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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이스라엘

[북이스라엘] 여호람

by 금곡동로사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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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람 왕을 상상한 그림, 16세기 유럽 / 오므리 왕조 시대의 군사 캠페인

 

여호람(BC 852-841년 경)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아홉 번째 왕이었다(왕하 8:16, 왕하 8:25-29). 그는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자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형제였다.

 

왕하 8:16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여호람 5년에 (또 다른) 여호람이 유다의 왕이 되었다. 같은 장에서 이스라엘의 여호람과 유다의 여호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통치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 18년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여 12년 동안 통치했다(왕하 3:1).

 

전임자들과 달리 여호람은 바알을 숭배하지 않았고 아마도 아합이 자신과 이세벨의 숭배를 위해 이스르엘에 있는 궁전 근처에 세웠던 바알의 기둥을 제거했다(왕하 3:2). 그러나 왕하에서는 그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 이끌었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고 말한다. 유다의 여호사밧과 함께 여호람은 모압 왕 메사를 공격했다. 아람-다마스쿠스와 북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에서 엘리사는 여호람과 친구가 되어 적의 계획을 드러냈다. 그 후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도시에 식량이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여호람은 선지자를 참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풍요의 시기가 임박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포위 공격이 곧 풀리고 도시의 식량 공급이 보충되었으며 왕과 선지자 사이의 옛 관계가 회복되었다.

 

엘리사가 예언한 대로(왕하 8:12) 아람 왕 하사엘이 다마스쿠스에서 격렬하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여호람은 그의 조카 유다 왕 아하시야와 동맹을 맺었다. 두 왕은 아람에서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나섰지만 전투는 실패했다. 여호람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회복을 위해 이스르엘로 물러났다. 길르앗 라못에서의 패배는 재앙이 되었다. 그 결과 여호람이 이스르엘에서 회복하는 동안 그의 장군 예후가 반란을 일으켰다. 예후는 도망하는 여호람의 등 뒤에서 화살로 처형했고 그의 시신은 나봇의 땅을 불법적으로 훔친 부모의 죄에 대한 형벌로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져졌다. 여호람과 그의 다른 가족의 죽음으로 아합 왕조는 끝났다. 예후는 북이스라엘의 왕좌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했다.

 

예후에게 죽은 여호람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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