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지도는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공화국 로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려진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했다. 오현제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은 권력의 절정에 있었다.
로마인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적, 철학적, 의학적 토대 위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고 군사, 행정, 건축 및 법률과 같은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현대 서구 문명의 행정적, 법적 기반을 구축했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로 세워져 팽창주의 정책을 따름으로써 다른 도시국가들을 통제했다. 첫째, 이탈리아에 대한 절대 권력을 확립하고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군사력 면에서는 어떤 경쟁 군대보다 우수한 군사 체계를 구축했고, 회복력이 좋고 단련된 전사들인 군단병이라는 이름의 군사 집단을 구축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지배했다.
로마 제국의 지도는 로마인이 전성기였던 2세기에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도시들은 로마 제국의 경계 안에 있었다.
이스탄불 블로그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자세한 기사를 보는 것은 언뜻 보면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한때 로마의 공동 수도였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탄불에는 상당한 로마 유산이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8개의 주제 아래 로마 제국의 간략한 역사를 볼 수 있다. 로마 제국 지도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주제를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1. 로마 공화국
로마는 오랫동안 공화정 체제에 의해 통치된 국가였다. 로마의 의원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고, 그들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집정관을 국가 원수로 임명했다. 이 집정관들에게는 위기가 닥쳤을 때 절대적인 권력이 주어졌다.
로마 제국은 역사를 통틀어 다양한 규모의 다양한 반란, 군사 공격 및 침략과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의 위기관리 능력 덕분에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로마 공화국은 BC 509-27년에 존재했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몇 가지 소제목 아래에 나열할 수 있다.
로마 최대의 적 한니발
로마에 대한 가장 큰 군사적 위협은 지중해 지역에서 로마 제국 다음가는 초강대국이었던 고대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코끼리로 증원된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의 중심부까지 근접했고, 눈부신 전략적 행보 덕분에 로마를 거의 정복할 뻔했다.
로마인은 반복해서 한니발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카르타고인에 대한 몇 번의 실패와 반격 끝에 마침내 그가 사라지게 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한니발이 주도한 캠페인이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군대에 대한 한니발의 통제력, 그의 전술과 승리는 그를 고대의 가장 위대한 군사 천재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본토에서 반복적으로 무찌르고 여러 해 동안 그 땅을 점령했다.
제국의 강적 야만인들
로마 제국의 오랜 적은 북쪽의 야만인 부족들이었다. 오늘날의 북유럽 민족들은 로마 문명의 영역 밖에 있었기 때문에 야만인으로 여겨졌다.
초기에, 개별 부족으로서 싸웠던 야만인들은 로마 군단에 의해 쉽게 격파되었다. 나중에 이 부족들이 모여서 연합을 구축하자 그들은 로마 제국에 큰 위협이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야만인 연합을 상대로 첫 번째 주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는 수세기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영구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서쪽의 이러한 불안정은 점차 로마를 약화시켰다.
스파르타쿠스, 거대한 노예 반란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반란은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의 검투사가 시작하고 조직한 반란이다. 초기에는 소요의 범위가 제한적이었지만, 빠르게 확산되어 조직적인 반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은 결국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2. 트리움비라투스(삼두정치)
로마 공화국에서 제국 로마로의 이행은 매우 복잡하고 많은 줄거리를 수반하여 많은 책과 영화(예. 셰익스피어)에 영감을 주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강조한 이 기간은 삼두정치(세 명의 권력자가 통치를 나눈 것)와 그 뒤를 이은 내전 시대이다.
로마의 이름으로 치러진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원로원은 군사 작전을 이끌 세 명의 지도자를 임명했다. 이 사람들은 이미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였지만, 그들은 또한 훌륭한 지휘관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제1차 삼두정치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크라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1차 삼두정치를 구성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지능, 웅변 능력, 군대에 대한 영향력 덕분에 두각을 나타냈다.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그가 자신을 독재자로 선언할까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로원에서 그를 암살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에 이어 내전이 일어났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맹세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음모의 배후로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에서 도망쳐야 했다.
브루투스와 롱기누스는 발칸 반도에서 군대를 모아 로마를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와 같은 위대한 전술가들과 필적할 수 없었고, 결국 패배했다.
제2차 삼두정치
제2차 삼두정치는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레피두스로 구성되었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군이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그의 가장 큰 경쟁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공범인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쳤다.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의 패권을 받아들였다. 그 당시 로마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로마 공화국은 역사가 되고 있었고 로마 제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3. 아우구스투스 치하의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자신을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라고 선언했다. 그는 세월 동안 로마를 통치했고 AD 476년까지 절대 권력을 가진 대부분의 군인 출신 황제들에 의해 계속 통치되었다.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불행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는 훌륭한 전략가였고 우리는 그가 헛되이 살해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를 공화국에서 몰아내고 그를 죽인 원로원은 강제로 옥타비아누스의 패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우구스투스를 뒤따라 번영의 시기에 로마는 전성기를 맞았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지중해를 로마 제국으로 둘러쌌다.
4. 5현제
오현제로도 알려진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을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 위의 로마 제국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117년에 로마는 최대 영토에 도달했다.
이 기간은 "양자 황제" 시대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각 황제는 재위 기간 동안 후계자를 입양하고 교육했다. 그러나, 이 잘 작동하는 시스템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의 아들 콤모두스를 즉위시키려 했을 때 끝이 났다.
콤모두스는 로마를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는 콤모두스가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콤모두스가 황제였던 암흑기를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5. 로마 제국의 전성기 지도
로마 제국이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제국은 지중해를 완전히 장악했다. 전성기의 로마 제국 지도를 보면 생산성이 가장 높은 항구들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일명 오현제)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로마는 세베루스 왕조 동안에도 계속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사망하면서 50년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4. 로마의 테트라르키아(사두정치)
오현제 시대 이후 황위는 군부 쿠데타로 계속 바뀌었다. 200년대 혼란의 시기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첫 번째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는 로마의 불안정한 정치 생활을 규제하고 로마 사두정치(사분통치)를 확립했다.
이 제도는 동서의 두 상위 황제(아우구스투스)와 그들의 하위 및 지명된 후계자(카이사르)를 포함했다. 사두정치는 한동안 제국의 통치를 용이하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내전을 위한 길을 닦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중심을 동쪽으로 옮기는 것을 고려한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니코메디아에 궁전을 짓고 20년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자진해서 퇴위하면서, 크로아티아에 있는 새 궁전으로 물러났다.
사두정치 체제에서 서쪽의 막시미아누스와 동쪽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상위 황제였다. 서쪽의 콘스탄티우스(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와 동쪽의 갈레리우스는 하위 황제였다.
5.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사두정치의 카이사르(하위 황제)였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성공으로, 마침내 그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이 권력은 그가 주요 개혁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한 첫 번째 일 중 하나는 315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합법화한 것이다. 그의 전임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치세 동안 절정에 달했던 억압적인 정책들은 이로써 끝이 났다.
그는 또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기독교 교회의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가 공식적인 구조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는 주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중심을 동쪽으로 옮겼다. 그는 비잔티움(이스탄불)을 수도로 선포하고 최초의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었다. 도시의 주요 광장인 콘스탄티누스 포룸, 황제가 살았던 대궁전, 전차 경주가 조직된 히포드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평화를 정착시킨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냈고, 그가 사망했을 때, 그는 성 사도 교회에 묻혔다. 이 교회에는 사도들에게 바쳐진 12개의 석관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실제 유물이 있었다.
6. 로마 제국의 분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오랜 기간 지속된 내전 기간을 끝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가 죽은 후 황위를 위해 싸웠다. 통치가 나빠지자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스탄불에 발렌스 수도교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했다. 제국은 지도자를 잃은 채 방치되어 깊은 위기에 빠졌다.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 테오도시우스는 제국을 구하고 모든 것을 정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화를 완성한 황제가 되었다. 또한 이스탄불에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도 그에게 헌정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로마 제국은 둘로 나뉘었고 비잔틴 제국으로도 알려진 동로마 제국이 탄생했다.
로마 제국의 분열은 테오도시우스 사후 395년에 일어났다.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반면에 호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수도는 로마였다. 위의 로마 제국 지도에서 로마가 둘로 나뉜 것을 볼 수 있다.
7. 서로마 제국의 멸망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476년에 일어났다. 395년 로마가 분열되었을 때, 1453년까지 존속한 동로마 제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은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81년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서쪽에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정치적 권위의 공백을 메웠다. 로마의 중심부에 바티칸이 세워지고 교황이 거주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졌으며 중세 유럽 왕국을 통치하는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위의 로마 제국 지도에서 서로마 멸망 이후 유럽이 어떻게 분열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8. 비잔틴 제국
로마 제국의 법적 후계자인 비잔틴 제국은 1,000년을 더 지속했다.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유명한 황제들은 로마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덕분에, 로마의 통치는 6세기에 지중해 전역에 다시 퍼졌다.
위의 동로마 지도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동안의 정복을 볼 수 있다. 자신을 로마 황제라고 생각한 유스티니아누스는 고트족에게서 영원한 수도 로마를 탈환했다. 그러나 비잔티움의 자원은 이 경계를 오랫동안 지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출처 : IstanbulC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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