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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이스라엘

[북이스라엘] 예후

by 금곡동로사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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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 왕을 상상한 그림, 16세기 유럽 / 샬마네세르 3세의 블랙 오벨리스크에 묘사된 "오므리 땅 사람들의 예후"의 공물

 

예후는 여로보암 1세 이후 아합의 집을 멸절시킨 것으로 유명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열 번째 왕이었다. 그는 님시의 손자이자 아마도 오므리의 증손자인 여호사밧의 아들이었다. 그의 통치는 28년(BC 841-814년 경) 동안 지속되었다.

 

 

왕으로 선포

 

전임자 여호람은 그의 누이 아달랴의 아들인 조카, 유다 왕 아하시야와 함께 참전한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회복을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왔다. 열왕기에 따르면 선지자 엘리사는 제자들 중 한 명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당시 군 사령관이었던 예후를 동료들과 분리하여 그곳의 골방에서 예후를 왕으로 삼는 기름을 붓고 아합의 집에 대한 신성한 심판의 대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도록 명했다. 제자는 이 지시를 따랐고 완료 후 도망쳤다. 예후는 처음에 그 제자를 "미친 사람"이라고 일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름 부음에 대해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의 동료들은 나중에 열정적으로 나팔을 불고 그를 왕이라고 선포했다.

 

 

이스르엘과 여호람과 이세벨의 죽음

 

선택한 무리와 함께 예후는 여호람 왕에 대한 음모를 계획하고 몰래 이스르엘에 들어갔다. 여호람 왕은 도망치려 했지만 예후는 그의 심장을 관통하는 화살을 쏘았다. 예후는 나중에 여호람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해한 나봇의 복수를 위해 그의 시체를 나봇의 포도원에 던졌다(왕하 9:26). 아하시야 왕은 여호람의 죽음을 보고 달아났지만 예후는 그에게 상처를 입혔으며 아하시야는 므깃도로 도망쳐 그곳에서 죽었다.

 

예후의 반란 / 여름 궁전이 있는 이스르엘, BC 8세기 / BC 9세기 아합 왕 시대의 므깃도

 

예후는 이스르엘에 있는 궁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세벨은 궁전 창문에서 멸시하며 그를 시므리 왕에 빗대어 조롱했다. 예후는 나중에 이세벨의 환관에게 그녀를 궁전 창밖으로 내던지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세벨은 즉시 죽임을 당했다. 예후는 그녀의 몸을 짓밟은 후 왕실의 후손으로 적절한 매장을 마련하기로 결정했지만 개들이 먹어치워 그녀의 두개골, 손, 발만 남았다.

 

이제 이스르엘의 주인이 된 예후는 사마리아의 수장들에게 모든 왕실 왕자들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하는 편지를 썼다. 그들은 명령대로 행했고 다음날 예후가 명령한 대로 성문 밖 두 더미에 70개의 머리를 쌓았다. 아합의 온 가족이 죽임을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후는 "목자가 양털 깍는 집"에서 마흔두 명의 "아하시야의 형제"(아하시야의 형제들은 이전에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었기 때문에(대하 21:17) 이들은 더 넓은 의미에서 조카나 사촌과 같은 아하시야의 친척이었을 것이다)를 만났다. 그들은 예후에게 왕실을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후는 "양털 깍는 집 웅덩이"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예후 / 이세벨과 예후 / 개들이 먹어치운 이세벨

 

예후가 오므리 가문을 학살한 후, 그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나 자신이 친 여호와 파라고 확신했다. 여호나답은 재빨리 그와 동맹을 맺고 함께 수도에 들어갔다. 그는 사마리아를 장악하고 바알 숭배자들을 의식에 초대하고 그들을 가두어 죽였다(왕하 10:19-25). 그 후 그는 그들의 우상과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을 변소로 만들었다(왕하 10:27).

 

예후의 피의 권력 장악과 단과 벧엘의 황금 송아지에 대한 관용(성서에서 야훼로부터 "타락한" 것으로 정죄 받음) 외에는 그의 통치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길르앗, 갓, 르우벤, 므낫세 땅에 있는 요르단 강 너머의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를 통해" 그의 군대를 패배시킨 아람 왕 하사엘에 의해 심한 압박을 받았다(왕하 10:32).

 

아합의 집을 파괴한 공로로 야훼는 네 세대의 왕이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도록 허락함으로써 예후가 열성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 것에 대한 상을 주셨다(왕하 10:30). 예후와 그의 후손 여호아하스, 여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는 10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서에 따르면, 예후 가문은 이스르엘에서 예후의 학살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을 아시리아인의 손에 의해 받았다(호 1:4-5).

 

 

블랙 오벨리스크

 

히브리 성경 이외에도 예후는 아시리아 문서에 등장하는데 블랙 오벨리스크에는 그가 샬마네세르 3세 앞에서 땅에 키스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maddattu ša Ia-ú-a... kaspu mâdu "예후의 찬사... 많은 은"). 아시리아 문서에서 그는 단순히 "오므리의 아들"(아카드어 : mār Ḫumri, 아마도 그가 이스라엘 왕국을 가리키는 아시리아의 후일 명칭인 '오므리 가문'의 통치자임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이라고 되어 있다. 이 공물은 BC 8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스라엘인을 묘사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오벨리스크에 따르면 예후는 페니키아와 유다와의 동맹을 끊고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BC 841-840년, 블랙 오벨리스크, 예후 왕의 공물을 소지한 사절단의 일부 / 샬마네세르 3세에게 바치는 예후의 사절단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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