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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탐험가

항해자 한노(Hanno the Navigator)

by 금곡동로사 2021.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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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가 발견한 섬의 삽화

 

항해자 한노(때때로 "한논"으로 쓰임, 그리스어: 아논)는 BC 5세기 카르타고의 탐험가였으며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그의 함대가 탐험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항해에 대한 유일한 출처는 그리스 주항기이다. 그의 항로에 대한 몇몇 현대 분석에 따르면, 한노의 탐험은 남쪽의 가봉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로코 이남으로 가지 않았다고 간주한다.

 

 

전기

 

한노라는 이름은 다른 많은 카르타고인들에게 붙여졌다. 한노를 논한 고대 작가들은 한노라는 정확한 인물을 식별할 수 있는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를 왕이라고 불렀고, 다른 이들은 라틴어 둑스(지도자 또는 장군) 또는 임페라토르(사령관 또는 황제)를 사용했다.

 

영국의 역사가 브라이언 허버트 워밍턴이 1960년에 쓴 글에 따르면, 학계의 일치점은 한노가 BC 5세기에 살았고 귀족인 마고 왕조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주항기(周航記)

 

한노의 보고서로 추정되는 그리스어 문헌이 남아 있다. 모순과 명백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은 카르타고의 원본 문헌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세기 스코틀랜드 지리학자 휴 머레이에 따르면, 주항기는 카르타고 문헌에 대한 로마의 체계적인 파괴로부터 남아있는 유일한 사료이다. 워밍턴은 이것이 "카르타고 '문학'의 표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썼다.

 

고대와 현대 작가들 모두 이 작품을 비판했다. 보고된 항해 거리와 방향을 기반으로 주항기에 기술된 장소를 찾으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문헌을 보다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학자들은 원문 비평을 시도했다. 궁극적으로,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 설명을 편집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묘사된 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던 반면 카르타고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업적에 대해 자랑할 수 있었다.

 

5세기에 문헌은 그다지 썩 좋지 않게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완전한 번역이 아니었다. 몇 가지 요약이 작성되었다. 요약된 번역본은 그리스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의 사무관에 의해 여러 차례 사본이 만들어졌다. 현재, 9세기와 14세기에 만들어진 두 권의 사본만이 있다.

 

이 필사본들 중 첫 번째 사본은 팔라티누스 그라이쿠스 398로 알려져 있으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도서관에서 연구할 수 있다. 다른 문헌은 그리스 아토스 산의 바토페디 수도원에서 발견된 14세기 초에 작성된 바토페디누스 655번 코덱스(고문서 필사본)가 있다. 코덱스는 영국 도서관과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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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작가의 설명

 

이 문헌은 대 플리니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아리아노스에게 알려졌다.

 

대 플리니우스

 

 카르타고의 힘이 절정일 때, 한노는 가데스[현재의 카디스]에서 아라비아 끝까지 이르는 항해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히밀코도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외딴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보내졌다. 

 

플리니우스는 실제 날짜를 몰랐기 때문에 시기를 모호하게 기록했을 수 있다.

 

아리아노스

 

아리아노스는 한노의 항해를 알렉산더의 아나바시스 말미에 언급하고 있다.

 

「 리비아인 한논은 카르타고에서 리비아를 왼편으로 두고 출항해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 외해로 항해하여 총 35일 동안 동쪽 방향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그는 물 부족, 타는듯한 열기, 바다로 분출하는 용암의 흐름과 같은 여러 가지 심각한 장애물을 만났다. 

 

헤로도토스

 

헤로도토스는 BC 430년 경에 모로코 해안의 카르타고 무역에 대해 기술했지만, 그가 한노의 항해 자체를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의심스럽다.

 

한노의 탐험 경로의 "화산(카메룬 산)"의 해석

 

원정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의 북서부 해안을 탐험하고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한노를 지휘관으로 하여 6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그는 지브롤터 해협을 항해하여 현재의 모로코 지역인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7개의 식민지를 개간하고, 대륙의 대서양 연안을 따라 훨씬 더 멀리 탐험했다. 한노는 여행 중에 다양한 토착민들을 만나 다양한 환영을 받았다.

 

황금 무역은 BC 5세기 이후 카르타고 제국의 토대였다. 그것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대한 카르타고의 탐험의 원초적인 동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노의 항해 목적은 서아프리카로 가는 황금 항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한노가 만난 고릴라이 수컷과 암컷을 상상한 삽화

 

고릴라이(Gorillai)

 

한노의 항해가 끝나갈 무렵, 탐험가는 털북숭이(털이 많은)와 야만적으로 묘사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섬을 발견했다. 남자들을 붙잡으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여자들 중 세 명이 잡혔다. 이들은 너무 사나워서 죽임을 당했고, 가죽은 카르타고로 가져가기 위해 보존되었다. 가죽은 한노의 귀환에 따라 유노 신전(타니트 또는 아스타르테)에 보관되었으며,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한노가 탐험한 지 약 350년 후인 BC 146년에 로마가 카르타고를 파괴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한노와 함께 여행하는 통역사들은 사람들을 고릴라이라고 불렀다.

 

「 우리는 남쪽의 뿔이라고 불리는 만에 도착했다. 이 만에는 호수가 있는 첫 번째 섬과 야생 야만인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섬이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많은 수는 털이 많은 몸을 가진 암컷들이었는데, 우리 [리시타이][리비아 부족인 나사모니아인이라고도 함] 통역자들은 "고릴라"라고 불렀다. 그들을 뒤쫓으면서, 우리는 어떤 수컷도 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가파른 절벽을 오를 수 있고 가능한 모든 것으로 자신을 방어하면서 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포획한 사람들을 물고 할퀴는 암컷 셋을 잡았고 그들은 따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죽이고 가죽을 벗겨 그들의 가죽을 카르타고로 가져왔다.

 

- 한노, 주항기 」

 

19세기에 고릴라를 묘사한 토마스 S. 새비지와 제프리스 와이먼은 이 종을 트로글로디테스 고릴라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고릴라이가 유인원의 한 종이라고 생각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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