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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제국

로마 제국 역사 지도 - 2편 로마의 헤게모니

by 금곡동로사 2021.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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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29년경 로마 공화국과 주변 세력도. 클리엔테스 국가(연노랑)

 

BC 135-132년 제1차 노예 전쟁

BC 135년 예언자로 자처한 시리아 출신의 노예 에우누스가 400명의 노예와 함께 엔나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킬리키아 출신의 노예 클레온이 남쪽 해안의 아그리겐툼을 습격해 주민들을 학살한 뒤 에우누스에 합류하여 지휘관이 되었다. 7만 명에 달했던 반란군은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에게 진압되었다.

 

 

BC 113-101년 킴브리 전쟁

킴브리, 투에토네스, 암브로네스, 티구리니의 4개 부족이 로마 영토에 이주하면서 벌어졌다.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을 통해 영감을 받은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와 베르켈라이에서 로마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이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살아남은 소수는 노예가 되거나 유틀란트로 도주했다.

 

 

BC 91-87년 동맹시 전쟁

BC 90년에 주조된 삼니움 출신 지도자 가이우스 파피우스 무틸루스의 데나리우스. 앞면의 바쿠스 신과 뒷면에 이탈리아 황소가 로마 늑대를 찍어 누르고 있다. 로마의 오랜 동맹인 이탈리아 동맹국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로마 시민권을 요구했다. 로마가 거부하자 삼니움족과 마르시족이 이끄는 이탈리아 동맹이 전쟁을 일으켰지만 에트루리아 대부분, 움브리아, 라틴동맹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분쟁 종식을 위해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여러 법을 제정했다. BC 87년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시민권은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BC 89-85년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클리엔테스 왕국과 로마 속주를 포함하여 아나톨리아 전체로 확장했다. 원로원은 킬리키아 해적 소탕을 맡은 전직 법무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폰토스와 아르메니아 세력을 몰아내도록 지시했다. 술라가 승리하여 미트리다테스는 모든 영토를 반환하고 폰토스 왕국으로 돌아갔다.

 

 

BC 88-82년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마리우스와 대립하던 술라는 놀라에 있던 6개 군단 중 5개 군단을 이끌고 BC 88년 로마로 진군했다. 호민관 술피키우스는 처형되고 마리우스가 아프리카로 도피하자 술라는 민중파를 반역자로 선포했다. 술라가 원정을 떠난 뒤 87년에 귀국한 마리우스는 피의 복수를 하고 킨나와 함께 86년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지만 새해가 된 후 2주 만에 사망했다. 그리스로 건너가 미트리다테스에게 승리한 술라는 83년 봄에 브룬디시움에 도착하여 다시 한번 로마로 진군했다. 82년 11월 로마에 입성한 술라는 민중파를 소탕하고 독재관에 취임했다. 80년 말 독재관에서 내려온 그는 7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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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0-72년 세르토리우스 전쟁

BC 80년부터 로마의 술라 정권에 반기를 든 반대파 세르토리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벌인 전쟁이다. 지속적인 게릴라전을 통해 로마군을 괴롭힌 세르토리우스는 73년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에게 암살되었고 페르페르나가 이끄는 반군이 폼페이우스에게 패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BC 73-71년 제3차 노예 전쟁

BC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검투사 노예 70명이 탈출하면서 시작된 반란은 2년 동안 로마군을 물리치면서 약 12만 명의 남자, 여자, 아이들이 합류했다. 스파르타쿠스를 포함한 여러 리더들이 나뉘어 움직였지만 그들은 연계되어 있었다. 결국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휘하에 8개 군단을 편성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발부리 끝으로 몰아넣었고 대치하던 그들은 폼페이우스와 루쿨루스의 군단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크라수스군에 공격을 가했지만 패배했다. 생존자 6천여 명이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 형을 당했다.

 

 

BC 67년 폼페이우스의 해적 소탕

지중해는 오랫동안 해적이 존재했다. 특히 킬리키아를 본거지로 한 해적이 가장 큰 문젯거리였으며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항에서도 선박이 불타고 약탈당했다. BC 67년 3년 동안 지중해 전역과 내륙 50 마일(80 km)까지 지휘권을 가지고 해적 토벌을 맡게 된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와 흑해를 13개 구역으로 나눠 토벌을 시작해 40일 만에 서부 지중해를 소탕하고 동부로 전선을 옮겨 총 89일 만에 지중해의 모든 해적을 소탕했다. 로마 공화국의 물류는 정상화되어 시장에 식료품이 풍부하게 공급되고 시민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찬사를 보냈다.

 

 

BC 73-67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루쿨루스의 원정

미트리다테스의 폰토스군에게 승리한 루쿨루스는 폰토스를 로마의 지배하에 두었다. BC 71년 미트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쳤고 아르메니아의 왕 티그라네스 2세는 로마와 대적하게 되었다. 69년 아르메니아로 진격한 루쿨루스는 제국의 새로운 수도 티그라노케르타를 포위했고 티그라네스가 셀레우코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왔지만 전투에서 궤멸당했다. 티그라네스는 군대를 모아 북부의 오래된 수도 아르탁사타로 물러났다. 68년 여름 아르탁사타로 진군한 루쿨루스는 아르사니아스(오늘날 무라트) 강 부근에서 아르메니아군을 다시 격파했지만 아르메니아 고원의 악천후로 휘하 군대가 진격을 거부하자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귀환했다. 루쿨루스는 68/67년 월동기 동안 니시비스 요새를 점령했다. 같은 해 겨울 시리아로 진군한 루쿨루스는 안티오코스 13세를 왕으로 세웠지만 그의 부재 동안 니시비스에 남아 있던 군대가 시위를 일으켜 통제불능 상태가 되었다. 결국 67년 봄에 루쿨루스는 카파도키아로 물러나야만 했다.

 

 

BC 66-63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종결과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

BC 67년 미트리다테스가 폰토스로 돌아와 주둔하던 로마군에게 승리하여 통치권을 되찾았다. 66년 초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은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에게 승리를 거두게 되고, 그의 사위 티그라네스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미트리다테스는 콜키스로 도주하여 보스포로스로 향했다. 폼페이우스의 진격에 권위가 약화된 티그라네스는 화평을 요청하며 로마의 동맹 클리엔테스 국가가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를 지지하는 코카서스 부족과 왕국을 향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65년 폼페이우스는 알바니아인과 이베리아인을 물리쳤다.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장남 마카레스를 죽이고 보스포로스 왕국을 차지했으며 폰토스를 되찾으려 했지만 차남 파르나케스 2세의 반란으로 실패했다. 반란군에 살해된 후 그의 시신은 폼페이우스의 명으로 시노페 또는 아마세이아에 묻혔다.

 

쇠락하던 셀레우코스 왕조는 시리아 일부 도시에 존속하던 상태였고 BC 83년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에 의해 사실상 종식되었다. 69년 루쿨루스가 왕조를 부활시켰지만 여전히 내전 중이었다. 65년 폼페이우스는 메텔루스와 롤리우스를 보내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폼페이우스는 64/63년 겨울 안티오키아에서 월동했다. 63년 캠페인 시즌이 되자 폼페이우스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시리아를 점령하고 속주로 삼았다. 유대는 69년부터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히르카노스 2세 형제간의 왕위 계승 문제로 분쟁 중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중재를 위해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형제를 만났지만 아리스토불로스는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유대로 돌아갔다. 계속된 아리스토불로스의 속임수에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를 체포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농성 중인 아리스토불로스파를 소탕했다. 폼페이우스는 유대 왕국을 축소하고 왕국이 정복한 도시들을 시리아로 편입했다. 유대는 시리아에 딸린 소국이 되었고 아리스토불로스와 그의 자녀들은 로마로 이송되었다. 62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시리아 총독이 되어 페트라 탐사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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