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스는 군대를 창설하고 그리스인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전술을 도입함으로써 전통적인 전투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의 적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또한 사건이 증명했듯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군대 덕분에 페르시아, 박트리아, 인도인은 알렉산드로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필리포스가 기병대를 창설하기 전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말과 갑옷 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귀족들에게 지원받았다. 반면 보병은 위험이 닥쳤을 때 급히 징집된 소작농으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이들은 훈련과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전투에 동원될 때 그들은 소와 마차를 가지고 농장을 떠나야 했고, 이는 결국 농작물 생산량과 생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왕국 국경에 있는 호전적인 부족이나 훈련된 호플리테스 그리스 군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마케도니아 군대는 무력했다. 필리포스는 왕이 되자마자 전문적인 상비군을 창설하기 위한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 도시들처럼 필리포스도 통치 기간 내내 용병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백성뿐만 아니라 정복한 사람들을 군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규 급여와 승진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그는 보병에게 무기와 갑옷을 지급했지만 돈이 많이 드는 기병은 여전히 자신의 말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최정예 히파스피스티스(방패 소지자) 보병에게는 하루에 1 드라크메가, 기병에게는 3 드라크메가 지급되었다. 이 비율은 그리스 호플리테스 병사 한 명이 매일 받는 5 오볼(6 오볼 = 1 드라크메)과 그리스 기병의 2 드라크메(어쩌면 3 드라크메) 보다 높았다. 게다가, 화폐 보너스와 정복된 영토의 토지 지급까지 부하들에게 그들의 복무에 대한 공로와 더 많은 전투를 위한 장려책으로 주어졌다. 이러한 단순한 행위들은 징병의 필요성을 없애주었고, 더 이상 농민이 싸우기 위해 그들의 토지를 떠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다.
필리포스는 근접전에서 그리스식 호플리테스 방식 채택을 고려하지 않았다. 대신 테바이의 에파미논다스와 파메네스의 전술적 영향을 받은 그는 보병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고 여러 부대(부대 지휘관이 이끄는)로 나누어 집단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함께 궁극적으로 통제력을 지닌 팔랑크스를 구성했다. 그는 무장시키고 부하들을 호플리테스 전술로 훈련시킬 돈과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반면, 페르디카스 통치하에서 4,000명의 손실을 입은 것을 감안할 때, 필리포스는 치세 초기에 약간의 용병을 고용해야 했으며 이는 그에게 돈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게다가, 이 용병들은 호플리테스 전술에 정통하여 그에 따라 부하들을 훈련시킬 시간을 그에게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팔랑크스를 그렇게 만든 더 그럴듯한 이유는 이 대형이 그리스인이 전투에서 직면했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필리포스는 다양한 지형과 적군의 대형 및 숫자에 대처하기 위해 팔랑크스 대형의 두께를 8열에서 32열까지(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는 16열을 선호) 다양하게 변경하여, 전장에서 기동성과 무게와 힘을 갖출 수 있었다.
필리포스(또는 어쩌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특수 부대"의 일종으로 "발 동무"인 페제타이로이라고 알려진 보병 부대를 창설했을 수도 있다. 후에, 페제타이로이는 모든 보병의 이름이 되었고, 아마도 헤타이로이(동무 기병대)의 "균형"으로 이 특수 부대는 히파스피스티스(방패 소지자)로 불리며 아시아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필리포스는 또한 무게가 약 14파운드에 달하는 뾰족한 철제 투구와 지역의 산수유나무로 제작한 14-18피트 길이의 창 사리사를 포함하여 새로운 무기들을 도입했다.
사리사는 휘두르는데 양손이 필요했지만,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었고 적과 싸우기 전에 빠르게 결합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보병은 무기를 수직으로 들고("근접한 순서", 피크노시스), 팔랑크스가 적진에 접근하면 부대의 첫 5열이 사리사를 내리고 돌격했다.
길이가 매우 긴 사리사는 마케도니아 군대가 적을 꿰뚫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적의 짧은 검이 가까이 오지 못했기 때문에 근접 대형의 호플리테스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양측 대열이 실제로 만났을 때도 마케도니아의 갑옷, 정강이 보호대, 한쪽 어깨에 걸친 작은 방패, 짧은 검, 그리고 철제 호플리테스식 투구는 그리스 호플리테스보다 무게가 가벼워 이점을 가졌다.
필리포스의 혁신 대부분은 보병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그는 기병대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군대의 두 병종을 똑같이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기병대를 약 200명씩 여러 부대(일라이)로 편성하였는데, 이들은 출신 지역에 근거했다. 특별히 왕실 기병 부대(일레 바실리케)는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에서 매우 의지했던 빠른 기병 정찰대(프로드로모이)를 창설했을 수도 있다. 기병대의 정면 공격 대신, 필리포스는 기병대가 쐐기 대형을 형성하여 공격하도록 훈련시켰고, 주된 역할은 상대편 전선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마케도니아의 말은 적 전투원을 밀치고 떠밀었으며, 기수들은 창과 짧은 검을 휘두르며 높은 곳에서 베고 찔렀다. 사리소포로이라는 이름의 기병 부대도 있었고, 그들은 사리사를 들었다. 기수들이 긴 사리사를 휘두르면서 동시에 말을 몰아야 했기 때문에, 이 사리사는 보병 사리사보다 짧았을 것이다. 적진에 더 많은 혼란을 주기 위해 필리포스는 보병이 기병보다 앞서 교전하는 전형적인 그리스 전술을 뒤집었다. 그의 군대는 교전이 시작하면 기병대가 적의 측면을 향해 진격하여 그 뒤로 우회하는 한편, 대규모 팔랑크스가 중앙을 뚫고 기병대가 열어 놓은 틈으로 쏟아져 나온 점에서 독특했다. 이런 식으로, 적들은 두 개의 공격 전선 사이에 갇혔다.
필리포스는 어떤 종류의 교전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부하들을 지속적으로 훈련시켰다. 특히 보병은 강과 바위 지형을 가로질러 진군할 때 손쉽게 사리사를 사용하는 법과 사리사를 똑바로 세우거나 내린 자세로 달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된 직후인 335년 일리리아 캠페인에서 훈련과 훈련의 양상에 대해 알 수 있다. 필리포스는 또한 보병과 기병이 원활하게 협력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을 것이며, 아마도 그들의 충격적이고 경탄하게 하는 전술을 연마하기 위해 길이와 두께가 다른 모의 전열로 돌격했을 것이다. 왕은 또한 그의 새로운 군대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의도했다. 이를 위해 병사들은 식량을 찾고, 모든 장비, 음식, 음료를 운반하는 법을 배웠다. 부인과 가족에서부터 다양한 수행원, 심지어 매춘부까지 그리스와 페르시아 군대에 일반적으로 동행했던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마케도니아 군대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전에 소가 끌었던 식량과 장비를 싣고 느리게 움직이는 수레도 버려지고 노새나 말과 같이 더 빨리 이동하는 짐승으로 대체했다. 그 결과, 지형이나 날씨에 관계없이 빠르고 쉽게 진군할 수 있는 군대가 탄생했다.
필리포스의 군사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350년경에 그는 테살리아의 폴리에이데스(또는 폴리이도스)가 이끄는 공병단을 조직했는데, 그는 토션 투석기를 포함하여 새로운 공성 병기를 설계하고 있었다. 이는 기존의 기계식 투석기보다 더 멀리, 더 빠르게 화살을 발사하는 스프링이 달린 석궁과 유사했다. 필리포스는 340년 비잔티온 공성전에서 처음으로 토션 투석기를 사용했으며 이 무기는 알렉산드로스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다른 도시들을 항복시킬 수 있게 해 주었다. 실제로 폴리이도스의 제자 중 디아데스와 카리아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동행했다.
필리포스는 또한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정규군과 특수군을 군대에 편입했다. 예를 들어, 358년 일리리아에서 원정을 한 후 아그리아네스 투창병(스트리몬 강 상류에 살았던)이 합류했으며 342-341년에 트라키아를 정복한 후 트라키아 투창병과 스키타이 궁수가 그의 대열에 합류했다. 팔랑크스의 개별 연대들 중 일부는 특수 기능을 수행하거나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예를 들어, 무장도 가볍고 더 빠른 속도로 행군하는 정예 히파스피스티스에는 왕실의 아게마 또는 근위대도 포함되었다. 이 부대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고, 구성원 신분은 필리포스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그가 한 군사개혁의 정치적 성격이 드러난다. 군대에 입대하고 의도적으로 출신지 부대로 이루어진 이전의 적들은 그들의 부대가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싸웠으며, 뛰어난 지휘관은 (그의 장군 파르메니온처럼) 필리포스의 고위 참모로 보답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장군과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단결된 마케도니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필리포스는 14-18세 사이에 궁정에서 살면서 군사 훈련을 받고 말년에 왕과 함께 캠페인에 동행하며 개인 수행원으로서 봉사했던 젊은 귀족 소년들을 위한 왕실 시동 학교를 도입했을 수도 있다. 이 혁신은 실제로 볼모의 한 형태였으며 아마도 페르시아의 관습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이 소년들의 가족은 그들의 아들들이 궁정으로 끌려가는 것에 대해 거의 발언권이 없었으며, 그들의 안녕은 부친들의 충성심에 달려있었다.
디오도로스는 필리포스가 너무 방대하고 강력한 군대를 남겼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에 대한 캠페인을 벌일 때 지원군을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고 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포스는 359년 약 10,000명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에 불과했던 군대를 재위 말기인 336년까지 24,000명의 보병과 3,000명의 기병으로 규모를 늘렸다. 그는 이전에 마케도니아에서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군대를 만들어 왕국을 제국으로 만들 수 있게 했다.
출처 : Weapons and War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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