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395-423년 호노리우스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작은 아들이자 395년부터 408년 사망할 때까지 제국의 동쪽을 통치한 아르카디우스의 형제였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410년, 로마는 거의 800년 만에 처음으로 약탈당했다. 서로마 제국의 기준에서도 호노리우스의 치세는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다. 그의 초기 통치는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어린 시절)과 장인(성인 이후)인 스틸리코의 지지를 받았다.
AD 407-411년 9월경 콘스탄티누스 3세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는 407년 브리타니아에서 스스로를 서로마 황제라고 선언하고 갈리아에 정착한 로마의 장군이다. 그는 409년부터 411년까지 공동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브리타니아에서 유혈 투쟁 중에 권력을 잡았고 407년 지역 군단으로부터 황제로 칭송받았다. 그는 지난겨울에 라인 강을 건너온 여러 게르만족 침략자들과 맞서기 위해 브리타니아에서 모든 기동부대를 이끌고 즉시 갈리아로 이동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군대와의 몇 번의 전투 끝에 우위를 점했다. 그 결과 호노리우스는 409년 콘스탄티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했다. 침략 부족들의 활동, 거의 무방비 상태에 가까운 브리타니아에 대한 색슨족의 습격, 그리고 그의 고위 지휘관들의 탈주는 지지의 붕괴로 이어졌다. 더 많은 군사적 좌절 후에 그는 411년에 퇴위했다. 그는 붙잡혀 곧 처형되었다.
AD 421년 2월 8일-9월 2일 콘스탄티우스 3세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는 호노리우스 아래에서 장군으로서의 능력으로 황제 자리를 얻었고, 411년에는 마기스테르 밀리툼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같은 해, 그는 스스로를 황제로 선언한 로마의 장군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누스 3세의 수도인 갈리아의 아를로 진격하여 반군의 장군 게론티우스를 격파한 뒤 도시를 포위했다. 에도비쿠스가 이끄는 구원군을 물리친 후, 콘스탄티우스는 무사히 벗어나는 것을 약속하면서 콘스탄티누스가 항복하도록 설득했지만, 항복하자마자 그를 배신하고 참수했다. 콘스탄티우스는 그 후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여러 야만인 집단에 맞서 캠페인을 이끌었고, 서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콘스탄티우스는 421년 2월 8일 호노리우스에 의해 서로마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421년 9월 2일에 사망하기 전까지 7개월 동안 통치했다.
407년 황제를 자칭한 콘스탄티누스 3세는 브리타니아의 전군을 이끌고 갈리아로 향했다. 408년 황제의 장인 스틸리코가 몰락하면서 휘하 장교들이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에게 귀순했다. 이탈리아와 로마는 다시 서고트족의 침공을 받았다. 410년 호노리우스는 브리타니아로 편지를 보내 스스로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모두 철수한 브리타니아의 사람들은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420년까지 야만인 침략을 나타낸 지도. 408년 여름 스틸리코가 축출되고 처형된 이후부터 로마는 서고트족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대부분 게르만족 출신으로 이루어진 로마군을 지휘할 강력한 장군이 부족하자 호노리우스는 직접 대응보다는 적들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택했다. 8세기 동안 외적의 침입에 노출되지 않았던 도시 로마는 410년 8월 24일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에게 약탈당했다. 유능한 사령관 콘스탄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 3세를 격파하고 413년 북부 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요비누스를 진압했다. 414년 히스파니아에서 황제를 선언한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그는 리파라 섬으로 유배되었다.
418년 서로마 제국의 모습. 브리타니아는 별개의 세력이 되었고 서고트는 갈리아 아퀴타니아 지역을, 수에비는 히스파니아의 북동부 갈라이키아를 차지했으며 갈리아 북동부는 프랑크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황제의 칙령으로 갈리아 지역의 속주는 중앙 정부와 연결이 완화되어 자체적으로 행정을 처리하게 되었고 매년 아를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라벤나에서 호노리우스 황제는 내시 중 한 사람, 아마도 새를 사육하는 사람에게서 로마가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황제는 "조금 전만 해도 내 손에서 먹고 있었는데!"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내시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황제가 기르는 '로마'라는 수컷 새가 아니라 알라리크의 손에 도시 로마가 몰락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나의 새 로마가 죽었다고 생각했소"라고 답했다. 그들은 황제의 어리석음이 너무나 컸다고 전한다.
AD 423년 8월 27일-425년 5월 요안네스
호노리우스 황제가 죽자(423년 8월 15일), 테오도시우스 가문의 남아있는 통치자인 테오도시우스 2세는 삼촌의 죽음을 발표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 사이 귀족이었던 카스티누스는 요안네스(라틴어 요한네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요안네스는 동부의 황제와 합의하기를 바랐지만 테오도시우스 2세가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공동 황제로 격상시키면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아에티우스를 그가 생활했던 훈족에게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아에티우스가 떠난 사이 동로마의 군대가 진군하여 아퀼레이아에 진을 쳤다. 라벤나는 곧 함락되어 요안네스는 아퀼레이아로 끌려가 먼저 손이 잘리고, 히포드롬에서 나귀에 탄 채 민중의 모욕을 받았다. 더 많은 모욕과 부상 끝에 425년 6월 또는 7월에 목이 잘렸다.
AD 425년 10월 23일-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는 어린 시절에 황제가 되어 가장 긴 치세 중 하나였지만, 훈족 아틸라의 캠페인을 포함하여 내전과 고대 말기 이주 시대의 침략 속에서 권력을 다투는 강력한 장군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는 갈라 플라키디아와 콘스탄티우스 3세의 아들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375)의 증손자이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의 손자로서, 발렌티니아누스 역시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일원이었고, 그의 아내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도 여기에 속했다. 아우구스타 갈라 플라키디아는 그녀의 아들이 통치하는 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아에티우스, 펠릭스, 그리고 다가오는 아프리카이, 보니파키우스는 모두 서부 제국 내에서 권력을 놓고 경쟁했다. 결국 아에티우스는 펠릭스와 보니파키우스를 물리쳤다. 아에티우스는 제국을 침략하는 많은 게르만 부족에 대항하여 전쟁을 계속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치세 동안 훈족은 로마 제국을 침략했다. 결국 아에티우스는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을 물리쳤다. 훈족이 돌아오자, 교황 레오 1세와 다른 두 명의 원로원은 아틸라에게 떠나도록 설득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에티우스를 죽였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아에티우스의 경호원들은 발렌티니아누스를 암살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통치는 서부 제국의 계속되는 붕괴로 특징지어졌다.
451년까지 야만인의 침략을 나타낸 모습. 마기스테르 밀리툼들의 권력 투쟁은 서부 제국을 더욱 약화시켰다. 갈리아 남동부를 차지한 서고트족을 퇴거시킬 수 없었고 반달족은 히스파니아를 지나 마우레타니아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담당한 보니파키우스는 반달족과 공모하여 서부 지역을 넘겨주었다. 그는 라벤나에서 아에티우스에게 승리했지만 부상으로 사망했다. 435년 황제는 게이세리쿠스와 강화를 맺어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의 소유를 인정했다. 아에티우스가 갈리아에 신경 쓰는 동안 439년 10월 19일 카르타고가 반달족에 점령되었다. 부유한 북아프리카 속주의 상실은 제국에 큰 타격이 되었고 경제적인 손실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440년 시칠리아가 약탈당했고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도 점령되었다. 히스파니아 역시 444년까지 수에비의 확장으로 많은 영토를 상실하게 되어 서부 제국은 재정 문제를 겪게 되었다.
450년경 훈족 아틸라의 제국. 훈족이 441년부터 449년까지 다누비우스 지역을 압박하면서 서부 제국은 한숨 돌렸다. 449년 아틸라는 원치 않는 결혼에서 구해주면 서부 제국의 절반을 주겠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의 편지를 받게 된다. 침공 명분을 찾고 있던 아틸라는 450년 동부 제국과 화평을 하고 갈리아로 향했다. 격노한 황제는 호노리아의 심부름꾼을 잡아 모든 내용을 밝히는 고문을 하고 참수를 했다.
451년 초, 라인 강을 건넌 아틸라는 4월 7일 디보두룸 메디오마트리쿰(메스)을 점령했다. 아에티우스는 서고트족과 부르군트인을 포함한 연합군을 모아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의 점령을 막고 카탈라우눔(샬롱) 전투에서 훈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패주한 아틸라는 재집결하여 452년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아퀼레이아를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베로나와 빈켄티아(비첸차)도 점령했다. 라벤나의 발렌티니아누스 궁정은 로마로 옮겨갔다. 황제는 사절단을 보내 아틸라에게 떠나도록 설득하며 동부 황제 마르키아누스의 침공 소식도 알려주었다. 453년 아틸라의 사망과 아들들의 권력 투쟁은 제국에 대한 훈족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AD 455년 3월 17일-5월 31일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부유한 원로원 의원이자 저명한 귀족이었으며 마기스테르 밀리툼 아에티우스와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가 죽은 다음날 원로원의 지지를 확보하고 궁정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왕좌를 확보했다. 그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미망인과 강제 결혼하고 발렌티니아누스의 딸이 자신의 아들과 결혼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의 지위를 강화했다. 그는 새 아내의 딸이 반달의 왕 게이세리쿠스의 아들과 약혼한 것을 취소했다. 이것은 발렌티니아누스의 딸을 위해 로마로 함대를 보낸 게이세리쿠스를 격분시켰다. 막시무스는 서고트족으로부터 군대를 얻는 데 실패했고, 반달족이 도착하자 도주했으며 혼란 속에서 그의 수행원과 경호원으로부터 떨어져 살해되었다. 반달족은 로마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456년 로마의 약탈을 묘사한 그림. 반달족은 도시로 접근하기 전 모든 수도교를 파괴했다. 아마도 막시무스와 그의 아들 팔라디우스는 로마 시민에게 목격되어 살해되었을 것이다. 발렌티니아누스의 미망인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딸 에우도키아와 플라키디아는 반달족에게 사로잡혔고 에우도키아는 후네리크(Huneric)와 결혼하게 된다. 약탈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살인과 폭력이 거의 없이 도시의 건물도 불태우지 않았다는 주장과 신전, 공공건물, 주택, 궁전이 약탈당하고 수많은 로마인이 노예가 되었다는 주장으로 갈린다. 현대 역사가들은 막대한 양의 재화, 예술품 파괴, 학살, 노예화에 동의한다.
AD 455년 7월 9일-456년 10월 17일 아비투스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는 피아첸차의 주교뿐만 아니라 갈리아 출신 원로원 의원이자 고위 내정 관리이자 군사 행정의 고위 장교였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행정적인 관점에서나 서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로 축소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러한 이유로, 황제로서, 그는 몇몇 갈리아 원로원 의원을 제국 행정부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원로원 귀족들과 455년 반달족에 의해 도시를 약탈로 고통을 당한 로마 사람들에 의해 반대되었다. 아비투스는 서고트족, 특히 그의 친구이자 아비투스 황제를 칭송한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2세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테오도리크가 아비투스의 명령으로 히스파니아를 침공하면서 서고트족과 로마인 사이의 강력하고 유용한 동맹의 가능성은 희미해졌고, 이로 인해 아비투스를 폐위시킨 로마 반란군 장군들에 대항하여 아비투스를 도울 수 없었다.
AD 457년 12월 28일-461년 8월 2일 마이오리아누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이오리아누스는 로마군의 저명한 장군이었으며 457년에 아비투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이었다. 마이오리아누스는 서로마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힘을 합친 마지막 황제였다. 이탈리아, 달마티아, 그리고 북부 갈리아에 있는 일부 영토만을 소유한 마이오리아누스는 제국의 적들에 대항하여 3년 동안 엄격하게 캠페인을 벌였다. 476/480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사실 그들의 야만인 장군들의 도구 또는 동로마 궁정에서 선택하고 통제되는 황제였다. 이탈리아에 대한 반달족의 공격을 물리친 후, 마이오리아누스는 남부 갈리아에 있는 서고트 왕국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아렐라테 전투에서 테오도리크 2세를 물리친 마이오리아누스는 셉티마니아와 히스파니아의 고트족에게 그들의 소유지를 버리고 즉시 연합군 지위로 돌아가도록 강요했다. 그러고 나서 마이오리아누스는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하여, 루그두눔 포위전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론 계곡에서 그들을 추방하고, 그들을 연합군의 지위로 전락시켰다. 460년, 마이오리아누스는 히스파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갈리아를 떠났다. 그의 장군들은 히스파니아 북서부에 있는 수에비 왕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했고, 루쿠스 아우구스티와 스칼라비스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연합국의 지위로 떨어뜨렸다. 반달족으로부터 아프리카를 되찾기 위해 계획했던 그의 함대는 배반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마이오리아누스는 더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제국의 행정부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강력한 장군 리키메르는 그의 개혁으로 원로원 귀족에게 인기가 없게 된 마이오리아누스를 폐위시키고 죽였다.
마이오리아누스는 4년의 치세 동안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남부의 대부분을 회복하는 한편, 서고트족, 부르군트인, 수에비족을 연합군으로 지위를 떨어뜨렸다.
461년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아비투스가 리키메르와 마이오리아누스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마이오리아누스는 권력을 추구하는 야만인 귀족들과 리키메르의 음모에 운명이 결정되었다. 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황제가 몇 명의 호위병과 함께 로마로 출발하자 리키메르는 토르토나 부근에서 마이오리아누스를 만나 그를 구금했다. 5일 후, 황제는 참수되어 약 4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리키메르는 자신이 뒤에서 부릴 수 있는 사람을 황제로 삼기 위해 3개월을 기다려 무능한 원로원 의원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추대했다.
AD 461년 11월 19일-465년 11월 14일 리비우스 세베루스
때로는 세베루스 3세로 불리는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로마 원로원이 배출하고 권력이 없는 마지막 서부 황제 중 하나였으며 실제 권력은 마기스테르 밀리툼 리키메르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제국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기록에는 그를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묘사한다. 그의 치세에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의 지배권은 상실되었고 달마티아는 동부 제국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465년 자연사한 것으로 보인다.
AD 467년 4월 12일-472년 7월 11일 안테미우스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는 아마도 마지막으로 유능한 서로마 황제였으며 서로마 제국의 잔해가 직면한 두 가지 주요 군사적 난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피레네 산맥에 걸쳐 있던 에우리크 치하에서 부활한 서고트족과 게이세리쿠스 치하의 무자비한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었다. 안테미우스는 그와 권력을 다투던 고트 출신의 장군 리키메르에게 살해되었다.
오늘날 케이프 본의 모습. 468년 레오 1세, 안테미우스, 마르켈리누스는 반달족에 대한 캠페인을 준비했다. 총지휘관은 레오의 처남 바실리스쿠스였다. 동부, 서부 일리리쿰 연합군을 수송하기 위해 1천 척 이상의 함대가 집결했고 대부분의 비용은 동로마 제국이 부담했다. 하지만 케이프 본 해전에서 패배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서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회복은 포기하게 되었다.
AD 472년 7월 11일-11월 2일 올리브리우스
아니키우스 올리브리우스는 사실 게르만계 마기스테르 밀리툼 리키메르에 의해 권좌에 오른 꼭두각시 통치자였으며 실제 권력은 리키메르와 그의 조카 군도바드가 쥐고 있는 반면, 그는 종교에 주로 관심이 있었다.
AD 473년 3월 3/5일-474년 6월 24일 글리케리우스
글리케리우스는 올리브리우스 치세에 도메스티코룸(궁전 경호대 지휘관)이었다. 4개월간의 공백 후, 글리케리우스는 473년 3월 왕좌 뒤에 있는 군도바드의 세력과 마기스테르 밀리툼에 의해 서부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의 치세에 서고트족의 이탈리아 침공 시도가 격퇴되어 갈리아로 넘어간 것을 제외하고는 매우 적은 사건이 알려져 있다. 글리케리우스는 또한 선물을 통해 동고트족의 침입을 막았다. 글리케리우스는 동로마의 황제 레오 1세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레오 1세는 대신 율리우스 네포스를 황제로 임명하고 그를 군대와 함께 보냈다. 군도바드가 부르군트인을 통치하기 위해 떠났기 때문에 글리케리우스는 동맹이 없었다. 그래서 474년 6월 24일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살로나의 주교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그는 474년, 아마도 480년 이후 얼마 뒤에 죽었다. 그는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의 암살에 관여했을지도 모른다.
AD 474년 6월-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율리우스 네포스는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잃은 후, 그의 고향인 달마티아로 후퇴했고, 그는 480년에 살해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아 계속해서 서부 제국 칭호를 주장했다. 비록 그러한 공로가 이탈리아에서 네포스의 후계자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에게 가장 자주 수여되지만, 네포스는 일부 역사가에게 마지막 서부 로마 황제로 여겨진다. 달마티아 출신인 네포스는 그의 삼촌 마르켈리누스의 뒤를 이어 달마티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그 지방의 반자치 총독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동부 황제 레오 1세가 임명한 서부 황제 안테미우스가 사망한 후 그를 이어받은 올리브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레오는 서쪽에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려 했고 473년 12월 네포스에게 군대 지휘권을 부여하여 이탈리아를 공격하고 글리케리우스를 폐위시키려 했다. 황제 네포스는 474년 봄 레오 2세의 후계자 제노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로 떠났고, 6월 19일 군대와 함께 로마 근교의 포르투스에 상륙했다. 네포스는 재빨리 글리케리우스를 폐위시키고 474년 6월 24일 로마에서 서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9세기 카롤루스(샤를마뉴) 대제가 즉위하기 전까지 이 도시에서 왕관을 쓴 마지막 황제였다. 네포스는 비록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지만, 서부 제국의 명성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대한 서고트족의 공격을 격퇴하고 부르군트인을 다시 한번 포이데라티로 격하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네포스는 그의 관심의 대부분을 갈리아에서 제국의 지배와 권위를 재강조하는데 집중했지만, 서부 제국은 더 이상 그 지역에서 서고트족의 정복을 막을 충분한 힘을 낼 수 없었다. 갈리아에서 서고트족을 이기지 못한 것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제노를 찬탈한 바실리스쿠스의 짧은 전복은 이미 이탈리아에서 네포스의 불안정한 지위를 약화시켰다. 475년, 네포스가 새로 임명한 마기스테르 밀리툼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켜 서부 제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진군했다. 오레스테스의 군대를 상대할 수 없게 되자, 네포스는 달마티아로 도망쳤고 두 달 후, 오레스테스는 그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AD 475년 10월 31일-476년 9월 4일 로물루스
흔히 아우구스툴루스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아버지 마기스테르 밀리툼 오레스테스에 의해 황위에 올랐고, 그 당시 아직 미성년자였지만, 그의 아버지의 명목상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았다. 로물루스가 불과 10개월 동안 통치한 후, 야만인 장군 오도아케르는 오레스테스를 물리치고 죽이고 로물루스를 폐위시켰다. 오도아케르가 후계자를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물루스는 전형적으로 마지막 서로마 황제로 여겨지며, 그의 퇴임은 정치적 실체로서 서로마 제국의 종말을 나타낸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퇴위는 때때로 고대에서 중세 시대로의 전환을 나타내기 위해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사용된다. 로물루스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황제의 정책이나 법, 비문은 알려져 있지 않고, 이는 그가 그늘지고 상대적으로 하찮은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남긴다. 별칭 '아우구스툴루스'는 "어린 아우구스투스"를 의미하며 그의 어린 나이를 빗대어 조롱하는 별명이었다. 로물루스의 직계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마도 그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둘 다 로마의 판노니아 속주 출신이었고, 그의 가족 중 다수는 군 출신이었다. 로물루스는 475년 전임자인 율리우스 네포스에게서 찬탈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 네포스는 달마티아로 도망쳐 계속 제국 칭호를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로물루스의 합법성이 저해되었고 그가 동로마 황제 제노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476년, 이탈리아의 야만인 포이데라티(군사동맹)는 정착할 이탈리아 땅을 요구했지만, 오레스테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들의 지도자 오도아케르 아래의 포이데라티는 오레스테스를 물리치고 죽이고 로물루스를 폐위시켰으며 그는 이탈리아의 첫 왕이 되어 황제 제노를 명목상의 종주로 받들었다.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그는 나폴리 근처의 캄파니아의 거대한 요새인 카스텔룸 루쿨라눔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476년의 서로마 제국(녹색)과 동로마 제국(주황색). 갈리아는 실제 독립적으로 통치되었고 달마티아는 반자치였으며 제국의 영향권은 이탈리아로 제한되었다. 황제의 임명과 권한도 동로마 제국에 좌우되었다.
476년까지 이민족 침략을 나타낸 지도.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를 퇴위시키고 왕이 되면서 동로마 제국을 종주국으로 받들었다. 달마티아에는 네포스 황제가 여전히 서부 제국을 주장하고 있었고 갈리아 북부도 공식적으로는 서부 제국의 일부였다. 실제로 서부 제국의 몰락은 후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용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델로보 성의 모습. 476년 퇴위 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거주한 카스텔룸 루쿨라눔.
달마티아에 있던 네포스는 공식적으로 서로마의 황제로 인정받았지만 이탈리아 탈환을 위한 군사적 지원이나 자금 지원은 없었다. 480년 네포스가 살해되면서 공식 황제는 동로마의 황제 제노 한 명이 되었다.
'로마 이야기 > 로마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기에 따른 로마 제국의 지도 (0) | 2022.01.21 |
---|---|
사비니 여인 약탈 (0) | 2022.01.01 |
로마 제국 역사 지도 - 10편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테오도시우스 (0) | 2021.09.17 |
로마 제국 역사 지도 - 9편 사분통치 (0) | 2021.09.09 |
로마 제국 역사 지도 - 8편 3세기의 위기 (0) | 2021.09.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