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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헬레니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 하

by 금곡동로사 2021.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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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캠페인

 

인도 아(亞)대륙 진출

 

스피타메네스의 죽음과 록사나와의 결혼 후 알렉산더는 새로운 사트라프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인도 아대륙으로 향했다. 그는 간다라(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파키스탄 북부에 걸쳐있는 지역)의 전 사트라프였던 족장들을 초대하여 그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요청했다. 인더스 강에서 히다스페스 강(젤룸 강)까지 왕국을 확장한 탁실라의 통치자 옴피스(인도 이름 암비)는 이에 따랐지만 캄보자의 아스바카 및 Assakenoi 섹션을 포함한 일부 언덕 부족의 족장(인도 문헌에서 Ashvayanas 및 Ashvakayanas라고도 함)은 거부했다. 암비는 알렉산더의 염려를 해소하기 위해 서둘러 귀중한 선물과 함께 그를 만나 자신과 그의 모든 병력을 처분했다. 알렉산더는 암비에게 그의 직함과 선물을 돌려줄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예복, 금은 장신구, 말 30마리, 금 천 달란트"의 옷장도 선물했다. 알렉산더는 대담하게 자신의 군대를 나누었고 암비는 Hund에서 구부러지는 인더스 강에 다리를 건설하는 헤파이스티온과 페르디카스를 도왔으며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고 알렉산더와 그의 전체 군대를 수도인 탁실라에서 모든 우정과 가장 자유로운 환대와 함께 영접했다.

 

이후 마케도니아 왕의 진격에 따라 탁실라는 5,000명의 병력과 함께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 참여했다. 그 승리 후 알렉산더는 포루스(인도 이름 푸루)를 쫓아 보냈다. 포루스는 호의적인 조건을 제공하라는 청을 보냈지만 그의 옛 적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을 간신히 피했다. 그러나 그 후 두 라이벌은 알렉산더가 직접 중재하여 화해했다. 그리고 탁실라는 히다스페스 강에 있는 함대의 장비에 열성적으로 기여한 후, 그 강과 인더스 강 사이의 전체 영토의 통치를 왕으로부터 위임받았다. 마카타스의 아들 필리포스가 죽은 후에 그에게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그는 알렉산더가 죽었을 때(BC 323)와 BC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지방 분할에서 그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BC 327/326 년 겨울, 알렉산더는 직접 코나르 계곡의 아스바카, Guraeus 계곡의 Guraeans, 스와트 및 버너 계곡의 아스바카에 대한 캠페인을 주도했다. 아스바카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알렉산더가 화살에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결국 아스바카는 패했다. 알렉산더는 마사가, 오르아 및 아오르노스(Aornos)의 거점에서 그를 상대로 싸웠던 아스바카와 대결했다.

 

마사가의 요새는 알렉산더가 발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힌 피투성이의 며칠 후에 몰락했다. 쿠르티오스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마사가의 전체 인구를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도 파괴했다." 오르아에서도 비슷한 학살이 이어졌다. 마사가와 오르아의 여파로 수많은 아스바카는 아오르노스의 요새로 도망쳤다. 알렉산더는 뒤를 쫓아 4일 만에 전략적 언덕 요새를 점령했다.

 

아오르노스 이후 알렉산더는 인더스 강을 건너 BC 326년 현재의 펀자브 지역인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히다스페스 강과 Acesines 강(체납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을 통치한 포루스 왕과 싸워 이겼다. 알렉산더는 포루스의 용맹에 감명을 받아 그를 동맹으로 삼았다. 그는 포루스를 사트라프로 지정하고 포루스의 영토에 이전에 소유하지 않았던 남동쪽의 히파시스 강(베아스 강)까지 추가했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 땅을 통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히다스페스 강 건너편에 두 개의 도시를 세웠고 이 시기에 사망한 그의 말을 기리기 위해 하나는 부케팔라로 명명했다. 다른 하나는 니카이아(승리)로, 현재의 펀자브 지역 몽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의 삶에서 장로 필로스트라투스는 포루스의 군에는 알렉산더 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운 코끼리가 있었으며 알렉산더는 그것을 헬리오스(태양)에게 헌정하고 이름을 아이아스(Ajax)라고 명명했다고 썼다. 알렉산더는 그렇게 위대한 동물이 위대한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엄니 주위에 골드 링이 있었고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아들 알렉산더가 헬리오스에게 아이아스를 바칩니다(ΑΛΕΞΑΝΔΡΟΣ Ο ΔΙΟΣ ΤΟΝ ΑΙΑΝΤΑ ΤΩΙ ΗΛΙΩΙ)"라고 적혀 있었다.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중앙을 공격하는 팔랑크스 / 알렉산더의 인도 아대륙 침공
BC 323년 아시아, 알렉산더 제국 및 주변 국가, 인도 아대륙의 난다 제국과 간가리다이

 

군대의 반란

 

포루스 왕국 동쪽의 갠지스 강 근처에는 마가다의 난다 제국이 있었고 더 동쪽으로는 인도 아대륙 벵골 지역의 간가리다이 제국이 있었다. 알렉산더 군은 다른 대규모 군대와 맞서게 될 것을 두려워했고 수년간의 캠페인에 지쳤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히파시스 강에서 반동을 일으켜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이 강은 알렉산더가 정복한 지역의 동쪽 끝을 표시했다.

 

마케도니아인들의 입장에서 포루스와의 투쟁은 용기를 무디게 했고 더 이상의 인도 진출을 멈추게 했다. 겨우 2만 보병과 2천의 기병만을 소집한 적을 격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알렉산더가 갠지스 강을 건너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폭력적으로 반대했다. 또한 그들이 들은 것처럼 강의 너비는 32 펄롱, 깊이는 100 패덤이었고, 반대편 기슭은 수많은 군대와 기병과 코끼리로 덮여있었다. 그들은 간다라이 족과 프라이시 족의 왕들이 8만 기병, 20만 보병, 8천 대의 전차, 6천 마리의 전쟁 코끼리와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다.

 

알렉산더는 병사들에게 더 멀리 행진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장군 코이노스는 그의 의견을 바꾸도록 간청했다. 그는 "그들은 부모, 아내, 자녀, 고국을 다시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알렉산더는 결국 동의하고 남쪽으로 향하여 인더스를 따라 진군했다. 그의 군대가 Malhi(현재의 물탄에서)와 다른 인도 부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더는 포위 공격 중에 부상을 입었다.

 

알렉산더는 대부분의 군대를 크라테로스 장군과 함께 카르마니아(이란 남부)로 보냈고 함대는 네아르코스 제독 아래 페르시아만 해안을 탐험하도록 의뢰했으며 ​​나머지는 게드로시아 사막과 마크란을 따라 더 어려운 남부 경로를 통해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알렉산더는 BC 324년에 수사에 도착했지만 혹독한 사막에서 많은 병사들을 잃었다.

 

페르시아에서의 말년

 

알렉산더는 그의 부재중에 많은 사트라프와 군사 책임자가 잘못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더는 수사로 가는 길에 이들 중 몇을 본보기로 처형했다. 감사의 표시로 그는 병사들의 빚을 갚고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나이가 많거나 전투가 불가능한 참전 용사들을 마케도니아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의 군대는 그의 의도를 오해하고 오피스(Opis) 마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송환을 거부하고 그의 페르시아 관습과 복장을 채택하고 페르시아 장교와 병사를 마케도니아 부대에 도입하는 것을 비판했다.

 

3일이 지나도 알렉산더는 병사들의 설득에 실패하게 되자 그는 페르시아인에게 군 지휘소를 부여하고 페르시아 부대에 마케도니아 군사 칭호를 부여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곧 용서를 구했고 알렉산더가 받아들였으며 그와 함께한 수천 명의 부하들을 위해 큰 연회를 열었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 간의 지속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고위 장교를 수사에 있는 페르시아인 및 다른 귀족 여성들과 단체로 결혼시켰지만 그중 일부만 1년 이상 지속된 것 같다. 한편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로 돌아왔을 때 파사르가다에에 있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 경비병이 그곳을 더럽힌 사실을 알게 되어 신속하게 처형했다. 알렉산더는 어릴 때부터 키루스 대왕을 존경하며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을 읽었다. 이 책은 전쟁과 통치에서 키루스를 영웅적인 왕이자 입법자로 묘사했다. 파사르가다에를 방문하는 동안 알렉산더는 건축가 아리스토불로스에게 키루스 무덤의 내부를 장식하도록 명령했다.

 

그 후 알렉산더는 엑바타나로 여행하여 페르시아 보물의 대부분을 회수했다. 그곳에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랑하던 헤파이스티온이 병이나 중독으로 사망했다.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은 알렉산더를 황폐화시켰고 그는 바빌론에서 값 비싼 화장용 장작을 준비하고 대중의 애도에 대한 법령을 명령했다. 바빌론으로 돌아온 알렉산더는 아라비아 침공으로 시작하여 일련의 새로운 캠페인을 계획했지만 헤파이스티온이 죽은 후 얼마 뒤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를 실현할 기회가 없었다.

 

알렉산더(좌)와 헤파이스티온(우) / 키루스 대왕의 무덤에 들린 알렉산더

 

죽음과 승계

 

BC 323년 6월 10일 또는 11일에 알렉산더는 바빌론에 있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전에서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알렉산더의 죽음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으며 죽음에 대한 세부 사항은 각각 약간씩 다르다.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사망하기 약 14일 전에 네아르코스 제독을 접대하고 라리사의 메디오스와 함께 밤낮으로 술을 마셨다. 그는 열이 났고 말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악화되었다. 두 번째 기록에서 디오도로스는 알렉산더가 헤라클레스를 기리기 위해 물을 타지 않은 큰 와인 한 그릇을 마신 후 고통에 시달렸고 11일 동안 약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열이 나지 않은 채 약간의 고통 끝에 사망했다. 아리아노스도 이것을 대안으로 언급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이 주장을 구체적으로 부인했다.

 

마케도니아 귀족의 암살 성향을 감안할 때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기록에 살해되었다고 나온다. 디오도로스, 플루타르코스, 아리아노스 및 유스티누스는 모두 알렉산더가 독살되었다는 이론을 언급했다. 유스티누스는 알렉산더가 독살 음모의 희생자라고 말했고 플루타르코스는 그것을 조작으로 일축했으며 디오도로스와 아리아노스는 모두 완전성을 위해서만 언급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되는 음모의 수장으로 올림피아스의 반대편이자 마케도니아 총독에서 얼마 전 해임된 안티파트로스 지명하고 있으며 상당히 일관된 설명을 하고 있다. 아마도 파르메니온과 필로타스의 운명을 보았을 때 바빌론으로의 소환장을 사형 선고로 받아들인 안티파트로스는 알렉산더의 포도주를 따르는 담당인 그의 아들 이올라스(Iollas)에게 독살하도록 계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참여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를 포함한 몇 가지 자연적 원인(질병)이 주장되었다.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의 1998년 기사는 그의 죽음을 장 천공과 마비 증세로 인한 장티푸스 발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의 또 다른 분석에서는 화농성(감염성) 척추염 또는 수막염을 시사했다. 급성 췌장염 및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를 포함한 다른 질병이 증상에 적합하다. 자연 원인 이론은 또한 알렉산더의 건강이 수년간의 과음과 심한 상처로 인해 악화되었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알렉산더가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느꼈던 고뇌는 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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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이후

 

알렉산더의 시신은 꿀로 채워진 황금으로 된 사람 형태의 관에 놓였고 그다음은 금으로 된 관에 놓였다. 아에리아누스에 따르면 아리스탄드로스라는 선견자는 알렉산더가 안식하는 땅은 "영원히 행복하고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마도 이전 왕을 매장하는 것이 왕실의 특권이었기 때문에 후계자들은 시신의 소유를 정통성의 상징으로 보았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장례 행렬이 마케도니아로 가던 도중 프톨레마이오스는 관을 뺏아서 일시적으로 멤피스로 가져갔다. 그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관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적어도 고대 후기까지 남아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마지막 후계자 중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티로스는 알렉산더의 관을 유리관으로 대체하여 원래의 관을 주화로 만들었다. 최근 그리스 북부의 암피폴리스에서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거대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만들어진 의도가 알렉산더의 매장지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무덤은 알렉산더 대왕의 가장 친한 친구인 헤파이스티온에게 헌정된 것으로 밝혀졌다.

 

알렉산더의 죽음을 기록한 바빌로니아 천문 일지(BC 323-322년경) / 기록을 토대로 묘사한 알렉산더의 장례 행렬
알렉산더 석관에 새겨진 세부 묘사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모두 알렉산드리아의 무덤을 방문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우연히 코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칼리굴라는 무덤에서 알렉산더의 흉갑을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AD 200년 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알렉산더의 무덤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라칼라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무덤을 방문했다. 그 후 무덤의 운명에 대한 세부 사항이 흐릿하다.

 

시돈 근처에서 발견된 소위 "알렉산더 석관"은 알렉산더의 유골이 포함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바스-릴리프가 알렉산더와 그의 동료들이 페르시아인과 싸우고 사냥을 묘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 원래는 331년 이수스 전투 직후 알렉산더가 임명한 시돈의 왕 압달로니무스(BC 311년 사망)의 석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압달로니무스의 죽음보다 더 이른 시기일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데마데스는 알렉산더가 죽은 후 목표가 없이 무질서한 움직임을 많이 보인 마케도니아 군대를 눈이 먼 사이클롭스에 비유했다. 또한 레오스테네스도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장군들 사이의 무정부 상태를 "눈을 잃은 후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른 채 더듬으며 느끼고 있다"는 눈먼 사이클롭스에 비유했다.

 

제국의 분열

 

알렉산더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의 죽음에 대한 보고가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바로 믿지 않았다. 알렉산더에게는 명백하거나 합법적인 상속인이 없었으며 록사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는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에 태어났다.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알렉산더의 동료들은 그의 임종 때 왕국을 누구에게 물려줄지 물었다. 그는 "가장 강한 자에게"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또 다른 이론은 마케도니아 군대를 고향으로 이끄는 새로 마케도니아의 섭정을 맡은 장군인 "크라테로스에게"를 그의 후계자들이 고의로 또는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가 이 시점에서 말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임을 암시했다. 디오도로스, 쿠르티오스, 유스티누스는 알렉산더가 증인 앞에서 그의 인장 반지를 보디가드이자 동료 기병의 지도자인 페르디카스에게 넘겨준 그럴듯한 이야기를 제공했다.

 

페르디카스는 처음에 권력을 주장하지 않았고 대신 남자 아이라면 록사네의 아기가 왕이 될 것이라고 제안하며 자신과 크라테로스, 레온나토스 및 안티파트로스를 수호자로 삼았다. 그러나 멜레아그로스 지휘하의 보병은 논의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합의를 거부했다. 대신 그들은 알렉산더의 이복형제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했다. 결국 양측은 화해했고 알렉산드로스 4세가 탄생한 후 그와 필리포스 3세는 이름뿐이었지만 공동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불화와 경쟁은 곧 마케도니아인들을 괴롭혔다. 바빌론 분할에서 페르디카스가 나눠준 사트라프들은 각 장군이 권력을 위해 사용하는 힘의 근원이 되었다. BC 321년 페르디카스가 암살된 후 마케도니아 연합이 무너졌고 헬레니즘 세계가 4개의 안정된 권력 블록으로 정착하기 전에 "후계자들(디아도코이)" 간의 40년 전쟁이 이어졌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메소포타미아와 중앙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아나톨리아의 아탈로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 4세와 필리포스 3세가 모두 살해당했다.

 

BC 301년 도아도코이 왕국 : 프톨레마이오스 왕국(남청색), 셀레우코스 제국(노란색), 아탈로스의 페르가몬 왕국(오렌지색), 마케도니아 왕국(녹색). 로마 공화국(하늘색), 카르타고(보라색), 에피로스(붉은색)도 표시된 지도

 

캐릭터

 

전투 지휘

 

알렉산더는 군사 지휘관으로서 독보적인 성공 덕분에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이것은 지형의 활용, 팔랑크스와 기병 전술, 대담한 전략 및 그의 군대의 맹렬한 충성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6 미터(20 피트) 길이의 창인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엄격한 훈련을 통해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개발되고 완성되었으며 알렉산더는 속도와 기동성을 사용하여 더 크고 이질적인 페르시아 군대에 대항하여 큰 효과를 냈다. 알렉산더는 또한 다양한 언어와 무기를 사용하는 다채로운 군대 간의 불일치 가능성을 인식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의 방식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이것을 극복했다.

 

알렉산더는 아시아에서의 첫 번째 전투인 그라니코스에서 훨씬 더 많은 40,000명의 페르시아 군에 대항하여 그의 군대의 일부인 약 5,000의 기병과 함께 13,000명의 보병을 사용했다. 알렉산더는 팔랑크스를 중앙에, 기병과 궁수를 날개에 배치하여 그의 라인이 페르시아 기병 라인의 길이인 약 3km (1.86 마일)와 일치하도록 했다. 대조적으로, 페르시아 보병은 기병 뒤에 배치했다. 알렉산더는 옆에 빠져있지 않았으며 긴 창창으로 무장한 그의 팔랑크스는 페르시아인의 시미터와 투창보다 상당한 이점을 가졌다. 마케도니아인의 손실은 페르시아인의 손실에 비해 미미했다.

 

BC 333년 이수스에서 다리우스와의 첫 대결에서 그는 동일한 배치를 사용했으며 다시 중앙 팔랑크스가 밀어냈다. 알렉산더는 직접 중앙에서 돌격을 이끌고 적군을 궤멸시켰다.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와의 결정적인 만남에서 다리우스는 전차의 바퀴에 낫을 장착하여 팔랑크스를 부수고 기병대에 파이크를 장착했다. 알렉산더는 중앙이 비스듬히 전진하는 이중 팔랑크스를 배치하고 전차가 뚫으면 분열했다가 다시 대형을 만들었다. 진격은 성공적이었고 다리우스의 중심을 무너뜨렸고 다리우스는 다시 한번 도망쳤다.

 

BC 334 그라니코스 전투 / BC 333 이수스 전투

 

중앙아시아와 인도와 같이 익숙하지 않은 전투 기술을 사용하는 상대와 마주했을 때 알렉산더는 자신의 군대를 상대의 스타일에 맞게 조정했다. 따라서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에서 알렉산더는 투창을 던지고 궁수를 성공적으로 사용하여 측면 이동을 방지하고 기병을 중앙에 모았다. 인도에서 포루스의 코끼리 군단과 대결한 마케도니아인들은 코끼리를 감싸기 위해 대열을 열고 그들의 사리사를 사용하여 위쪽으로 공격하여 코끼리를 부리는 병사를 제거했다.

 

외모

 

제작된 동상과 기록에 따르면 약간 왼쪽으로 구부러진 목의 자세와 매혹적인 눈빛을 지녔으며 몸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신체적으로 키가 작았지만 튼튼했으며 수염은 제대로 나지 않아 깔끔하게 면도하여 털이 많은 마케도니아 귀족들과 있을 때 눈에 띄었다. 목은 뒤틀렸기 때문에 비스듬히 위쪽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고 눈은 파란색과 갈색으로 각각 달랐으며 촉촉하고 여성스러웠다. 붉은 혈색과 거친 목소리를 가졌으며 머리는 금발이었다.

 

인격

 

알렉산더의 가장 강한 성격 특성 중 일부는 부모의 반응으로 형성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믿도록 격려했다. 올림피아스의 영향은 그에게 운명의 감각을 불어넣었고,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야망이 "그의 세월에 앞서 그의 정신을 진지하고 고상하게 유지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알렉산더에게 가장 즉각적이고 영향력 있는 롤모델이었는데, 젊은 알렉산더는 매년 그의 캠페인을 지켜보았고 심각한 상처를 무시하고 승리를 거두며 승리를 거두었다. 알렉산더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는 그의 성격의 경쟁적 측면을 형성했다. 전투에서 그의 무모한 행동은 그의 아버지를 능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알렉산더는 필리포스가 모든 것을 이루어 자신이 이룰 위대하거나 훌륭한 업적을 남겨 놓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업적을 동료들 앞에서 경시했다.

 

알렉산더(왼쪽), 카우시아를 쓰고 친구 크라테로스와 함께 아시아 사자와 싸우는 모습, BC 4세기 후반 모자이크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렉산더의 특징 중에는 폭력적인 성질과 성급하고 충동적인 성격이 있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의사결정에 기여했다. 알렉산더는 고집스럽고 아버지의 명령에 잘 반응하지 않았지만 합리적인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지각적이고 논리적이며 계산적인 면에서 더 차분했다. 그는 지식에 대한 열망과 철학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었고 열렬한 독자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후견 덕분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알렉산더는 똑똑하고 배우는 것이 빨랐다. 그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면은 장군으로서의 그의 능력과 성공으로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는 술에 대한 자제력이 부족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체의 즐거움"에 큰 자제력을 가졌다.

 

알렉산더는 학식이 있었고 예술과 과학 모두를 후원했다. 그러나 그는 스포츠나 올림픽에 (아버지와 달리) 거의 관심이 없었고 호메로스의 이상적인 명예(timê)와 영광(kudos)을 추구했다. 그는 훌륭한 카리스마와 성격의 힘을 가졌으며 그를 훌륭한 리더로 만들었다. 그의 독특한 능력은 그의 장군 중 어느 누구도 마케도니아를 통합하고 그의 죽음 이후 제국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음으로 더욱 입증되었다. 오직 알렉산더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의 말년, 특히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알렉산더는 과대망상증과 편집증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비범한 업적과 그의 운명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과 동료들의 아첨이 결합되어 이러한 효과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의 웅장함에 대한 망상은 그의 의지와 세상을 정복하려는 욕망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는 무한한 야망, 별명, 그 의미가 역사적인 진부함으로 내려온 것으로 묘사되는 다양한 출처에 의해 설명된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믿거나 적어도 자신을 신성화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올림피아스는 항상 그가 시와에 있는 Amun의 신탁에 의해 그에게 확인된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그에게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제우스-암몬의 아들임을 밝히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궁정에서 페르시아 복장과 관습, 특히 마케도니아인들이 승인하지 않았고 수행하기를 혐오하는 관습을 채택했다. 이 행동은 그에게 많은 동포들의 인심을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또한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민족을 다스리는 어려움을 이해한 실용적인 통치자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이 신성한 왕국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과대망상이라기보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통치를 강화하고 제국을 함께 유지하려는 실질적인 시도였을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한 BC 3세기 그리스 흉상 원본 /  알렉산더와 바르시네(스타테이라)의 결혼을 묘사한 폼페이의 벽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로 꾸민 모습

 

개인적인 관계

 

알렉산더는 세 번 결혼했다. 사랑으로 인해 박트리아의 소그디아나 귀족 옥시아르테스의 딸 록사네, 페르시아의 공주 스타테이라 2세는 정치적 이유로 다리우스 3세의 딸이고, 파리사티스 2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딸이었다. 그는 분명히 록사네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의 여주인 바르시네의 마케도니아의 헤라클레스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그는 록사네가 바빌론에서 유산했을 때 다른 아이를 잃었다.

 

알렉산더는 또한 그의 친구이자 장군이자 마케도니아 귀족의 아들인 보디가드 헤파이스티온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은 알렉산더를 황폐화시켰다. 이 사건은 알렉산더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건강이 나빠지고 정신 상태가 분리되는데 기여했을 수 있다.

 

 

유산

 

알렉산더의 유산은 군사적 정복을 넘어 확장되었다. 그의 캠페인은 동서양 간의 접촉과 교역을 크게 증가시켰고 동부의 광대한 지역은 그리스 문명과 영향력에 크게 노출되었다. 그가 세운 도시 중 일부는 주요 문화 중심지가 되었으며 많은 도시가 21세기까지 살아남았다. 그의 연대기는 그가 진군한 지역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기록했으며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너머의 세계에 소속감을 느꼈다.

 

헬레니즘 왕국

 

알렉산더의 가장 즉각적인 유산은 아시아의 거대한 새 지역에 마케도니아 통치를 도입한 것이다. 그의 죽음 당시 알렉산더의 제국은 약 5,200,000㎢ (2,000,000 평방 마일)를 덮었으며 당시 가장 큰 국가였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향후 200~300년 동안 마케도니아의 손에 남아 있거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등장한 계승 국가들은 적어도 처음에는 지배적인 세력이었으며 이 300년은 종종 헬레니즘 시대라고 불린다.

 

알렉산더 제국의 동쪽 경계는 그의 생애 동안에도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인도 아대륙의 북서쪽에 남긴 권력의 공백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인도 왕조 중 하나인 마우리아 제국을 직접적으로 불러일으켰다. 이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초라한 기원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그리스어 출처에서 "Sandrokottos"라고 함)는 펀자브를 장악했고 그 권력 기반으로 난다 제국을 정복했다.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의 캠페인 정보를 통합한 에라토스테네스(BC 276–194)의 고대 세계지도
BC 30년경 알렉산드리아 평면도

 

도시 건설

 

정복 과정에서 알렉산더는 그의 이름을 딴 20개 도시를 세웠는데, 대부분은 티그리스 동쪽에 있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으며 이는 지중해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도시의 위치는 무역 경로와 방어 위치를 반영했다. 처음에 도시는 수비 주둔지에 지나지 않아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곳에 정착한 많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죽은 지 한 세기 정도 지나서 알렉산드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정교한 공공건물과 그리스인과 현지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상당한 인구로 번성했다.

 

신전 기금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은 현재의 터키 서부인 프리에네에 있는 새로운 아테나 폴리아스 신전의 완공을 위해 기금을 기부했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신전의 비문에는 "알렉산더 왕이 [이 신전]을 아테나 폴리아스에게 헌정했다."고 선언되어 있다. 이 비문은 알렉산더의 생애에서 일어난 일화를 확인하는 몇 안 되는 독립적인 고고학적 발견 중 하나이다. 신전은 할리카르낫소스의 영묘 건축가 중 한 명인 프티오스가 설계했다.

 

리바니우스는 알렉산더가 나중에 안티오크 시가 세워진 곳에 제우스 보티아이오스 신전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프리에네의 아테나 폴리아스에게 헌납 / 알렉산더 제국은 약 5,200,000 ㎢를 차지한 당시 가장 큰 국가였다

 

헬레니즘화

 

헬레니즘은 독일 역사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이 알렉산더의 정복 이후 그리스어, 문화, 인구가 구 페르시아 제국으로 확산된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전파가 일어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예를 들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셀루키아(현재 바그다드 남부)와 같은 위대한 헬레니즘 도시에서 볼 수 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요소를 페르시아 문화에 삽입하고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를 혼합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아시아와 유럽의 사람들을 동질화하려는 그의 열망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러한 정책을 명백히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즘은 후계 국가들의 뚜렷하고 반대되는 '오리엔탈화'와 함께 지역 전체에서 일어났다.

 

정복에 의해 선포된 헬레니즘 문화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아테네였다. 알렉산더의 군대에서 그리스 전역에서 온 사람들의 긴밀한 연합은 주로 아테네에 기반을 둔 "코이네"또는 "보편적인"그리스어 방언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코이네는 헬레니즘 세계에 퍼져 헬레니즘 땅의 링구아 프랑카(공통어)가 되었고 결국 현대 그리스어의 조상이 되었다. 또한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 계획, 교육, 지방 정부 및 예술의 흐름은 모두 그리스 고전 이상을 기반으로 하며 일반적으로 헬레니즘으로 분류되는 뚜렷한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헬레니즘 문화의 측면은 15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의 전통에서 여전히 분명했다.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헬레니즘화

 

헬레니즘화의 가장 두드러진 영향 중 일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상대적으로 늦게 부상한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BC 250-125) (현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및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인도 그리스 왕국(BC 180–AD 10)에서 볼 수 있다. 실크로드 무역로에서 헬레니즘 문화는 이란 및 불교문화와 혼합되었다. BC 3세기부터 AD 5세기까지 간다라(현재 파키스탄의 인더스, 스와트, 카불 강이 합류하는 지역)의 국제 예술과 신화는 헬레니즘 문명과 남아시아가 직접 접촉한 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아소카의 칙령과 마찬가지로 아소카의 지배권에 있는 그리스인들이 불교로 개종하고 헬레니즘 세계에서 아소카의 동시대 사람들이 불교 사절을 받아들인 것으로 직접 언급하고 있다. 그 결과 그리스 불교로 알려진 혼합주의는 불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 불교 예술 문화를 창조했다. 이 그리스 불교 왕국은 최초의 불교 선교사들을 중국, 스리랑카, 헬레니즘 아시아와 유럽(그리스 불교 수도자)으로 보냈다.

 

부처님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조형 묘사 중 일부가 이 시기에 나타났으며 아마도 그리스 불교 스타일의 아폴로 동상을 모델로 했을 것이다. 여러 불교 전통이 고대 그리스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보살(Boddhisatvas)의 개념은 그리스의 신성한 영웅을 연상시키며 일부 대승 의식(향을 태우고, 꽃을 선물하고, 제단에 놓은 음식)은 고대 그리스인이 수행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인도 현지인 문화에서도 유사한 관습이 관찰되었다. 그리스의 한 왕 메난드로스 1세는 아마도 불교도가 되었고 불교 문학에서 '밀린다'라는 이름을 남겼다. 헬레니즘화 과정은 또한 동서 간의 무역을 촉진했다. 예를 들어, BC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 천문 도구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그리스 박트리아 도시 아이하눔에서 발견된 반면, 행성이 구형으로 둘러싸인 구형 지구로 되어있다는 그리스 개념은 꽃의 꽃잎처럼 중앙 산(메루 산)을 둘러싸고 있는 4개 대륙으로 구성된 원반으로 되어있다는 인도의 오랜 우주적 믿음을 대체했다. Yavanajataka(그리스 천문학 논문)와 Paulisa Siddhanta 문헌은 인도 천문학에 끼친 그리스 천문학 사상의 영향을 묘사했다.

 

동쪽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인도 미술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은 광범위했다. 건축 분야에서는 탁실라 근처의 Jandial 사원이 있는 파키스탄까지 이오니아 양식의 몇 가지 예를 찾을 수 있다. 이오니아 영향을 나타내는 수도의 몇 가지 예는 특히 BC 3세기의 Pataliputra 수도인 파트나에서 볼 수 있다. 코린트 양식은 또한 간다라의 예술, 특히 인도 코린트식 수도를 통해 많이 표현되었다.

 

그리스 불교 스타일의 부처상, AD 1-2세기, 파키스탄 북부 간다라 / 로마 제국에서 제작된 알렉산더의 모습을 그린 메달

 

로마에 미친 영향

 

알렉산더와 그의 공적은 많은 로마인, 특히 그의 업적과 연관되기를 원했던 장군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폴리비우스는 로마인들에게 알렉산더의 업적을 상기시키며 그의 역사를 시작했으며, 그 후 로마 지도자들은 알렉산더를 롤 모델로 보았다.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마그누스"라는 별칭과 알렉산더의 석상에 표현된 모발형을 채택하고 동쪽의 정복된 땅에서 알렉산더의 260년 된 망토를 찾았는데, 그 망토를 위대함의 표시로 입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리시포스의 기마 동상을 헌정했지만 알렉산더의 머리를 자신의 것으로 대체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알렉산더의 무덤을 방문하여 일시적으로 그의 인장을 스핑크스에서 알렉산더의 옆얼굴로 변경했다. 황제 트라야누스 또한 네로와 카라칼라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를 존경했다. 잠시 제국의 왕좌에 오른 마크리누스는 보석에 알렉산더의 이미지를 보관하거나 옷에 수놓았다.

 

반면에 일부 로마 작가, 특히 공화국 인물은 알렉산더를 공화국 가치에 의해 독재적 경향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경고로 사용했다. 알렉산더는 이 작가들에 의해 아미키타(우정)와 클레멘티아(관용), 이라쿤디아(분노)와 쿠피디타스 글로리아이(영광에 대한 과도한 욕망)와 같은 통치자 가치의 예로 사용되었다.

 

페르시아만에 있는 이카루스 섬의 이름

 

아리아노스는 아리스토불로스가 페르시아만에 있는 이카루스 섬(현재 Failaka 섬)이 이 이름을 가졌다고 썼는데 이는 알렉산더가 에게 해의 이카루스 섬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고대와 현대 문화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과 유산은 많은 문화권에서 묘사되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높은 문화와 대중문화를 모두 장식했다. 특히 알렉산더 로맨스는 페르시아에서 중세 유럽, 현대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후기 문화에서 알렉산더의 묘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문학에서 알렉산더는 사원을 파괴하고 조로아스터교의 신성한 문헌을 불태운 혐의를 받는 자로 묘사되었다. 수니파 이슬람 페르시아에서는 알렉산더가 젊음의 샘을 찾아 세계의 먼 곳을 탐험하는 신화적인 인물로 나온다. 철학과 연관된 작품에서는 불멸을 찾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 묘사했다.

 

꾸란(코란)에 언급된 "두 뿔이 있는 자"의 모습은 알렉산더의 전설에 근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통에서 그는 곡과 마곡의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벽을 세운 영웅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생명수와 불멸의 물을 찾기 위해 알려진 세계를 여행했고 결국 예언자가 되었다.

 

알렉산더 로맨스의 시리아어 버전은 그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게 기도한 이상적인 기독교 세계 정복자로 묘사한다. 이집트에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정복 이전의 마지막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의 아들로 묘사되었다. 다리우스에 대한 그의 승리는 이집트의 구원으로 묘사되었으며 이집트가 여전히 이집트인에 의해 통치되고 있음을 "입증"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할 강력한 그리스 왕을 묘사한 다니엘서를 보았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보존한 이유로 인용되었다.

 

힌두어와 우르두어에서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이름에서 파생된 "Sikandar"라는 이름은 떠오르는 젊은 재능을 나타내며 델리 술탄의 통치자 Alauddin Khalji는 자신을 "Sikandar-i-Sani"(두 번째 알렉산더 대왕)로 표현했다. 중세 인도에서 이란 문화권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과 아프간 주권자들은 알렉산더의 긍정적인 문화적 의미를 인도 대륙에 가져왔고, 그 결과 인도 페르시아 시인이 쓴 Sikandernameh(알렉산더 로맨스들)가 꽃피웠다. 알렉산더 대왕이 무굴 시대의 페르시아 미니어처에서 인기 있는 주제로 등장했다. 중세 유럽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삶이 기사도의 모든 이상적인 자질을 요약한다고 믿어지는 영웅 그룹인 나인 워디스의 일원으로 존경받았다.

 

14세기 아르메니아의 미니어처에 묘사된 알렉산더 대왕 / 14세기 비잔틴 원고에 묘사된 알렉산더 대왕
16세기 중반 카바에서기도하는 알렉산더의 모습을 보여주는 Shahnameh 책(Folio)
공중을 정복하는 알렉산더 대왕, 1448-1449 장 워클린 / 16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유리 잠수정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묘사한 이슬람 그림

 

그리스 선집에는 알렉산더를 언급하는 시가 있다.

 

아일랜드 극작가 오브리 토마스 드 베레는 드라마틱한 시 알렉산더 대왕을 썼다.

 

대중문화에서 영국 헤비메탈 밴드 Iron Maiden은 1986년 앨범 Somewhere in Time에 "Alexander the Great"라는 노래를 포함시켰다. 베이스 연주자 스티브 해리스가 작곡한 이 노래는 알렉산더의 삶을 이야기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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