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7-AD 14 아우구스투스
시민관을 쓰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로마의 초대 황제. 그는 팍스 로마나로 알려진 상대적으로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로마 세계는 제국의 국경에서 계속된 확장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 간의 내전 외에는 2세기 이상 대규모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이 끝난 뒤 원로원, 행정부, 입법부에 정부 권한을 부여하면서 공화국의 외관을 복원했지만 원로원으로부터 군 최고사령관, 호민관, 감찰관의 종신 재직권을 부여 받음으로써 독재적 권위를 유지했다. 모호성은 그가 선택한 이름에서 볼 수 있는데 자신을 프린켑스 키비타티스(제1시민)로 부르며 군주제 칭호를 묵시적으로 거부하고 고대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를 채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 달마티아, 판노니아, 노리쿰, 라이티아를 합병하고 히스파니아 정복을 완성했지만 게르마니아에서 큰 낭패를 보았다. 그는 조세 제도 개혁과 물류 시스템을 위해 도로망 개발, 상비군과 근위대 창설, 치안대와 소방 기관을 설립하고 도시의 많은 부분을 재건했다.
BC 31년의 로마 제국(노란색). 진녹색이 19년까지 확장한 지역이다. 라인 강 동부와 라이티아, 달마티아는 9년까지 확장했다(녹색). AD 6년까지 판노니아의 일부, 달마티아의 동쪽, 유대, 게르마니아를 차지했지만 게르마니아에서 큰 좌절을 겪게 된다(연두색). 제국 주변의 클리엔테스 국가와 지역이 분홍색으로 나타나 있다.
군단 개편
AD 14년경 로마 군단의 배치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군단을 더욱 전문화하여 군단병들의 장군에 대한 의존도를 타파하려 했다. 이에 따라 군단병의 복무기간이 25년으로 길어졌고 (이전에는 군단병의 평균 복무기간이 10년에 불과했다) 전체 군단에 걸쳐 급여가 표준화되었다. 연간 225 데나리(데나리우스의 복수형)의 급여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도미티아누스 치세에 300 데나리로 인상되었다. 그리고 복무를 마칠 때 토지 보상 또는 퇴직금을 보장받게 되어 군단병들은 전투 후 보상을 위해 장군에게 덜 의존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사크라멘툼(충성 결의)을 바꾸어 병사들이 장군이 아닌 오직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BC 12-AD 16년 게르마니아 캠페인
BC 17년 마르쿠스 롤리우스 휘하의 제5군단이 시캄브리족, 우시페테스족, 텐크테리족에게 패배한 "롤리우스의 재앙"과 함께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그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12년 라인 강을 건너 응징을 시작했다. 9년, 엘베 강까지 진격한 그는 돌아오는 길에 낙마하여 부상을 입었고 괴저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30일 후 사망했다. 임종을 지킨 티베리우스가 후임으로 게르마니아 캠페인을 지속하며 게르마니아 부족 대부분을 굴복시켰다. 3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부임했지만 케루스키족에 대한 대응 미숙으로 2년에 노련한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로 교체되었다. AD 4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그는 2년간 게르마니아 북부에서 카나네파테스족, 카투아리족, 브루크테리족을 정복하고 케루스키족을 제압했다. 그 후 내부 분쟁에 관여한 티베리우스는 케루스키족을 "로마의 친구"로 선포했다. 이 로마에 우호적인 부족 지배층에 당시 22세로 추정되는 아르미니우스가 있었다. 5년, 카우키족에 대한 캠페인과 지상과 강을 이용한 게르마니아 중심부 공략을 했다.
6년, 로마는 게르만 부족들이 대부분 평정되었다고 여겼으며 당시 일리리쿰 반란이 일어나 3개 군단만 남겨두고 티베리우스와 동행했다. 주요 군사 작전이 끝났다고 여긴 로마는 게르마니아 마그나를 제국에 통합하기 위해 후임으로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를 보냈다. 총독으로 부임한 바루스가 세금을 부과하자 게르만족이 아르미니우스를 중심으로 결집했으며 그는 바루스의 제17, 제18, 제19군단과 동행했다. 9년, 베저 강의 진영을 떠나 캠페인 후 라인 강의 주둔지(후대의 울피아 트라이아나, 크산텐)로 귀환하던 길에 아르미니우스로부터 봉기 소식을 듣고 수습을 위해 그곳으로 향했다. 매복을 준비한 아르미니우스와 정찰병(지리에 밝은 현지민)의 협력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한 바루스는 자결했으며 궤멸된 로마군 소수가 크산텐 주둔지로 귀환했다.
바루스의 패전 소식이 도착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10년에 티베리우스를 라인 강으로 보냈다. 그는 라인 강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병력을 재배치했다. 11년과 12년에 그는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캠페인을 했다. 이 캠페인으로 마르코만니족과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반로마 게르만족의 침공을 방지했다. 13년,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가 뒤를 이었다. 14-16년 사이 게르마니쿠스는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군에 맞서 게르마니아로 진격했고 수풀이 많은 지역 특성상 물류를 위해 해군을 크게 활용했다. 16년, 아르미니우스군에 승리한 로마군은 점령 지역을 우호적인 부족에게 넘기고 게르마니아에서 철수했다. 티베리우스는 라인 강에 8개 군단을 배치했다.
AD 14-37년 티베리우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두 번째 로마 황제이다. 그는 의붓아버지인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었다. 그는 판노니아, 달마티아, 라이티아, 일시적이지만 게르마니아의 일부를 정복하여 북부 국경의 기초를 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은 어둡고 은둔적이고 침울한 통치자로 기억된다. 대 플리니우스는 그를 "가장 우울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23년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후 티베리우스는 더 은둔적이고 냉담해졌다. 26년 그는 스스로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 있는 황실 빌라 단지로 갔으며 논란이 많은 대리인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와 니아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에게 정권을 대행하게 했다. 그는 사망 시 거의 30억 세스테르티(세스테르티우스의 복수형)에 달하는 황실 국고를 남겼다.
AD 14년 티베리우스 즉위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 주변의 노란색은 클리엔테스 국가 및 지역이다. 그는 23년 이전에 사망했다면 모범적인 통치자로 칭송받았을지도 모른다. 로마 역사가들이 남긴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실한 재정을 남기고 죽었다. 값비싼 정복에 착수하기보다는 추가적인 기지를 건설하고, 외교와 군사력을 통한 위협을 이용해 국경의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자제하며 기존의 제국을 강화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결과 더 강하고, 더 굳건한 제국이 되었다.
AD 14-31년 세야누스
체포되는 세야누스를 묘사한 그림.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AD 25년 황제의 조카 리비아 율리아(23년 사망한 드루수스의 아내)에게 구혼을 했지만 황태후 리비아의 존재가 걸림돌이 되었다. 29년, 그녀가 사망하자 세야누스는 원로원 의원과 부유한 기사 계급에 대한 숙청을 시작하여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금고를 불렸다. 30년,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두 아들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모두 미심쩍은 상황에서 죽었다. 31년, 카프리에 있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이 된 세야누스는 자신이 양자 또는 섭정을 할 수 있도록 율리우스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시도한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리비아 율리아도 이 음모에 연루되었으며 몇 년 동안 세야누스의 애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근위대장은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로 교체되었고 세야누스와 일당은 모두 처형되었다. 세야누스와 리비아 율리아의 불륜과 아들의 죽음에 이들이 관련되었다고 여긴 티베리우스는 분노했고 세야누스와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방치되어 사망했다.
AD 37년 티베리우스의 사망
장 폴 로랑이 그린 티베리우스의 죽음. 티베리우스는 그의 78번째 생일을 몇 달 앞둔 AD 37년 3월 16일 미세눔에서 사망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황제가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회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티베리우스의 별장에서 승계를 축하받고 있던 칼리굴라는 황제의 분노를 두려워해 도망쳤으며 혼란을 틈타 마크로가 이불로 질식사시켰다.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황제를 굶기고 독살했으며, 베개로 질식사시켰다는 여러 가지 소문을 전한다. 카시우스 디오 역시 칼리굴라가 황제의 회복을 원하지 않아 음식을 주지 않고,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며 마크로의 도움을 받아 이불로 질식사시켰다고 한다.
AD 37-41년 칼리굴라
칼리굴라로 알려진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는 세 번째 로마 황제이다. 유명한 로마의 장군 게르마니쿠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아그리피나의 아들인 칼리굴라는 율리오 클라우디아 왕조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지배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이우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땄지만 게르마니아 캠페인에서 아버지의 병사들로부터 "칼리굴라"(작은 군화)라는 별칭을 얻었다. 19년, 안티오키아에서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하자 아그리피나는 6명의 자녀와 함께 로마로 돌아왔고 티베리우스와 심한 불화에 휘말리게 된다. 이 갈등으로 칼리굴라는 유일한 남자 생존자가 되었다. 칼리굴라의 치세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후 사료는 그의 잔혹성과 가학성, 사치스러움, 성적 변태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미친 폭군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이 들지만 그는 짧은 재위 동안 황제의 무제한적인 직접 권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야심 찬 건설 사업과 호화 주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로마에 아쿠아 클라우디아와 아니오 노부스라는 두 개의 수도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41년 초 칼리굴라는 근위대 장교, 원로원 의원, 궁정 신하들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공모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공화국 회복을 시도했지만 좌절되었고 칼리굴라가 암살되던 날, 근위병들은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차기 로마 황제로 선포했다.
AD 37년 칼리굴라 즉위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와 친손자 게멜루스를 공동 상속인으로 유언을 남겼지만 칼리굴라는 이를 무시했으며 그는 지지를 얻기 위해 군에 보너스를 지급한 뒤 티베리우스의 서류를 파기하고 반역자로 추방된 자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황실 과세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지원하고 모친과 형제들의 유골을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봉안했다. 그해 10월 아마도 독에 의해 중병에 걸린 칼리굴라는 회복한 뒤 달라졌다. 사촌이자 양자인 게멜루스를 처형하고 이에 격분한 소 안토니아가 자결했다. 그는 또한 장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처남 마르쿠스 레피두스를 처형했다. 칼리굴라는 그가 자주 조롱거리로 삼은 숙부 클라우디우스는 살려두었다. 38년, 가장 좋아하는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가 열병으로 사망했고 다른 두 자매 리빌라와 소 아그리피나는 유배되었다. 아그리파의 손자라는 것을 싫어한 그는, 자신의 모친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딸 대 율리아 사이에서 근친상간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라는 거짓말을 되풀이하며 아우구스투스의 명예를 더럽혔다.
AD 39-44년 마우레타니아 사건
칼리굴라는 로마의 클리엔테스 왕국인 마우레타니아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를 로마로 초대한 뒤 갑자기 그를 처형했다. 마우레타니아는 AD 42년에 반란이 일어나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와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가 진압하게 된다. 마우레타니아가 분열되기 전 속주의 첫 총독은 44년에 부임한 기사 계급의 마르쿠스 파디우스 켈레르 플라비아누스이다.
AD 41-54년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는 네 번째 로마 황제이다. 율리오 클라우디아 왕조의 일원인 클라우디우스는 부친이 군사 지휘관으로 부임했던 갈리아의 루그두눔에서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탈리아 밖에서 태어난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 어려서부터 병으로 절뚝거리고 약간의 난청을 앓았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고 (37년 칼리굴라와 함께) 집정관직을 맡기 전까지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클라우디우스의 병약함은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치세의 숙청 기간 동안 다른 많은 귀족들과 같은 운명에서 그를 구했을 것이다. 잠재적인 적들은 그를 심각한 위협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그는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고, 이때 그는 가문의 마지막 성인 남성이었다. 경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는 유능하고 효율적인 관리자임이 입증되었다. 그는 해방 노예를 포함하도록 제국의 관료제를 확대했고 칼리굴라 이후 제국의 재정이 회복되도록 도왔다. 그는 또한 제국을 가로지르는 많은 새로운 도로, 수도교, 운하를 건설한 야심 찬 건축가였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은 브리타니아에 대한 성공적인 정복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법에 관심이 있는 그는 공개 재판을 주재했고, 하루에 최대 20개의 칙령을 내렸다. 그는 치세 내내, 특히 귀족들에게 연약한 존재로 여겨졌다. 클라우디우스는 계속해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해야 했고, 이로 인해 많은 원로원 의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사건은 고대 작가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을 손상시켰지만, 최근의 역사가들은 그 견해를 수정했다. 많은 작가들은 그가 아내인 소 아그리피나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한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조카딸의 아들이자 합법적으로 양자로 입양된 네로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 이후 큰 확장을 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의 로마 제국. 37-54년 사이 확장한 제국의 영토인 브리타니아, 마우레나티아, 노리쿰, 트라키아, 리키아, 유대가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로마의 클리엔테스 국가 및 지역(분홍색). 클라우디우스는 잠재적인 찬탈자들에 맞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코그노멘(로마식 이름의 세 번째에 위치하는 가문 이름, 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카이사르"가 코그노멘이다)을 여전히 대중들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카이사르"로 채택했다. 또한, 정식으로 입양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옥타비아의 손자이기에 가문에 권리가 있음을 느끼고 이전의 두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아우구스투스"를 채택했다. 그리고 그의 영웅적 형제와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존칭 "게르마니쿠스"를 유지했다. 그는 친할머니 리비아를 신격화하여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서의 위치를 부각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전설적인 아버지의 명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칭호에 "필리우스 드루시"(드루수스의 아들)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브리타니아 정복
아울루스 플라티누스의 캠페인 지도와 BC 43년부터 60년까지 로마의 브리타니아 캠페인을 나타낸 지도. 43년부터 시작된 브리타니아 정복은 저명한 원로원 의원인 아울루스 플라티우스의 지휘 하에 시작되었다. 전체 병력은 불분명하며 60/61년의 부디카 반란에 3개 군단이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로마군은 필요시 협조 군단과 보조 부대가 이동하여 유동적이었다. 보노니아(오늘날 불로뉴)에서 출항한 아울루스 플라티우스의 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교차했다. 카물로두눔(콜체스터)이 신설 브리타니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47년 말 새로 부임한 지휘관 푸블리우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는 오늘날의 웨일스와 체셔 평원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웨일스 부족들은 경계 지대를 맹렬하게 방어했으며 52년, 오스토리우스가 전사하고 디디우스 갈루스가 부임했지만 북쪽이나 서쪽으로 더 이상 확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클라우디우스는 이득이 없는 산악 지대의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BC 54-68년 네로
원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이며 율리오 클라우디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는 열세 살에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고 열일곱 살에 뒤를 이어 즉위했다. 네로는 당시 로마 하층민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그의 치세는 보통 무제한의 폭정, 사치, 종교적 박해, 방탕과 관련되어 있다. 네로는 모친 아그리피나, 가정교사 세네카, 로마의 관리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에게 많은 지도를 받았다. 그의 치세 초기에 세네카는 주요 영향을 끼쳤다. 네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과 외교 정책에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자립하게 되었다. 네로는 제국의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외교와 무역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는 원형경기장 건설을 명하고 운동 경기를 장려했다. 그는 또한 배우, 시인, 음악가, 그리고 전차부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 전반에 걸친 이 사치스러운 공공 및 민간사업 프로그램은 세금 인상으로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는 상류 계층이 크게 분개했던 조치였다. 대조적으로, 그의 포퓰리즘적인 통치 방식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로마와 로마 속주 모두의) 하층민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동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인이 그를 강박적이고 부패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수에토니우스는 많은 로마인이 로마 대화재가 그가 계획한 궁궐 단지인 도무스 아우레아의 땅을 정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네로가 선동한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또한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기독교인을 화재의 희생양으로 붙잡아 산 채로 불태웠다고 한다. 이는 마치 공적 정의가 아닌 개인적인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로마 평민들(특히 네로가 죽지 않고 돌아올 것이라는 대중적인 전설이 있었던 제국의 동부 속주에서) 사이에서 그의 인기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 때문에 네로의 폭정 행위에 대한 고대 사료들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죽은 뒤, 적어도 세 명의 단명하고 실패한 반란 지도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신을 "네로의 환생"이라고 표현했다. AD 68년, 갈바의 지지를 받은 원로원 의원인 빈덱스가 네로에게 반기를 들었다. 빈덱스의 반란은 즉각적인 목표에 실패했지만, 네로는 불만을 품은 시민과 군사 당국이 결국 갈바를 황제로 선택하자 로마를 탈출했다. 68년 6월 9일, 네로는 최초로 자결을 한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는 궐석 재판을 통해 공공의 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된 후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그의 죽음으로 율리오 클라우디아 왕조는 막을 내렸고, 네 황제의 해로 알려진 짧은 내전을 촉발했다.
AD 54년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즉위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 브리타니아는 계속해서 수십 년에 걸쳐 정복되었다.
AD 58-63년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 전쟁
AD 58-59년 코르불로의 아르메니아 캠페인을 나타낸 지도. 아르메니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부터 로마의 클리엔테스 국가였지만 52/53년 파트리아는 그들이 미는 티리다테스를 왕좌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들이 네로가 즉위하는 시기에 일어나 젊은 황제는 강력하게 대응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치세 중 유일한 주요 원정이었던 전쟁은 유능한 장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이끌면서 시작되었다. 빠르게 아르탁사타를 점령하고 불태운 로마군은 티그라노케르타 역시 손쉽게 점령했다. 로마는 자신들이 미는 티그라네스 6세를 왕좌에 앉히고 철수했다. 당시 로마군은 파르티아의 왕 볼로가세스가 자국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진압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한 사실에 도움을 받았다.
AD 61년, 티그라네스의 파르티아 습격은 그들의 반격을 촉발했고 62년, 루키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항복으로 절정에 달하면서 전쟁의 막을 내렸다. 반란 문제를 해결한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로 시선을 돌렸고, 몇 년간의 결말이 나지 않는 전투 끝에 란데이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분쟁은 파르티아 아르사케스 왕가의 왕자가 아르메니아 왕좌에 앉게 된다는 효과적인 교착 상태와 공식적인 타협으로 끝났다. 하지만 지명은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AD 60년 부디카의 반란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딸을 둔 부디카의 남편 프라수타구스는 명목상 로마의 독립적인 동맹으로 부족을 통치했으며 로마와 그의 딸들에게 유산을 공동으로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여자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로마에게 그의 유언은 무시되었고 다스리던 영토와 재산은 몰수되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부디카는 채찍질을 당하고 딸들은 강간당했다고 한다. AD 60년 또는 61년, 총독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웨일스 북서쪽의 모나 섬(오늘날 앵글시)에서 캠페인을 하고 있을 때 부디카는 이케니족, 트리노반테스족과 다른 부족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에 트리노반테스족의 수도였던 카물로두눔은 파괴됐었지만 당시에는 로마의 퇴역 병사들이 정착하고 전임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신전이 있는 콜로니아였다. 반란 소식을 들은 수에토니우스는 반란군이 노리는 20년 된 상업도시인 론디니움(오늘날 런던)으로 서둘러 갔지만 방어하기에는 수가 부족하여 도시를 버리고 도피했다. 부디카의 대군은 제9군단 히스파나를 물리치고 론디니움과 베룰라니움을 불태웠다. 약 7만~8만 명의 로마인과 브리타니아인이 3개 도시에서 부디카군에 목숨을 잃고 고문으로 많은 목숨을 잃었다. 한편 수에토니우스는 웨스트 미들랜즈에서 병력을 재편성하여 수적으로 크게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을 단호하게 격파했다. 이 위기로 인해 네로는 브리타니아에서 로마군을 모두 철수시키는 것을 고려했지만 수에토니우스의 승리는 로마가 속주를 다시 장악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부디카는 (타키투스에 따르면)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자결했거나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병으로 사망했다.
AD 68년 빈덱스와 갈바의 반란
후대에 신설되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수페리오르, 다키아 속주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AD 68년 3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의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네로의 세금 정책에 반기를 들고 지지를 얻기 위해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총독 세르비우스 술키피우스 갈바에게 반란에 동참하고 황제로 선언할 것을 요청했다.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주둔군의 지휘관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는 빈덱스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5월, 베손티오에서 빈덱스를 제압했다. 빈덱스는 자결하고 베르기니우스의 군대가 그를 황제로 선포하려고 시도했지만 거부했다. 갈바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했지만 그에 대한 지지가 증가했고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도 갈바를 지지하며 떠났다. 한편, 해외로 도피하려다 실패한 네로에게 원로원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고 처형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그를 잡기 위해 무장 세력이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서신을 받았다. 원로원은 네로가 율리오 클라우디아 가문의 마지막 남자였기 때문에 여전히 방침을 주저하고 숙고했다. 실제로 그들은 대부분 평생 황실을 섬겼고 신격화된 혈통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반기를 든 총독들과 타협을 통해 적어도 미래의 왕조 후계자가 탄생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네로는 기병대가 접근하는 소리에 함께 있던 해방 노예 출신의 개인 비서에게 자신의 목숨을 끊도록 지시했다. 기병 중 하나가 들어와 죽어가는 네로를 구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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