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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탐험가

카리얀다의 스킬락스(Scylax of Caryanda)

by 금곡동로사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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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의 명을 받은 스킬락스가 카불 강을 내려가다 아톡 부근에서 인더스 강에 합류하여 바다로 향하는 모습을 나타낸 이미지

 

카리얀다의 스킬락스는 BC 6세기 말과 5세기 초의 그리스 탐험가이자 작가이다. 후대의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거나 제시되긴 했지만, 그의 저술은 소실되었다. 스킬락스의 주항기는 사실 그가 기록한 것이 아니다. 소위 가짜 스킬락스의 주항기는 약 BC 330년대 초에 플라톤 이후의 아카데미와 또는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 페리파토스(리케이온)의 영역에서 활동한 알려지지 않은 저자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탐험

 

스킬락스는 소아시아의 이아소스와 가까운 섬에 있는 작은 도시인 카리얀다 출신이다. 그는 아마도 카리아인으로 그리스어와 친숙하고 그의 저술에 사용했을 것이다. 스킬락스에 대해서는 후대의 그리스 작가들이 전하는 얼마 되지 않는 정보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헤로도토스는 그를 이오니아 출신의 선장으로 불렀다. 그는 아케메네스의 왕 다리우스 1세(BC 522-486)의 명으로 인더스 강을 따라 항해한 후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 수에즈에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에서:

다리우스는 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발견한 자였다. 인더스 강이 어디서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지 알고 싶어, 그는 믿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냈고, 그중 카리얀다의 스킬락스는 강을 따라 항해하도록 했다. 그들은 파크티키라 불리는 지역에 있는 도시 카스파티로스를 출발하여 하류를 따라 동쪽 방향으로 바다로 향했다. 여기서 그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30개월의 항해 끝에 이집트 왕이... 리비아를 일주하기 위해 페니키아인을 보낸 곳에 도착했다. 일단 항해가 완료되자 다리우스는 인도인을 정복하고, 그 지역의 바다를 이용했다. 따라서 동부 지역을 제외한 모든 아시아는 리비아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헤로도토스, 역사 4.44)


이 이야기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도시 카스파티로스와 파크티키 지역은 실제 위치로 추적되지 않았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간다라 근처 어딘가에 있다고 가정할 때, 어떻게 스킬락스가 이 내륙 국가에서 함대를 모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인더스 강은 동쪽이 아니라 남서쪽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부 해설자들은 스킬락스의 여정이 실제로 이뤄진 적이 있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킬락스의 서술과 다리우스의 신드 지역에 대한 지배권 획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이는 수에즈에서의 발굴로 이 같은 의구심은 이제 잠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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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구성했다. 데이비드 비바는 '카스파티로스'가 후대의 그리스 작가 헤카타이오스에 의해 '카스파피로스'로 기록되었다고 언급했으며, 두 이름 모두 페샤와르의 그리스어 철자로 알려진 '파스카피로스'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스킬락스는 카불 강을 따라 동쪽으로 항해하다가 아톡 근처의 인더스 강에 합류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인더스 자체가 동쪽으로 흘렀다는 생각은 헤로도토스나 그의 사료에 의한 오해인 것이 분명하다.

학자들은 스킬락스의 탐험이 단순한 탐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향후 다리우스의 정복을 위한 정찰을 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매튜 R. 크라이스트와 그랜트 파커에 따르면 "헤로도토스는 특히 정복 계획을 세울 때 타국 왕의 특징으로 지리적 호기심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옴스테드는 이것을 "스파이" 탐험으로 특징지었다. 탐사는 30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얼마 후 다리우스는 힌두시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방으로 스킬락스가 탐험한 땅을 자신의 제국에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작가들은 그곳을 "인도"라고 불렀다. 비록 헤로도토스가 사막의 서쪽(타르 사막)에 있다고 묘사한 이 지방의 범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묘사는 근본적으로 신드(인더스 중부와 하부 분지)로 제한하고 있다.

다리우스는 또한 나일 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의 완공을 의뢰하면서 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나일강에서 페르시아에서 바다로 가는 이 운하를 파라고 명령했다. 그 후 내가 명령한 대로 이 수로를 파서, 내 뜻대로 이 수로를 따라 이집트에서 배로 페르시아로 갔다.

이후 이집트와 지중해는 물론 인도와 페르시아 간의 해양 교류망이 구축되어 한동안 유지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른 세계 지도. 고대 그리스인은 인더스 강이 남독쪽으로 흐르고 그 아래 분지(오늘날의 신드 지방)를 인도로 생각했다
간다라와 페샤와르가 나타나 있는 오늘날 파키스탄 지도 / 페르시아 제국의 동부 최대 영역 / 스킬락스의 여정 경로, BC 490년경

 

작품

 

스킬락스는 아마도 페리플루스(주항)라는 제목의 여정에 대한 묘사를 기록하여 다리우스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 작품은 후대 작가들의 7개의 인용문을 제외하고는 소실되었다. 남아 있는 인용문은 그것이 단순한 일지일 뿐 아니라 사람, 풍경, 자연조건, 그리고 아마도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설명도 포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학자 클라우스 카트투넨은 작품이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 산문으로 쓰인 최초의 작품 중 하나였을 것이다. 헤카타이오스는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았고 헤로도토스는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남아있는 인용구들은 훌륭해 보인다. 하나는 트로글로디테스(동굴 거주자)에 대해, 다른 하나는 모노프탈믹(외눈박이 사람들)에 대해, 또 다른 하나는 헤노틱톤테스(아이를 하나만 낳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다. 트제트제스에 따르면, 스킬락스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지어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학자 R. D. 민스는 스킬락스가 토착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보고한 것으로, 그는 선의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킬락스의 주항기는 서방에 동방 사람들에 대한 최초의 설명을 제공했으며 이후 그리스 작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인도에 오래도록 사용되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인더스 지역의 사람들은 페르시아어로 히두시(Hiduš) 또는 힌두시(Hindush)로 불렸다. 만약 스킬락스가 초창기 h 소리를 발음하지 않는 그리스의 이오니아 방언으로 썼다면, 그는 그것을 인도스(복수형 "인도이")로 변형시켰을 것이다. 그들의 땅은 인디케("인도인"을 의미하는 형용사 형태)로 특징지어졌다. 헤로도토스는 이 용어를 페르시아어 히두시 및 힌두시와 동등하게 사용했지만, 페르시아 동부에 사는 모든 민족에게도 일반적으로 사용하여 상당한 모호성을 야기했다.

스킬락스는 고대 세계에서 유명했다. 스트라본은 그를 "고대 작가"로 언급했다. 수다에 따르면, 그는 헤로도토스 5.121에 언급된 그의 동시대의 밀라스의 헤라클리데스의 삶(타 카타 이라클레이딘 톤 밀라손 바실레아)을 썼다. (아마도 "BC 480년 경 수십 년 동안")

 

이집트의 파라오 운하. 네카우 2세의 이집트는 무너져가는 아시리아를 지원했지만 패배했다. 바빌로니아의 보복 가능성을 고려한 네카우는 바빌로니아 남부를 해상 침공하기 위해 나일과 홍해 사이에 운하 건설을 명했다. 하지만 운하를 통한 침입 가능성도 제기되어 건설은 중단되었다. 후대에 페르시아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 다리우스 1세가 건설이 중단된 운하를 완공시켰다

 

대중문화 속에서

 

비달 고어의 역사소설 카리얀다의 스킬락스에서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와 친숙한 사이여서 페르시아의 통치를 인도까지 확대하는 것에 대해 익살스러운 농담을 주고받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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