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 잉글랜드 그레이터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 맷 버스비 경 웨이
· 필드 : 105 × 68 미터
· 좌석 : 74,140석
올드 트래포드는 잉글랜드 그레이터 맨체스터의 올드 트래포드에 있는 축구 경기장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이다. 74,140석을 가진 영국에서 가장 큰 클럽 축구 경기장(그리고 웸블리 스타디움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축구 경기장)이며 유럽에서 11번째로 큰 경기장이다. 올드 트래포드 크리켓 구장과 인접한 트램 정류장에서 약 0.5 마일(800 미터) 떨어져 있다.
보비 찰턴 경에 의해 "꿈의 극장(The Theatre of Dreams)"라는 별명이 붙은 올드 트래포드는 1910년부터 유나이티드의 홈이었지만 1941년부터 1949년까지 클럽은 2차 세계 대전 폭격 피해로 인해 지역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인 메인 로드를 함께 사용했다. 올드 트래포드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노스, 웨스트, 이스트 스탠드를 증축하는 등 몇 차례 확장을 거쳐 경기장을 원래 수용 인원인 8만 명으로 거의 되돌렸다. 향후 확장에는 사우스 스탠드를 증축하여 수용 인원을 약 88,000으로 늘릴 가능성이 있다. 경기장의 관중 레코드는 1939년에 기록되었으며, 76,962명의 관중이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그림즈비 타운 간의 FA컵 준결승전을 지켜보았다.
올드 트래포드는 FA컵 결승전, 두 차례의 결승 재경기를 주최했으며 정기적으로 대회 준결승전의 중립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잉글랜드 경기, 1966년 월드컵 경기, 유로 96 및 2012년 하계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 축구 대표 경기 포함), 2003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렸다. 축구 외에는 2020년을 제외한 매년 럭비 리그의 연간 슈퍼 리그 그랜드 파이널이 열리는 장소이며 2000년과 2013년 럭비 리그 월드컵 결승전이 열렸다.
역사
건설 및 초창기
1902년 이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뉴턴 히스(Newton Heath)로 출발했는데, 당시 그들은 처음에는 노스 로드를 사용하다가 클레이턴의 뱅크 스트리트에서 경기를 했다. 그러나 두 땅 모두 자갈이 많고 배수가 되지 않아 땅이 패이는 열악한 조건으로 인해 버려졌고 뱅크 스트리트는 인근 공장의 매연으로 고통받았다. 그리고 클럽이 파산에 가까워지고 이름이 변경된 후 1909년에 새로 회장이 된 존 헨리 데이비스는 뱅크 스트리트의 그라운드가 최근 1부 리그와 FA컵에서 우승한 팀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는 새로운 경기장 건설을 위한 기금을 기부했다. 경박하게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던 데이비스는 맨체스터 주변에서 적절한 장소를 찾아 올드 트래포드의 워윅로드 북쪽 끝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브리지 워터 운하에 인접한 땅에 정착했다.
다른 여러 경기장을 설계한 스코틀랜드 건축가 아치볼드 리치가 설계한 이 구장은 원래 10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남쪽 스탠드는 지붕이 설치되었고 나머지 세 개의 스탠드는 지붕이 없는 테라스 방식으로 되었다. 토지 구입을 포함하여 경기장 건설은 원래 6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비용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의도한 수용 인원에 도달하는 데는 예상보다 3만 파운드가 추가로 들었고 J. J. 벤틀리 클럽 총무의 제안에 따라 수용 인원은 약 8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적료가 여전히 1,000 파운드 정도였던 당시에 사용된 건설 비용은 클럽이 "머니백스(엄청나게 부유한) 유나이티드"라는 별칭으로 불리도록 했으며 데이비스가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로 계속되었다.
1908년 5월 아치볼드 리치는 축구장 건설 부지와 인접한 곳에 철도 차고지를 가진 체셔 선로 위원회(CLC)에 편지를 보내 철도 선로 옆에 있는 관람석 건설에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설득했다. 보조금은 대출금이 상환될 때까지 매년 관중 입장료의 절반 또는 5년 동안 연간 2,000 파운드의 비율로 상환되는 1만 파운드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클럽 자체와 두 개의 지역 양조장에서 대출을 보증했고 클럽 회장 존 헨리 데이비스가 의장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CLC는 제안을 거절했다. CLC는 새 경기장 근처에 새 역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며 연간 2,750 파운드로 추산한 요금이 역 건설에 드는 비용 9,800 파운드를 상쇄할 것으로 예상했다. 트래포드 파크 역은 결국 지어졌지만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아래쪽에 위치했다. CLC는 나중에 경기장 바로 옆에 목재로 지은 플랫폼 하나가 있는 수수한 역을 건설했으며 1935년 8월 21일에 문을 열었다. 처음에 역명은 유나이티드 풋볼 그라운드로 명명되었지만 1936년 초에 올드 트래포드 풋볼 그라운드로 변경되었다. 경기가 있는 날에만 맨체스터 중앙 기차역에서 증기 기관차가 순환 운행되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풋볼 그라운드로 알려져 있다.
건설은 Messrs Brameld와 Smith of Manchester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1909년 후반에 완료되었다. 1910년 2월 19일에 유나이티드는 리버풀을 초청하여 첫 경기를 가졌다. 그러나 리버풀이 4-3 승리를 거두면서 홈 팀은 팬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지 못했다. 경기에 참석한 한 기자는 구장을 "내가 본 것 중 가장 멋지고, 가장 넓고, 가장 눈에 띄는 경기장이다. 축구장으로서 세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경기장이 맨체스터와 이렇게 경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 팀의 홈인 것은 영광이다."라고 보도했다.
1923년 웸블리 스타디움이 건설되기 전에 FA컵 결승전은 올드 트래포드를 비롯한 잉글랜드 전역의 여러 곳에서 개최되었다. 그중 첫 번째는 1911년 브래드포드 시티와 뉴캐슬 유나이티드 간의 FA컵 결승전 재경기였는데,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열린 결승전 경기가 연장전 이후 무득점 무승부로 끝난 후였다. 브래드포드는 58,000명이 지켜보는 경기에서 지미 스피어스가 득점하여 1-0으로 이겼다. 구장의 두 번째 FA컵 결승전은 셰필드 유나이티드와 첼시 간의 1915년 결승전이었다.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5만 명에 가까운 관중 앞에서 3-0으로 승리했으며 선수들 대부분이 군대에 있었기에 결승전은 "카키 컵 결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0년 12월 27일, 올드 트래포드는 2차 세계 대전 전에 가장 많은 관중을 기록한 유나이티드의 리그 경기를 치렀다. 관중 70,504명이 레드 데블스가 아스톤 빌라에게 3-1로 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26년 4월 17일에 잉글랜드가 49,429명의 관중 앞에서 스코틀랜드에 1-0으로 패한 첫 축구 대표팀 경기가 열렸다. 일반적이지 않게 올드 트래포드의 관중 레코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경기가 아니었다. 1939년 3월 25일 76,962명의 사람들이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그림즈비 타운 간의 FA컵 준결승전을 관람했다.
전시 폭격
1936년 35,000 파운드로 보수 공사를 하면서 80야드 길이의 지붕이 유나이티드 로드 스탠드(현재는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에 처음으로 추가되었으며 1938년에는 남쪽 코너에 지붕이 추가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서 올드 트래포드를 창고로 사용하겠다는 요청이 있었다. 축구는 경기장에서 계속 진행되었지만 1940년 12월 22일 독일의 트래포드 파크에 대한 폭격으로 인해 스톡포트 카운티를 상대로 열릴 크리스마스 경기가 스톡포트의 구장으로 바뀌어야 할 정도로 경기장이 손상되었다. 1941년 3월 8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축구가 재개되었지만 1941년 3월 11일에 또 다른 독일의 공습으로 경기장의 많은 부분, 특히 메인 스탠드(현재의 사우스 스탠드)를 파괴하여 클럽의 운영을 유나이티드 회장인 제임스 W. 깁슨이 소유한 콘브룩 콜드 스토리지로 이전하도록 만들었다. 깁슨이 압박하여 전쟁 피해 위원회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잔해물 철거를 위해 4,800 파운드를, 스탠드를 재건하기 위해 17,478 파운드를 부여했다. 경기장을 재건하는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지역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 메인 로드에서 1년에 5,000 파운드와 관중 입장료를 일정 비율로 지불하고 "홈"경기를 치렀다. 클럽은 메인 로드의 임대가 도움이 되지 않는 15,000 파운드의 부채가 있었고 스토크의 노동당 의원 엘리스 스미스는 정부에 클럽의 보상 패키지를 늘리도록 청원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지붕이 없었지만 올드 트래포드에서 거의 10년 만인 1949년에 리그 경기가 재개되었다. 1949년 8월 24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유나이티드의 첫 번째 경기가 열렸으며 41,748명의 관중과 함께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3-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마스터플랜 완성
1951년에 메인 스탠드의 지붕이 복원되었고 곧이어 나머지 스탠드 3개가 덮였으며 1959년에 스트랫포드 엔드(현재의 웨스트 스탠드)에 지붕을 추가하는 작업을 하였다. 클럽은 또한 적절한 투광 조명 설치에 4만 파운드를 투자해서 평일 늦은 저녁에 열리는 유럽 대항전 경기에서 구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메인 로드를 대체했다. 필드에 방해되는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도록 메인 스탠드 지붕의 두 부분을 잘라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첫 번째 야간 경기는 1957년 3월 25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볼튼 원더러스 간의 1부 리그 경기였다.
이제 야간에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는 문제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 1966년 FIFA 월드컵이 빠르게 다가오고 경기장에서 3번의 조별 경기가 열리게 되면서 유나이티드 보드진은 유나이티드 로드(북쪽) 스탠드를 완전히 재설계해야 했다. 오래된 지붕 기둥은 1965년에 현대적인 스타일의 캔틸레버 지붕으로 교체되어 모든 관중이 완전히 방해받지 않고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했으며 35,000 파운드의 비용으로 2만 명의 관중(1만 명은 앉고 1만 명은 앞에 서서)을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다. 새로운 스탠드의 건축을 맡은 Mather & Nutter(현재 Atherden Fuller)는 스탠드의 구성을 재정비하여 앞쪽에 테라스를, 뒤쪽으로 더 넓은 좌석 공간을, 영국 축구장의 첫 번째 스카이 박스를 갖도록 재배치했다. 이스트 스탠드(유일하게 지붕이 없던 스탠드)는 1973년에 동일한 스타일로 발전되었다. 처음 두 개의 스탠드가 캔틸레버로 바뀌면서 클럽의 운영진은 다른 두 개의 스탠드에도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고 경기장을 보울 같은 경기장으로 전환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고안했다. 이러한 작업은 관중의 소음을 억제하고 선수들이 들어찬 관중의 효과를 느끼며 경기에 집중함으로써 구장의 분위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첼시와 리즈 유나이티드 간의 1970년 결승전 재경기에서 62,078명의 관중을 기록한 세 번째 FA컵 결승전이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렸다. 첼시는 경기에서 2-1로 승리했다. 또한 1968년에 인터콘티넨탈 컵 2차전이 열렸으며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가 1-1로 비긴 후 컵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대 영국에서 훌리건이 급격히 증가했고 1971년 칼을 던진 사건으로 인해 클럽은 국가 최초로 경계 펜스를 세웠으며 팬들은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에서 제한을 받았다.
1973년에는 스코어보드 엔드에 5,500석을 추가하고 북동쪽 코너에 있는 수동 스코어 보드를 전자식으로 교체하는 것과 함께 경기장의 지붕 전체를 완성하였다. 그런 다음 1975년 메인 스탠드에 고급 라운지를 추가한 것을 시작으로 3백만 파운드를 들여 확장을 했다. 라운지의 레스토랑에서 필드를 내려다볼 수 있었지만 시야는 여전히 지붕 기둥에 의해 가려졌다. 그런 까닭에 유나이티드 로드 스탠드와 스코어보드 엔드의 지붕과 마찬가지로 메인 스탠드 지붕은 캔틸레버 지붕으로 대체되었다. 그런 다음 고급 라운지와 캔틸레버 지붕을 스탠드의 전체 길이로 확장하여 클럽 사무실을 남동쪽 코너에서 메인 스탠드로 이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남동쪽 모서리 부분은 1985년에 좌석 구역으로 교체되어 경기장의 총 좌석 수는 25,686명(전체 56,385명)이 되었다. 경기장의 3면 주변에 캔틸레버 지붕이 완성됨에 따라 1987년에는 오래된 투광 조명 철탑을 교체하고 지붕 안쪽 가장자리에 투광 조명을 한 줄로 부착할 수 있었다.
전체 좌석으로 전환
2차 세계 대전 이후 구장이 개선될 때마다 수용 인원은 꾸준히 감소했다. 1980년대까지 수용 인원은 원래 8만 명에서 약 6만 명으로 감소했다. 테일러 보고서가 권고한 1990년에 수용 인원은 훨씬 더 떨어졌고, 정부는 1부와 2부 리그의 전체 경기장에서 남아있던 입석을 모두 좌석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스트랫포드 엔드의 스탠딩 석 전체를 3-5백만 파운드의 비용으로 새로운 스탠드로 교체하려는 계획과 캔틸레버 지붕을 대폭 변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세 면의 스탠드 앞에 있는 스탠딩 석 제거를 포함한 이 강제 전환은 비용을 약 1천만 파운드로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올드 트래포드의 수용 능력을 사상 최저 수준인 약 44,000명으로 줄였다. 또한, 클럽은 1992년에 풋볼 트러스트로부터 테일러 보고서와 관련된 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가능한 200만 파운드 중 140만 파운드만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클럽의 성공과 1990년대 초 인기가 많아짐에 따라 더 많은 발전이 이루어져야 했다. 1995년에 30년 된 노스 스탠드가 철거되었고 올드 트래포드는 유로 96에서 3번의 그룹 경기, 8강전과 준결승전이 열릴 준비를 갖추기 위해 신속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클럽은 유나이티드 로드의 부지 중 20 에이커(81,000㎡)에 이르는 트래포드 파크 산업 지구를 1995년 3월에 920만 파운드에 구입했다. 공사는 1995년 6월에 시작되어 1996년 5월에 완공되었으며 시즌 동안 스탠드의 3단 중 아래의 2개 단이 사용되었다. Atherden Fuller의 힐스톤 로리가 프로젝트 및 건설 관리자로, 캠벨 리드 힐이 구조 엔지니어로 설계했으며 새로운 3단 스탠드는 총 제작 비용이 1,865만 파운드이고 수용 인원은 약 25,500으로 전체 수용 인원을 55,000 이상으로 늘렸다. 캔틸레버 지붕은 뒤쪽 벽에서 앞쪽 가장자리까지 58.5 미터(192 피트)로 유럽에서 가장 큰 지붕이다. 향후 몇 년 동안 더 많은 성공을 거두면서 더 많은 발전이 보장되었다. 먼저, 이스트 스탠드에 두 번째 단이 추가되었다. 2000년 1월에 개장한 스타디움의 수용 인원은 약 61,000명으로 증가하였고 얼마 후, 웨스트 스탠드의 2단이 개장되어 7,000석을 추가하면서 수용 인원을 68,217명으로 늘렸다. 이제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클럽 경기장일 뿐만 아니라 영국 전체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었다. 올드 트래포드는 3년 후 밀란과 유벤투스 간의 2003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리면서 첫 메이저 유로피언 결승전을 개최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구 웸블리 스타디움이 철거된 후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은 다른 곳에서 경기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팀은 버밍엄의 빌라 파크에서 뉴캐슬의 세인트 제임스 파크까지 다양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며 전국을 순회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올드 트래포드는 잉글랜드의 홈경기 23회 중 12회를 치렀으며 이는 다른 어떤 경기장보다 많은 횟수이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가장 최근의 대표팀 경기는 2007년 2월 7일 잉글랜드가 스페인에 1-0으로 패한 경기였다. 이 경기는 58,207명의 관중 앞에서 치러졌다.
2006년 확장
2005년 7월과 2006년 5월 사이에 발생한 올드 트래포드의 가장 최근 확장은 구장의 북서쪽 및 북동쪽 모서리에 두 번째 단을 추가하여 약 8,000석이 증가했다. 새로운 좌석의 일부는 2006년 3월 26일 69,070명의 관중이 들어와 새로운 프리미어리그 기록을 세웠을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기록은 2007년 3월 31일 당시 정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상승했다. 유나이티드가 블랙번 로버스를 상대로 4-1로 이겼을 때 76,098명의 관중이 들어와 114석(총 76,212석 중 0.15%)이 비어있는 상태로 남았다. 2009년에 경기장 좌석 개편으로 수용 인원이 255명 줄어든 75,957명으로 되었다. 이는 클럽의 관중 레코드가 최소한 다음 확장까지 유지될 것을 의미한다.
올드 트래포드는 2012년 하계 올림픽 축구 대회에서 여러 경기를 치렀다. 이 스타디움은 남자 토너먼트에서 5번의 그룹 경기, 8강과 준결승을 치렀고, 여자 토너먼트에서 한 번의 그룹 경기와 준결승전을 치르며 그곳에서 첫 번째 여자 국제 경기를 치렀다. 2006년부터 올드 트래포드는 가수 로비 윌리엄스와 배우 조나단 윌크스가 처음 주최한 비엔날레 자선 경기인 Soccer Aid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2008년에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경기가 열렸다.
시설 및 구조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은 공식적으로 알렉스 퍼거슨 경(북쪽), 이스트, 보비 찰턴 경(남쪽), 웨스트 스탠드로 알려진 4개의 지붕이 있는 올인원 스탠드로 둘러싸여 있다. 각 스탠드에는 최소 2개의 단이 있다. 보비 찰턴 경 스탠드는 건축 제한으로 인해 하나의 단만 있다. 각 스탠드의 하단부는 하단부와 상단부로 나뉘며 하단부는 1990년대 초에 입석에서 전환되었다.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
이전에 유나이티드 로드 스탠드와 노스 스탠드로 알려진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는 높이가 3단으로 4개의 스탠드 중 많은 부분인 약 26,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또한 고급 라운지와 접객실에 소수의 팬을 수용할 수 있다. 1996년에 현재 상태로 문을 열었으며 이전에는 1단으로 된 스탠드였다. 그라운드의 메인 스탠드로서 레드 카페(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테마 레스토랑/바)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박물관 및 트로피 룸을 포함하여 많은 인기 시설을 갖추고 있다. 1986년에 세계 최초로 개관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박물관은 1998년 재개발된 노스 스탠드로 옮길 때까지 구장의 남동쪽 코너에 있었다. 박물관은 1998년 4월 11일에 펠레가 개장에 초청되었고 1998년 192,000명에서 2009년 300,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노스 스탠드는 2011년 11월 5일 알렉스 퍼거슨 경의 클럽 매니저 25주년을 기념하여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필립 잭슨이 조각한 9 피트(2.7 미터) 높이의 퍼거슨 동상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최장수 감독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스탠드 밖에 세워졌다.
보비 찰턴 경 스탠드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 맞은편에는 이전에 올드 트래포드의 메인 스탠드였으며 사우스 스탠드로 알려진 바비 찰튼 경 스탠드가 있다. 1단 스탠드일 뿐이지만 보비 찰턴 경 스탠드에는 구장 대부분의 고급 라운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경기를 보러 올 수 있는 모든 VIP의 호스트 역할도 한다. 미디어 멤버는 사우스 스탠드 윗부분 중앙에 앉아 경기를 가장 잘 볼 수 있도록 한다. TV 중계용 기중기가 보비 찰턴 경 스탠드에 있어서 스탠드는 방송에서 가장 자주 비친다. 방송 스튜디오는 보비 찰턴 경 스탠드의 양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클럽 자체 TV 방송국인 MUTV는 이스트 스튜디오에 있고 BBC 및 Sky와 같은 다른 텔레비전 방송국은 웨스트 스튜디오에 있다.
선수단 벤치는 보비 찰턴 경 스탠드의 중앙에 있으며, 감독과 그의 코치에게 경기에 대한 높은 시야를 제공하기 위해 필드보다 높이 있다. 각 팀의 대기실은 1993년까지 사용되었던 오래된 선수들의 입장 터널을 가로질러 있다. 오래된 터널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경기장의 많은 부분을 파괴한 폭격으로 인해 1910년에 지어진 경기장의 유일하게 남은 부분이다. 2008년 2월 6일, 터널은 1958년 뮌헨 항공 재해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뮌헨 터널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현재 터널은 지상의 남서쪽 코너에 있으며 응급 서비스를 위한 입구로도 사용된다. 대형 차량의 접근이 필요한 경우 터널 위의 좌석을 최대 25 피트(7.6 미터)까지 올릴 수 있다. 터널은 TV 인터뷰 공간과 선수 라운지를 통해 선수 탈의실로 이어진다. 홈 및 원정 탈의실 모두 2018-19 시즌을 앞두고 재 개조되었으며 두 팀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넓어지고 분리되어 홈 팀과 원정 팀을 분리했다.
2016년 4월 3일, 사우스 스탠드는 60년 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데뷔한 클럽의 레전드 선수인 보비 찰턴 경을 기리기 위해 에버튼과의 프리미어리그 홈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보비 찰턴 경 스탠드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웨스트 스탠드
아마도 올드 트래포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스탠드는 스트랫포드 엔드라고도 알려진 웨스트 스탠드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열성적인 유나이티드 팬과 가장 시끄러운 팬이 있는 곳이다. 원래 2만 명의 팬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스트랫포드 엔드는 지붕이 마지막으로 설치된 스탠드이자 1990년대 초 좌석으로 강제 전환하기 전에 구장에 마지막으로 남은 전체가 입석인 스탠드였다. 1992-93 시즌 동안 일어난 스트렛포드 엔드의 공사는 Alfred McAlpine 회사가 담당했다. 2000년에 두 번째 단이 스트렛포드 엔드에 추가되었을 때 이전 "K 스탠드"의 많은 팬들이 그곳으로 이동하여 2단 전면에 있는 벽에 배너와 깃발을 걸기로 결정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문화에 뿌리내린 것은 스트렛포드 엔드였다. 데니스 로는 "스트랫포드 엔드의 왕"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으며 이제 스탠드의 2단 중앙홀에 로의 동상이 있다.
이스트 스탠드
올드 트래포드의 이스트 스탠드는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에 이어 두 번째로 캔틸레버 지붕으로 개조되었다. 스코어보드가 위치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스코어보드 엔드라고도 한다. 이스트 스탠드는 현재 거의 12,000명의 팬을 수용할 수 있으며 장애인 팬 섹션과 원정 섹션 모두가 위치해 있다. 원정 팬을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의 3단으로 재배치하는 실험이 2011-12 시즌 동안 수행되었지만 시간문제로 실험 결과를 제때 확인하지 못하고 지금의 위치로 배치했다. 장애인 구역은 간병인을 위한 무료 좌석과 함께 최대 170명의 팬을 수용한다. 올드 트래포드는 이전에 섹션으로 나뉘었으며 각 섹션에는 알파벳 문자가 순차적으로 할당되었다. 모든 섹션에 글자가 있었지만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K 스탠드이다. K 스탠드 팬들은 클럽에 대한 요란한 응원과 다양한 구호와 노래로 유명했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스트랫포드 엔드의 2단으로 옮겼다.
이스트 스탠드에는 클럽의 관리 센터가 있는 색유리 파사드가 있다. 이 사무실에는 인사이드 유나이티드의 직원, 공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잡지, 클럽의 공식 웹 사이트 및 기타 행정 부서가 있다. 이미지와 광고는 종종 이스트 스탠드의 전면에 새겨져 있으며 대부분은 클럽 스폰서가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광고하지만 뮌헨 항공 재해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8년 2월에 버스비의 아이들에 대한 찬사를 표시했다. 메가 스토어 위에는 2010년 알렉스 퍼거슨 경이 추월할 때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최장수 감독이었던 맷 버스비 경의 동상이 있다. 이스트 스탠드의 남쪽 끝에는 뮌헨 항공 재해 희생자에게 헌정된 명판이 있으며 뮌헨 시계는 이스트 스탠드와 사우스 스탠드의 교차점에 있다. 2008년 5월 29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첫 유러피언 컵 타이틀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보비 찰턴의 "연합 삼위일체"라는 클럽의 "삼위일체" 동상이 이스트 스탠드에서 맷 버스비 경 웨이 건너편 버스비 동상 바로 맞은편에 공개되었다.
앞으로
2009년에 유나이티드는 경기장의 수용 능력을 더욱 늘릴 계획을 계속해서 보유하고 있으며 다음 단계에서는 나머지 경기장과 달리 1단으로 남아있는 보비 찰턴 경 스탠드의 재개발을 가리켰다.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 개발과 북동쪽과 북서쪽 모서리를 증축하면 경기장의 수용 인원이 약 95,000명으로 증가하여 웸블리 스타디움(9만 명) 보다 더 큰 수용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개발은 경기장에 인접해 있는 철도 노선의 근접성과 그 위에 건설하여 철도 반대편에 최대 50 채의 주택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약 1억 파운드의 비용이 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그룹 자산 관리자는 맨체스터 주변의 클럽 소유 자산에서 얻은 수익과 관련하여 확장 계획이 진행 중임을 인정했다. "경기장에 대한 전략적 계획이 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우리의 의도가 아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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