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아르코스(BC 360-300년 경)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에 있던 해군 장교 중 한 명이다. 그는 BC 326-32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캠페인에 이어 인더스 강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만을 지나 티그리스 강 하구에서 끝난 것으로 알려진 원정 항해로 유명하다.
성장기
크레타의 라토 출신으로 안드로티모스의 아들이며 그의 가족은 필리포스 2세의 치세 중 어느 시점에 마케도니아 암피폴리스에 정착했으며 (BC 357년 필리포스가 도시를 점령한 이후로 추정해야 함) 아마도 어린 소년이었을 것이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에리기오스, 그리고 다른 소년 시절 친구들처럼 알렉산드로스보다 확실히 나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안드로티모스가 마케도니아에 온 시기를 따지면 크레타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네아르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에리기오스, 라오메돈, 하르팔로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의 '멘토' 중 한 명이었으며, 픽소다로스 사건으로 인해 필리포스의 명으로 추방되었다. 유배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은 필리포스가 죽은 후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한 후에야 다시 소환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소환된 후, 이들은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BC 334/3년, 네아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먼저 임명한 사트라프 중 하나로 리키아와 팜필리아의 사트라프(총독)가 되었다. 에게 해를 위협하는 페르시아 함대에 대한 네아르코스의 해상 봉쇄는 알렉산드로스의 페니키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정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BC 328년, 그는 직위에서 해임되어 증원군을 이끌고 박트리아(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재합류했다. 오늘날 파키스탄의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지역에서 아오르노스를 포위한 후, 네아르코스는 특히 코끼리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 정찰 임무를 이끌도록 보내졌다.
인더스 강 항해
BC 326년, 네아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히다스페스에서 만든 함대의 제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트리라르코스(1년 단위로 부유한 시민에게 의무를 부여하는 전례 직책)는 재정적인 책임이었다. 즉, 네아르코스가 배를 위한 돈을 마련했고, 인더스 함대에는 타고난 선원이 아닌 다른 트리라르코스가 많이 있었다. 스트라본은 전나무, 소나무, 삼나무 목재를 충분하게 공급한 탁실라 부근의 함대 건조 장소에서 히말라야 산맥의 에모도스가 가깝다고 말한다. 처음에, 함대는 기병, 코끼리, 전리품 수레 등 알렉산드로스의 주요 군대의 지상 수행원들과 함께 마치 개선 열병식처럼 히다스페스를 따라 내려갔다. 아케시네스(체나브) 강과 인더스 강이 합류하는 곳에 알렉산드로스는 "알렉산드리아 이 엔 인도스"(인더스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는 도시를 세워 록사네의 부친 옥시아르테스의 사트라피에 할당하고 트라키아 부대가 거주하게 했다.
일부 선박이 파손되었고, 네아르코스는 강을 따라 내려가기 전에 남아서 수리를 감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조선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가 자격을 갖춘 유일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는 항해는 BC 326년부터 325년까지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인도 토착민 마을들을 점령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군이 파탈라(오늘날 파키스탄 신드 지역의 바흐마나바드)에 도착했을 때, 네아르코스는 17,000-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만 원정을 준비했고, 알렉산드로스는 게드로시아 사막을 통과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네아르코스는 인더스 강을 따라 항해한 유일한 그리스 해군 장교가 아니었다. 다리우스 대왕의 명 아래 카리얀다의 스킬락스도 수행했다.
네아르코스는 인더스 강에서 페르시아만으로 가는 항해를 위해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며 그는 이것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아리아노스의 인디카에서 광범위하게 인용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해군 제독이었지만, 함대를 지휘하는 위대한 항해술은 필요하지 않았다. 해군의 책임은 오네시크리토스에게 있었다. 네아르코스는 그의 탐험담을 인디케라는 저술로 엮었는데, 지금은 유실되었지만 아리아노스의 인디카와 스트라본의 게오그라피카(지리학)에 있는 내용의 일부를 알려주었다. 이 작품은 인도의 국경, 크기, 인구, 카스트, 동물군, 식물군, 문화, 군대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바빌론을 향한 귀향 항해를 묘사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네아르코스는 쌀, 사탕수수, 면직물, 직물과 같은 물품들이 인더스 계곡에서 어떻게 재배되고 제조되고 거래되는지 설명했다.
페르시아만 항해
몬순 장마와 강풍으로 인해 아라비아 해에 도달하는 것이 지연되었지만, 네아르코스는 파탈라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악천후를 대비하기 위해 마케도니아 함대는 인더스 강과 아라비오스(허브) 강어귀 근처에 진을 치고 적대적인 토착민에 맞서기 위한 요새로 돌담을 쌓았으며 소금기가 있는 물, 홍합, 굴, 맛조개로 생계를 유지했다. 24일 후, 네아르코스는 모론토바라(오늘날 파키스탄 카리치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마노라 섬) 항으로 계속 갔다. 모론토바라에 대해, 아리아노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런 다음 배의 노가 바위에 닿고 좌현과 우현에 닿을 정도로 서로 가까이 있는 두 개의 바위를 통과하여 약 300 스타드를 항해한 후 모론토바라에 정박했다. 항구는 넓고, 원형이며, 깊고, 잔잔하지만 입구는 좁다. 그들은 한 여성이 이 지구의 첫 번째 군주였기 때문에 그곳을 토착민들의 언어로 '레이디스 풀'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바위를 통과하고 안전해졌을 때, 그들은 거대한 파도와 거세게 흐르는 바다를 만났고, 게다가 절벽 가까이로 항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다음 날, 그들은 바다를 뚫기 위해 좌현에 섬을 두고 항해했으며 사람들은 섬과 해안을 가르는 수로라고 추측했을 정도로 해안과 매우 가까웠다. 전체 통로는 약 70 스타드였다. 해변에는 나무가 울창했고 섬 전체가 그늘진 숲으로 뒤덮였다. 날이 밝을 무렵, 그들은 좁고 험난한 통로를 통해 섬 밖을 항해했다. 왜냐하면 조수가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약 120 스타드를 항해한 후 아라비오스 강어귀에 정박했다. 하구에 크고 아름다운 큰 항구가 있었다. 그러나 식수는 없었다. 아라비오스 강의 하구는 바닷물과 섞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륙으로 약 40 스타드를 들어간 후 물웅덩이를 발견하고 물을 길어 돌아왔다. 항구 옆에는 화산섬과 사막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굴과 온갖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아랍인이 뻗어 있었다. 여기서부터 오레이탄스족의 영토가 시작된다. 그들은 이 방향으로 정착한 마지막 인도인이다.
모론토바라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레온나토스는 지역 오레이탄스족을 격파하고 네아르코스의 함대가 생존할 식량 보급품을 비축했다. 재 보급된 네아르코스는 발루치스탄 므크란에 있는 힌골 강에 도달하여 토착민을 격파했다. 네아르코스는 아라비아 해와 게드로시아 사막 사이에 므크란의 척박한 해안 지역에서 거주하는 이크티오파고이(물고기를 먹는 사람)의 지역에 도착해 바기사라(오늘날 오르마라 항) 항을 발견했다.
탐험의 다음 단계에서 네아르코스와 그의 함대는 먼저 콜타에 대피한 다음, 칼리마(칼라트), 카르니네(애스톨라 섬), 키사, 모사르나에 대피했다. 모사르나에서 한 게드로시아족 선원이 함대에 합류해 과다르로 향했고, 그곳에서 대추야자와 정원을 발견했다. 그들은 차바하르의 도시를 샅샅이 뒤지고 바게이아라고 불리는 태양신에게 바쳐진 곶에 함대를 정박했다. 네아르코스는 호르무즈 해협에 있는 페르시아만으로 계속 갔다. 많은 모험 끝에, 네아르코스는 남부 이란의 카르마니아에 도착했고, 알렉산드로스가 게드로시아 사막을 건넌 후 그와 만났다. 여기서 그들은 이 지역이 옥수수(곡물), 포도나무, 나무들(그리스인이 소중히 여기는 올리브 나무는 제외)로 잘 경작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했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네아르쿠스와 오네시크리토스는 아라비아의 오만 반도를 보았지만 그곳에서 모험을 하지는 않았다. 오만은 정복 당하기 전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트라피였다.
항해 중, 네아르코스는 그리스인이 티로스라고 불렀던 바레인을 방문한 최초의 그리스 사령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방문은 바레인이 그리스 세계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제우스(아랍의 태양신 샴스)를 숭배하고 그리스어를 상류층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바레인은 그리스 체육대회까지 개최했다. 네아르코스는 바레인이 상업적으로 번창한 섬이었다고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르시아 만에 위치한 티로스 섬에는 목화나무 대농장이 있고 신도네스라는 생산된 의복이 있는데, 가치가 매우 다르며 어떤 것은 비싸고 어떤 것은 저렴하다. 이들의 사용은 인도에 국한되지 않고 아라비아에도 확장되었다."
마케도니아군은 하르모제이아(미나브), 케슘 섬, 라즈-에 보스타네 곶, 키시 섬, 밴드-에 나크히루, 라제 섬(진주 사냥(채취)꾼을 만난 곳), 반다르-에 시우 곶, 네이 밴드, 칸간, 만드 강, 부세르, 다시트-에 팔랑 강, 야지레흐-에 시프, 마룬 강과 같은 페르시아만의 많은 항을 방문했다. 그들은 마침내 BC 324년에 티그리스 강 하구에 도달했다.
티그리스 강에 도달한 후, 네아르코스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갔다가 알렉산드로스와 다시 합류하기 위해 BC 324년 초 수사에 돌아왔다. 그와 오네시크리토스는 그들의 행동으로 황금 왕관을 받았다. 네아르코스는 바르시네와 멘토르의 딸과 결혼하고 그의 노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왕관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함대를 바빌론으로 이끌고, 그곳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도시로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
만년
알렉산드로스의 최종 계획에는 바빌론과 인도를 연결하는 페르시아만의 무역과 교통을 강화하기 위해 아라비아 정복을 위한 함대의 제독 자리에 네아르코스가 있었다. 이 계획들은 왕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제국의 통치에 대한 첫 논쟁에서 네아르코스는 바르시네가 낳은 알렉산드로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를 지지했는데, 왕의 정부는 이제 그의 장모였다. 질서가 무너지자 그는 안티고노스의 진영에 합류했다. 그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BC 313년/2년으로 당시 데메트리오스의 고문이었다.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는 은퇴하여 그의 역사를 썼을 것이다. 네아르코스는 인디카라는 제목의 인도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의 항해 역사를 썼다. 이 문헌은 현재 소실되었지만, 내용은 스트라본와 다른 후대 저자들이 포함한 정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항해에 대한 이야기는 AD 2세기에 작성된 아리아노스의 인디카에 나와 있다. 대 플리니우스는 네아르코스가 항해 중에 도시 아르비스를 세웠다고 썼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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