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전투
페르시아군은 아티카 해안을 따라 항해했고 추방된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원정대에 동행)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약 27 km 떨어진 마라톤 만에 상륙했다. 페르시아와 싸운 경험이 가장 많은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의 지도 아래 아테네군은 마라톤 평원의 두 출구를 막고 페르시아군이 내륙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빠르게 진군했다. 동시에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주자 페이디피데스(또는 필리피데스)는 스파르타로 보내져 스파르타 군대가 아테네를 돕기 위해 진군할 것을 요청했다. 페이디피데스는 성스러운 평화의 시기인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에 도착하여, 스파르타군이 보름달이 뜰 때까지 전쟁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고, 아테네는 적어도 열흘 동안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작은 도시 플라타이아에서 최대한 끌어모은 1,000명의 호플리테스가 힘을 보탰지만, 아테네군은 당분간 마라톤에서 버텨야 했다. 이 행동은 아테네인의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고 플라타이아에 대한 끝없는 아테네인의 감사를 얻게 했다.
그리하여 약 5일 동안 군대는 마라톤 평원을 가로질러 교착상태로 서로 대치했다. 아테네 진영의 측면은 나무 숲이나 녹채 말뚝들(정확한 판독에 따라 달라짐)에 의해 보호되었다. 날이 지날수록 스파르타군의 도착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지연은 아테네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마라톤에는 나뉜 10개의 부족이 각각 뽑은 10명의 아테네 스트라테고이(장군)가 있었으며 밀티아데스는 이 중 하나였다. 게다가, 전체 책임자는 전체 시민 단체에 의해 선출된 칼리마코스 전쟁 아르콘(육군지휘관)이었다. 헤로도토스는 스트라테고이 간에 교대로 지휘권을 맡았고 각각 하루씩 돌아가며 군대를 지휘했다고 제시했다. 그는 또한 각 스트라테고이는 지휘권을 맡은 날에 밀티아데스에게 대신 미뤘다고 주장했다. 헤로도토스의 설명에 따르면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을 공격하는 것을 열망했지만(스파르타군이 아테네군을 돕기 위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도 그가 실제 지휘하는 날까지 공격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 구절은 의심할 여지없이 문제가 있다. 아테네군은 스파르타군이 도착하기 전에 공격함으로써 얻을 것이 거의 없었으며, 이 전투지휘 순환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가 없다. 그러나 아테네군이 마라톤에 도착한 것과 전투 사이에 지연이 있었던 것 같다. 밀티아데스가 공격하기를 열망했다고 분명히 믿었던 헤로도토스는 이 지연을 설명하려다가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지연된 이유는 아마도 아테네군이나 페르시아군 모두 먼저 전투를 무릅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군이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고 분명히 말했지만(그리고 다른 사료도 이것을 인정했다), 왜 그들이 스파르타군이 도착하기 전에 공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을 설명하는 두 가지 주요 이론이 있다.
첫 번째 이론은 페르시아 기병이 불특정 한 이유로 마라톤을 떠났고 그리스군이 공격을 통해 이 점을 이용하기 위해 움직 였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헤로도토스의 전투 기록에 기병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수다 사전에 있는 항목에 근거한다. 코리스 입페온(χωρίς ἱππέων) ("기병 없이") 항목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기병대가 떠났다. 다티스가 포기하고 퇴각할 준비가 되었을 때, 이오니아인은 나무에 올라가 아테네군에게 기병대가 떠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밀티아데스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공격하여 승리했다. 거기서 위에서 언급한 인용구가 나오는데, 이것은 누군가가 전투 전에 대열을 이탈할 때 사용된다.
이 이론에는 많은 변형이 있지만, 아마도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은 기병대가 배에 다시 승선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마쳤다는 것이고, 나머지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에서 아테네군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 후방에서 (방어되지 않는)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해상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이 이론은 마라톤 전투가 끝난 후,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소니온 곶 주변을 항해하기 시작했다는 헤로도토스의 주장을 이용한다. 따라서, 이 재승선은 전투 전에 일어났을 것이다(실제로 전투를 촉발시켰다).
두 번째 이론은 페르시아군이 마침내 아테네군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에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비록 이 이론은 페르시아군이 전략적 공세로 나아갔지만, 이것은 페르시아군이 전진하는 것을 보고 아테네군이 전술적 공세를 취하여 공격했다고 가정함으로써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을 공격하는 전통적인 설명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분명히, 어떤 이론이 옳은지는 확실히 규명될 수 없다. 그러나, 두 이론 모두 궁극적으로 전투를 촉발시킨 5일째 또는 그 경에 발생한 일종의 페르시아군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배로 기병을 보냈을 때, 그들은 동시에 보병을 마라톤에 보내 그리스의 반격을 촉발시켰다는 두 가지 이론이 모두 맞을 수도 있다.
전투 날짜
헤로도토스는 태음 태양력의 날짜에서 여러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그리스 각 도시 국가는 변형을 사용했다. 천문학적 연산을 통해 역사가들이 연대순으로 많이 사용하는 예변법의 율리우스력에서 절대 연대를 도출할 수 있다. 1855년 필립 아우구스트 뵈크는 율리우스력으로 BC 490년 9월 12일에 전투가 일어났다고 결론 내렸으며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날짜다. 그러나, 이것은 스파르타인이 축제를 개최한 정확한 시기에 달려 있고 스파르타 달력이 아테네보다 한 달 앞섰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에 전투는 BC 490년 8월 12일에 일어났다.
양측 군세
헤로도토스는 아테네 군대의 규모에 대한 수치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파우사니아스, 플루타르코스는 모두 9,000명의 아테네군과 1,000명의 플라타아이군의 숫자를 제공하고 있는 반면, 유스티누스는 10,000명의 아테네군과 1,000명의 플라타이아군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숫자는 헤로도토스가 11년 후 플라타이아 전투에 아테네와 플라타이아가 보냈다고 말한 군대의 수와 매우 비슷하다. 파우사니아스는 전투 기념비에서 군 복무 대가로 해방된 노예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숫자들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인다. 아테네(아티카)가 다스리는 지역은 노예를 포함하여 당시 315,000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마라톤과 플라타이아 당시 전체 아테네 군대가 인구의 약 3%를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여러 지역, 특히 이오니아와 아이올리스에서 온 다양한 부대가 포함되었지만,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함대에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다티스는 이오니아인과 아이올리아인을 거느리고 에레트리아를 상대로 군대와 함께 먼저 항해했다."
헤로도토스는 전투에 관련된 민족에 대해 아케메네스 대열의 중심에 페르시아인과 사카족이 있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마라톤에서 오랜 시간 싸웠다. 대열의 중심에는 페르시아인과 사카족이 배치된 페르시아군이 우세했다. 그곳에서 페르시아군이 우세해서 전선을 뚫고 내륙으로 추격했지만 각 날개에서는 아테네인과 플라타이아인이 우세했다. 그들은 승리를 거두어, 패배한 페르시아군을 도망치게 하고, 날개의 병력을 모아, 중앙을 뚫은 부대와 싸우게 했다. 아테네군이 승리했고, 도망치는 페르시아군을 따라가서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들이 바다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강한 공격으로 페르시아 배를 장악했다."
전략적 및 전술적 고려 사항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군은 마라톤에서 몇 가지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시아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아테네는 이용 가능한 모든 호플리테스를 소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군은 여전히 적어도 2대 1의 수적으로 우세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대규모 군대를 모으는 것은 아테네를 수비할 인원까지 모두 동원한 것으로, 아테네 후방의 모든 2차 공격이 발생하게 되면 도시의 방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군대는 도시로부터 단절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라톤에서의 패배는 아테네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아테네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테네의 전략은 마라톤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묶어두고 평원의 양쪽 출구를 차단하여 자신들이 압도당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몇 가지 장점에 의해 균형을 이루었다. 아테네군은 먼저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었는데, 그들은 페르시아군을 마라톤 평원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하루하루 스파르타군의 도착이 더 가까워지면서 시간은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공격을 통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고, 기다림으로 얻을 것은 많았던 아테네군은 전투를 앞두고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전술적으로, 호플리테스는 기병의 공격에 취약했고, 페르시아군이 상당한 수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군의 공격 기동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게 되면서 아테네군은 방어 전략을 강화시켰다.
반면에 페르시아의 전략은 주로 전술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었을 것이다. 페르시아 보병은 분명히 가벼운 장갑을 갖추고 있었으며, 정면 대결에서는 호플리테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이후 테르모필라이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보여준 것처럼). 마라톤에서 아테네군이 강력한 수비 위치를 차지한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은 아마도 아테네군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을 꺼렸을 것이다. 아테네군의 진영은 마라톤 평원 옆에 있는 아그리엘리키 산의 돌출된 곳 위에 위치해 있었다. 요새의 유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 전투를 촉발시켰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분명히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을 공격하도록 유도하기에 충분할 만큼 전략적 또는 전술적 균형을 바꾸었다. 만약 첫 번째 이론이 맞다면(위 내용 참조), 기병의 부재로 아테네의 주요 전술적 단점이 사라졌고, 우회 공격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공격이 절실해졌다. 반대로, 두 번째 이론이 맞다면, 아테네군은 단지 자신들을 공격하는 페르시아군에 반응했을 뿐이다. 페르시아 군대는 분명히 높은 비율의 투척 또는 궁수 부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적인 방어는 아테네군에게 거의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호플리테스의 힘은 근접전에 있었고, 아테네의 관점에서 볼 때, 더 빨리 근접할수록 더 좋았다. 두 번째 이론이 맞다면, 며칠 동안 머뭇거리던 페르시아군이 왜 공격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 커진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전략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아테네군이 증원군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또는 의심되고) 있었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어떤 종류의 승리를 강요할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라톤에 무한정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전투
전투 지점에서 양군 사이의 거리는 "8 스타디온 이상의 거리" 또는 약 1,500 미터로 좁혀졌다. 밀티아데스는 그리스 대형의 중심을 이루는 두 부족,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레온티스 부족과 아리스티데스가 이끄는 안티오키스 부족을 네 개의 가로 대열로 정렬하고, 나머지 부족은 여덟 개의 가로 대열로 정렬할 것을 명령했다. 일부 현대 논평가들은 이것이 페르시아 중심부를 이중으로 포위하기 위한 의도적인 책략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군이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훈련의 수준을 암시한다. BC 371년 레욱트라까지 그리스 전투에서 그러한 전술적 사고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아마도 이 배치는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졌으며 아테네 대열은 페르시아 대열만큼 늘어서면서 측면까지 있지 않았다.
아테네 대열이 준비되었을 때, 한 출처에 따르면, 밀티아데스는 "적들에게(At them)"라는 진격을 위한 간단한 지령을 보냈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네군이 페르시아 대열까지 모든 거리를 달렸다고 암시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호플리테스 병장기의 무게 아래서 이루어진 위업이다. 그들은 궁수들의 효과의 한계인 "타격 가능 구역"(약 200미터)에 도달할 때까지 행진한 다음 적을 향해 질주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들이 분열된 대열로 200미터 지점에 도달한 후, 거기서부터 전투로 진군하기 위해 대열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군대가 이런 식으로 전투에 뛰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리스 군대가 주로 궁수 부대로 구성된 적과 맞닥뜨린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분명 페르시아군을 놀라게 했다. "...아테네군은 그들의 마음속에 치명적일 정도로 느껴지는 광기로 돌진했다. 그들은 적었지만, 기병도 궁병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전진하며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을 갑옷으로 보호한 그리스 대열은 페르시아 군대가 발사한 화살비를 지나 마침내 적군과 접촉했다. 아테네군의 날개는 페르시아의 하급 부대를 재빨리 측면으로 격파한 후, 안쪽을 돌아 얇은 그리스군 중앙을 상대로 더 성공적이었던 페르시아군 중앙을 포위했다. 전투는 공황 상태에 빠진 페르시아 중심부가 그들의 배를 향하고 그리스군이 뒤쫓으면서 끝났다. 일부는 현지 지형을 알지 못한 채 알려지지 않은 수의 병사들이 익사한 늪지대를 향해 달려갔다. 아테네군은 페르시아군을 따라 그들의 배로 쫓아갔지만, 대다수가 성공적으로 출항할 수 있었으며 7척의 배를 가까스로 나포했다. 헤로도토스는 투사들 가운데 있었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동생 키나이기로스가 바다로 돌진해 페르시아의 삼단노선을 붙잡아 해안 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되짚었다. 한 승무원이 그를 보고 손을 잘랐고 키나이기로스가 죽었다.
헤로도토스는 6,400 구의 페르시아군 시체가 전장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늪에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또한 아테네인이 192명을, 플라타이아인은 11명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사망자 중에는 전쟁 아르콘 칼리마코스와 스테실라오스 장군이 있었다.
결론
그리스의 성공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리스군이 더 나은 장비를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전술을 사용했다고 믿는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군은 더 나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청동으로 만든 흉갑을 입지 않고, 가죽이나 린넨으로 만들었다. 팔랑크스 대형은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왜냐하면 페르시아 병사들은 매우 다른 종류의 분쟁에 익숙했던 반면, 호플리테스는 백병전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군은 그들의 군대를 전술적인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 페르시아 군대와 같은 길이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중심을 가늘게 했다. 페르시아 중심부는 그들의 날개가 격파되었고 승리한 그리스 날개에 의해 측면부가 잡힌 것을 깨닫고 되돌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라젠비(1993년)는 그리스군이 보여준 용기 때문에 그리스군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마라톤은 병사들이 화살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멈추는 대신 빠르게 돌입하는 용기를 찾았고, 놀랍게도 적의 날개가 달아났을 때 쉬운 길을 택해서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어떻게든 강한 압박을 받는 중앙에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빅 헐리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패배는 "대표적인 군대를 투입하지 못한 완전한 실패"로 설명되며, 이 전투를 보병 궁수가 근거리에 위치하고 지원받지 못하는 동안 어떤 위치도 방어할 수 없다는 사실의 "가장 설득력 있는" 예라고 부른다.(즉, 일반적인 페르시아 전술과 마찬가지로 요새화 또는 기병과 전차로 그들을 지원하지 못했다.)
여파
헤로도토스는 전투 직후 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소니온 곶을 항해했다고 말했다. 위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일부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시도를 전투 직전에 배치한다. 어느 쪽이든 아테네군은 그들의 도시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가능한 한 빨리 아테네로 돌아갔다. 아테네 대열의 중심부에 있던 두 부족은 아리스티데스의 지휘 아래 전장을 지키기 위해 머물렀다. 아테네군은 페르시아군이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때에 도착했고, 기회가 사라진 것을 보고 페르시아군은 방향을 돌려 아시아로 돌아갔다. 헤로도토스는 이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페르시아군의 이러한 기동이 아테네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알크마이오노스 일족과 연계하여 계획되었다는 소문과 전투 후에 "방패 신호"가 주어졌다는 소문을 되짚었다. 이에 대한 많은 해석이 나왔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그렇다면 신호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 날, 스파르타 군대는 불과 3일 만에 220 km(140 마일)를 주파하며 마라톤에 도착했다. 스파르타군은 마라톤에서 전장을 둘러보았고, 아테네군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마라톤에서 죽은 아테네인과 플라타이아인은 두 개의 고분 속에 전장에 묻혔다. 아테네인의 무덤에 시모니데스가 지은 이 경구가 쓰여 있었다.
"마라톤에서 그리스인, 아테네인의 선두에서 싸우고
금박을 입힌 메디아의 군대를 제압했다"
의미
마라톤에서의 패배는 페르시아 제국의 방대한 자원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리스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승리였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페르시아는 무적이 아니며, 예속보다는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전투는 젊은 아테네 민주주의에게 결정적인 순간으로, 통합과 자기 신념을 통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 전투는 아테네의 "황금시대"의 시작을 사실상 나타냈다. 이것은 그리스 전체에도 적용되었다. "그리스의 승리는 그리스인에게 서구 문화가 탄생한 3세기 동안 지속된 운명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유명한 견해는 "마라톤 전투는 영국 역사상 사건으로서도 헤이스팅스 전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에 따르면, "만약 아테네 사람들이 마라톤에서 졌더라면, 그리스는 우리 현대인들이 물려받은 열매인 문명의 절정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아테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그의 비석에 다음과 같은 경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라톤 출전을 (그의 연극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이 무덤은 아이스킬로스의 먼지가 숨어 있어서,
에포리온의 아들이자, 풍성한 겔라의 자존심.
그의 용맹을 어떻게 시도했는지 마라톤이 말해줄 수 있다.
그리고 너무 잘 알고 있는 긴 머리의 메디아 사람."
군사적으로, 그리스인에게 중요한 교훈은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의 잠재력이었다. 이 스타일은 그리스인 사이의 내부투쟁을 거치면서 발전해왔다. 각 도시국가들은 같은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의 장점과 단점이 명백하지 않았다. 마라톤은 팔랑크스가 처음으로 더 경무장한 군대와 마주했고, 호플리테스가 전투에서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팔랑크스 대형은 여전히 기병에 취약했지만(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군대가 많은 주의를 기울인 원인) 적절한 상황에서 사용되었고, 이제는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무기로 나타났다.
유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이디피데스라고 불리는 아테네의 달리기 선수는 전투 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는 225 km(140 마일)의 거리를 달렸고, 출발한 다음날 스파르타에 도착했다. 그 후, 전투가 끝난 후, 수니온 곶 주변을 항해하는 페르시아군을 막기 위해 아테네군은 40 km(25 마일) 남짓한 거리 또는 아테네로 매우 빠른 속도(갑옷의 무게와 전투 후 피로를 고려)로 진군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배들이 아테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 늦은 오후에 돌아왔고, 이로써 아테네의 승리를 완료했다.
마라톤에는 또 다른 전설이 있었는데 후대에 이 전설과 페이디피데스의 이야기가 합쳐져 전승되게 되었다. 이 신화는 전투가 끝난 후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려와 "네이니키카멘!"(우리가 이겼다!)이라는 말로 그리스의 승리를 알리고는 지쳐서 곧 사망했다. 대부분의 기록은 이 이야기를 헤로도토스에게로 잘못 돌리고 있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AD 1세기에 플루타르코스의 "아테네의 영광에 관하여"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는 폰토스의 잃어버린 작품 헤라클레이데스를 인용하여 주자의 이름을 에르키오스 또는 에우클레이데스의 테르시포스로 적었다. 루키아노스(AD 2세기)는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주자가 필리피데스(페이디피데스가 아니라)로 표기했다. 헤로도토스의 중세 기사에서는 전투 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있는 주자의 이름이 필리피데스로 표기되며, 이 이름은 몇몇 현대판에서도 선호된다.
19세기 말 근대 올림픽의 구상이 현실화되고 있을 때 창시자와 조직위는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회상하게 하는 대중화 행사를 찾고 있었다. "마라톤 경주" 아이디어가 미셸 브레알로부터 나왔고 피에르 드 쿠베르탱과 그리스의 지지를 받아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첫 근대 올림픽에서 채택되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리는 이 경주는 매우 인기를 끌어 올림픽 경기의 고정 종목이 되었고 주요 도시들이 매년 자체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인 약 40 km로 가변적이었으나 결국 26 마일 385 야드 또는 42.195 km로 고정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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