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60-53년 제1차 삼두정치
BC 62년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폼페이우스가 맺은 협정을 원로원이 비준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61년 히스파니아 총독직에서 돌아온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로 알려진 비공개 협정을 맺었다. 59년 집정관에 선출된 카이사르는 협정을 비준하였고 그는 향후 5년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총독을 맡게 되었다. 56년 루카 회담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55년도 집정관직을 약속받았고 54년도 부임지로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를,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임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50년까지 연장되었다.
BC 58-50년 갈리아 전쟁
비레비스타스의 다키아 왕국이 로마로 향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카이사르는 BC 58년 갈리아 문제에 개입했다. 55년과 54년에는 브리타니아 원정도 시도했다. 분열된 갈리아 부족을 규합한 베르킨게토릭스가 나타났지만 52년 알레시아에서 유례없는 포위전으로 전쟁의 결정을 지었다. 51년과 50년은 소규모 분쟁과 종전 처리에 가까웠다.
BC 53년 카라이 전투
BC 54년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에 맞서기 위해 원로원의 공식 동의 없이 파르티아 침공을 감행했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막을 건넜지만 카라이 부근에서 수레나가 이끄는 파르티아군과 만나게 된다. 파르티아의 궁기병에 맞서 거대한 사각 대형으로 방어하며 이동한 로마군은 개울가에 이르렀지만 진영을 설치하고 휴식을 취한 뒤 아침에 공격하라는 참모의 의견을 무시한 크라수스의 명으로 다시 파르티아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화살을 싣고 온 낙타 수송부대에 의해 끊임없는 화살 세례를 받은 로마군은 균열이 생기고 희생자가 발생했다. 로마군은 공격을 시도했지만 파르티아군은 기동력을 이용해 계속 물러났고 로마 기병대가 너무 깊숙이 들어가 궤멸되어 500명만이 생포되었다. 궁기병에 이어 중기병의 공격이 이어지는 파르티아군의 공세는 해질녘까지 멈추지 않았다. 완패한 로마군에 수레나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그 과정에서 크라수스의 말고삐를 잡아당겨 그와 참모들이 모두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다.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제1차 삼두정치는 막을 내렸다.
BC 49-45년 카이사르의 내전
BC 49년 폼페이우스를 앞세운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공화국의 적으로 간주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해 1월 10일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고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로마를 포기하고 그리스로 도피했다. 그리스로 가기 전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의 폼페이우스 세력을 정리한 카이사르는 48년 그리스로 건너갔으며 카이사르는 디라키움 공방전 패배 이후 파르살로스로 이동하여 폼페이우스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집트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세력은 남아있었기에 내전은 계속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운명적인 만남 이후 47년 유대와 시리아를 경유하여 폰토스의 파르나케스 2세를 상대로 젤라에서 승리하고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로 시작하는 보고서를 원로원에 보냈다. 46년 북아프리카의 탑수스에서 폼페이우스 세력을 물리쳤고 45년 문다 전투를 마지막으로 내전은 종식되었다.
BC 43-42년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카이사르가 원정에 성공할 경우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생각과 공화국을 수호한다는 이념에 카시우스와 브루투스가 이끄는 원로원 파는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그들은 스스로 해방자를 뜻하는 리베라토레스로 칭했지만 보복을 두려워하여 곧바로 동부 속주로 피신했다. 카이사르 파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서부 속주를 장악하고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했다. 동부 속주를 장악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향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로 건너갔다. 42년 10월 필리포이 전투에서 패배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자결했다.
BC 43-33년 제2차 삼두정치
BC 40년 브룬디시움 조약 이후의 세력도.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서부 속주는 옥타비아누스가, 동부 속주는 안토니우스가, 북아프리카는 레피두스가,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장악했다. 이전의 제1차 삼두정과 달리 제2차는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기관으로 로마 속주에서 압도적인 권한을 부여받았고 집정관, 총독, 행정장관보다 권한이 더 컸다. 원로원에 의해 이들은 5년간 최고 권한을 부여받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 특히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에 대한 권한을 받았다. 제2차 삼두정은 불안정했다. 옥타비아누스를 싫어한 안토니우스는 주로 동부 속주에서 지냈고,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를 좋아했지만 자신이 소외된다는 느낌을 가졌다.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시칠리아 반란 이후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대하는 자세(부하처럼)와 담당 속주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비난을 받고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사제)를 제외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키르케이로 추방되었다.
BC 42-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전쟁(시칠리아 반란)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빠르게 세력을 키운 섹스투스의 휘하에 부친 폼페이우스의 많은 노예들과 친구들이 공화국을 위한다는 대의로 모여들었다. 메나스, 메케크라테스, 데모카레스와 같은 유능한 제독이 지휘하는 그의 대함대는 로마로 향하는 모든 선적을 중단시키고 이탈리아를 봉쇄했다. 39년 미세눔 조약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의 세력권을 인정했다. 38년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를 침공하려 했지만 악천후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36년 7월 옥타비아누스와 타우루스의 함대가 이탈리아에서, 레피두스의 함대가 아프리카에서 시칠리아로 향했다. 8월, 아그리파는 밀라이(오늘날 밀라초) 인근 해전에서 섹스투스를 물리쳤다. 전투로 약 2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1,000 척의 전함이 파괴되었으며 틴다리스와 메시나를 비롯해 주변 지역은 황폐해졌다. 시칠리아를 탈출한 섹스투스는 35년 밀레토스에서 마르쿠스 티티우스에게 즉결 처형되었다.
BC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BC 2세기 아르메니아 동쪽에 위치한 아트로파테네의 모습. 카이사르의 파르티아 원정은 암살당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BC 40년 파르티아가 폼페이우스 세력과 연합하여 로마 속주의 많은 지역을 잠시 점령했지만 안토니우스가 보낸 군대는 그들을 격파하고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BC 36년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여러 왕국과 연합한 안토니우스는 유프라테스에 강력한 군대가 포진되어 있어 아르메니아를 경유하는 길을 택했다. 아트로페테네에 진입했을 때 다른 경로로 오던 수송 부대의 수레와 공성병기가 파르티아 기병대에게 파괴되었다. 이때 스타티아누스와 1만 군단병이 전사하고 폰토스의 왕 폴레몬 1세가 포로로 잡혔지만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 안토니우스는 아트로페테네의 수도를 포위했지만 파르티아와 아트로페테네의 기병대의 끊임없는 공격에 포위망을 풀고 퇴각했다. 퇴각하면서 파르티아 기병의 공격에 24,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겨울에 아르메니아 산지를 통과하는 동안에도 병사들이 희생되어 총 32,000여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BC 34년 안토니우스의 속주 기증
BC 34년 봄,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그해 가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 자리에서 안토니우스는 소유한 영토를 자녀들에게 나누어주고 특히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에게 많은 작위를 부여했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의 왕으로, 쌍둥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 페니키아, 킬리키아를 받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과 공동 통치자로 왕비이자 이집트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왕들의 왕이자 이집트의 왕인 카이사리온은 신격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로 선언되었다. 비록 유언장에 옥타비아누스를 입양하고 그에게 재산의 대부분을 남겼지만, 카이사리온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선언되었다. 결과적으로, 안토니우스와 로마의 관계는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켰으며 로마 공화국 마지막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BC 31년 악티움 해전
BC 31년 안토니우스는 악티움에, 옥타비아누스는 북쪽에서 도착해 진을 쳤다. 클레오파트라는 주요 도시를 요새화하고 주요 함대를 알렉산드리아로 귀환시킬 것을 종용했고 안토니우스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알아챈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막으려 했고 양측의 함대는 악티움 앞바다에서 만났다. 오후 내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전투에 돌입하지 않고 돛을 펴서 이집트로 달아났다. 안토니우스 함대의 상당수가 따라서 전장을 이탈했지만 안토니우스를 포함한 나머지는 해가 진 후에도 전투를 벌였다. 남은 선박을 모아 전열을 뚫은 안토니우스는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전장을 이탈했다. 이 해전으로 로마 세계의 승자는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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