 뚫고 라인 강에 도달했다. 그들은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2개 군단으로 라인 강에서 로마 방어군을 조직하고, 티베리우스가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여 아르미니우스가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를 침공하는 것을 막기까지 충분히 오랫동안 저항했다.
여파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이후 게르마니아의 정치적 상황. 분홍색은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반로마 게르만족 연합군 지역이다. 짙은 초록색은 로마인이 직접적으로 보유한 영토, 노란색은 로마인의 클리엔테스 지역이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The Twelve Caesars)에 따르면, 패배 소식을 듣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너무 충격을 받아 궁전 벽에 머리를 부딪힌 채 서서 계속해서 소리쳤다.
퀸틸리 바레, 레기오네스 레데! (퀸틸리우스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줘!)
로마인들은 군단번호 XVII, XVIII, XIX를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패배를 딛고 다시 창설된 다른 군단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이 전투는 40년 전 내전이 끝나고 의기양양한 로마의 팽창기를 갑자기 끝냈다.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는 효과적인 통제권을 장악하고 전쟁의 지속을 준비했다. 잃어버린 군단을 대신하여 제2군단 아우구스타, 제20군단 발레리아 빅트릭스, 제13군단 게미나가 라인 강으로 파견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또다른 가장 강력한 게르만족 통치자인 마르코만니의 왕 마로보두스에게 반로마 동맹을 제안하면서 바루스의 잘린 머리를 보냈다. 마로보두스는 이를 거부하고 매장을 위해 머리를 로마로 보냈으며 이어지는 전쟁 내내 중립을 지켰다. 그 후에야 두 게르만족 지도자 사이에 짧고 결론이 나지 않은 전쟁이 벌어졌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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