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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헬레니즘

그리스 관점의 제국들

by 금곡동로사 2022.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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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황제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통치] 8년,... 클레오파트라 22년, 아우구스투스 43년,...
- AD 16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저술한 <왕들의 목록>

스스로를 '헬레네스의 황제'라고 선언하십시오.
- 1449년 요안니스 아르기로풀로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 황제에게 보내는 조언

 


로마가 다른 라틴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주장했던 BC 338년을 로마 제국의 시작 날짜로 잡았다. 같은 해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는 그리스 대부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면서 최초의 범 그리스 제국을 세웠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나라를 세계가 아직 보지 못한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게 된다. 제국은 그의 죽음 이후 분열되었지만, 적어도 하나의 계승국(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은 BC 30년 클레오파트라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더 잘 알려진 옥타비아누스가 합병했다.


첫 번째 인용구가 보여주듯이, 2세기가 지난 후, 일부 그리스 지식인은 이미 로마 제국을 헬레니즘 왕국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보았다. BC 747년부터 AD 160년까지의 연대 측정 체계로 편찬된 왕들의 목록은 바빌로니아 왕들로 시작하여 마지막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까지 이어진 메소포타미아 목록을 기초로 했다. 이후에 그리스인들이 마케도니아 황제, 프톨레마이오스 군주, 그리고 로마 제국의 황제 목록을 추가했다. 이러한 "로마" 황제들은 물론 1453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수세기에 걸쳐 점점 더 헬레니즘화 되었다. 위의 두 번째 인용구는 일부 그리스 지식인이 결국 도달한 결론을 보여준다.

 

이 글은 이전(移轉)한 제국의 그리스 관점에서 "제국"을 제시한다. BC 33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즉위하면서 시작되었고, BC 30년 로마 제국이 계승할 때까지 (해체된 채) 계속되었다. 로마인이 그리스 왕국들과 도시들을 정복했지만, 그들의 언어나 문화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그리스 가문 출신의 첫 황제)가 통치하면서 제국의 동부에 대한 그리스 정체성이 재확인되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 제국의 이 그리스 부분이 장기간 온전하게 살아남아 중세 "비잔틴" 제국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탄생은 285년부터 629년(헤라클리우스 통치하에서 그리스어가 제국 언어로 라틴어를 대체한 때)까지 다양하게 거슬러 올라간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계승국은 1460/61년 튀르크에게 함락되었고, 그리스는 1827년에야 다시 독립했다.

역사는 BC 336년부터 AD 1458년까지의 18세기를 아우르는 9개의 지도와 더불어 오늘날의 그리스 국가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도의 형태로 제시된다. 이들은 지도 사이의 시간이 대략 일정하지 않고 단조롭게 증가한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놀랍도록 빠른 정복 속도와, 그의 제국이 거의 똑같이 빠르게 해체되었음을 반영한다.

 


BC 336년 - 알렉산드로스의 즉위

 


서구 문화를 정의하는 철학, 예술, 문학을 낳은 시대인 그리스의 영광은 BC 480-79년에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군에 맞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이끄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승리한 덕분이다. 그러나 이 압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대반격은 없었고, 페르시아는 386년에 이오나(아나톨리아의 서해안)까지 되찾았다. 대신, 고전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군에 용병으로 입대하거나 도시 간 전쟁(주로 아테나이, 스파르타, 테바이가 관련된)을 벌이며 군사적으로 바빴다. 이러한 (돌아보면) 사소한 투쟁은 그리스 본토의 북방에 있는 헬레니즘화 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의 군대의 강점은 (i)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여러 대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대열은 5 m 이상의 장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ii) 테살리아 기병대의 두 가지였다. 338년에 이 군대는 아테나이와 테바이의 연합 호플리테스 군대를 격파했는데, 결정적인 움직임은 필리포스의 10대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테바이의 측면을 선회하여 공격한 기병 돌격이었다. 이 승리로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전체가 필리포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위의 지도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은 로열 바이올렛으로, 필리포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국가는 밝은 색조로, 독립 그리스 국가(스페인에서 콜키스까지의 식민지와 스파르타)는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정복에 만족하지 못한 필리포스는 페르시아를 상대로 그리스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336년 떠나기 전날에 그는 암살당했고, 20세의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다.

 


323년 - 사망 당시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그리스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를 그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옳았다. 그는 훨씬 더 무자비하고 야심적이었다. 335년 테바이가 마케도니아의 통치에 반기를 들자 알렉산드로스는 도시를 파괴했다. 이듬해 그는 아시아로 건너가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를 점령했다. 333년 그는 이소스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레반트와 이집트를 정복했다. 다리우스는 필리포스가 분명히 수락했을법한, 현상 유지에 근거한 화평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반신(半神)으로 칭송받은 알렉산드로스는, 그것을 경멸했다. 331년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가 전투에서 달아났을 때 그는 두 번째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모든 교전에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는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고,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기병대의 돌격이 결정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따라 동쪽으로 갔지만, 다리우스는 결국 신하에게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로스는 그 역시 바로 물리쳤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군대를 페르시아 제국의 끝까지 이끌었고, 심지어 제국 너머로 인도까지 진출하여 도시를 세웠다. 326년 고향을 그리워하는 군대의 위협적인 반란만이 갠지스 강을 따라 진격하는 것을 막았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인 바빌론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페르시아와 그리스 신민들을 통합하기 위한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323년 그곳에서 32세의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행정 기술을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는 짧은 생애의 절반을 격렬한 싸움과 과음으로 보냈다. 이는 인도에서 입은 거의 치명적인 부상과 함께 알렉산드로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300년 - 디아도코이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제국은 지체 부자유한 이복동생 필리포스와, 아직 배 속에 있던 그의 유일한 아들(또한 알렉산드로스라고 불리는)에게 넘어갔다. 놀랄 것도 없이, 그의 장군들은 이러한 무능한 상속자들에게 충성심을 유지하기보다는 제국의 여러 지역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시작했다. 이 장군들은 후계자인 디아도코이로 알려지게 되었고, 곧 그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필리포스는 317년에 암살당했고, 어린 알렉산드로스는 306년에 그가 성년이 되었을 때 암살당했다. 그 후 디아도코이는 그들 스스로를 왕(바실레이오이, 단수 바실레우스)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후계자 중 한 명인 안티고노스는 여전히 제국의 재통합을 꿈꿨지만, 다른 디아도코이는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그를 물리치기 위해 힘을 합쳤다. 그 후, 위 지도에서 다른 색으로 표시된 4개 계승 왕국의 조금 더 안정된 정치적 상황이 나타났으며, 그들의 영향 지역은 더 옅은 색조로 표시되어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이전과 같이 로열 바이올렛색)은 필리포스의 딸과 결혼한 카산드로스가 다스렸다. 트라키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는 리시마코스 왕국(갈색)을 형성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파란색)를 지배했고, 그의 통치를 팔레스타인과 킬리키아까지 확장했다. 네 번째이자 가장 큰 계승국은 시리아에서 인더스까지 통치한 셀레우코스(오렌지색)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더스 너머 정복지는 셀레우코스가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에 넘기고, 500마리의 전쟁 코끼리와 맞바꾸어 입소스 전투에서 그 가치를 증명했다. 이 손실과 중앙아시아에서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티(가장 먼 알렉산드리아)의 손실을 제외하더라도, 디아도코이 왕국들을 합치면 알렉산드로스 제국 이상으로 확장되었다(종속 지역이 포함된 경우에만).

 


200년 - 로마의 개입 직전

 


후계 왕국들 간의 전쟁은 또 다른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리시마코스는 285년 마침내 마케도니아를 그의 왕국에 추가했지만, 이로 인해 리시마코스의 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셀레우코스와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 동안, 둘 다 280년에 살해당했다(디아도코이 중 프톨레마이오스만이 282년에 평온하게 사망했다). 뒤이은 혼란 속에서, 279년 켈트족이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침공했다. 원래의 리시마코스 왕국 나머지 부분은 제압되었고, 그리스 도시들은 마케도니아로부터 독립을 되찾았다. 마케도니아인은 안티고노스 디아도코스의 손자인 안티고노스 2세를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중앙 아나톨리아에서 켈트족(또는 갈리아인)은 이후 갈라티아로 알려진 지역에 정착하여 흑해 연안을 셀레우코스 왕국(건국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의 영향으로부터 차단했다. 이 왕국은 이제 2세기 후의 종말을 향해 느리고 불규칙한 쇠퇴를 시작했다. 북동부 지역은 245년경 디오도토스 치하의 박트리아 왕국(빨간색으로 표시)을 형성하기 위해 분리되었다. 박트리아 서쪽에 있는 파르티아인도 비슷한 시기에 반독립을 하였으며,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페르가몬(갈색으로 표시된 영토)의 아탈로스는 230년에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지도(BC 200년 무렵) 당시 안티오코스 3세는 셀레우코스 왕국의 부흥을 이끌었고, 인도까지 (더 많은 코끼리를 공물로 모으기 위해) 캠페인을 벌였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으로부터 지중해 동부 해안을 점령했다. 그는 그리스 일부 지역에서 안티고노스 왕조의 영향력을 재확인 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함께 이집트 세력을 몰아냈다. 이 동맹은 최근 카르타고를 격파하고 그라이키아 마그나(이탈리아 남부 및 시칠리아)를 정복한 떠오르는 로마의 관심을 끌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집트의 그리스는 더 이상 군사력으로 간주되지 않았다(그들은 이때 일시적으로 상이집트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면에서 그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지식인과 예술계의 중심지였고, 인구는 약 4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BC 34년 -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 마지막 결전

 


198년, 2개의 로마 군단이 그리스에 상륙하여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힘을 영원히 깨뜨렸다. 196년 올림픽에서 그리스 도시들은 마케도니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말을 들었지만, 현실은 로마인이 새로운 지배자였다. 192년, 로마는 안티오코스 3세와 전쟁을 벌여 그를 쫓아냈다. 188년의 평화 조약으로 셀레우코스 왕조는 아나톨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고, 주요 수혜자는 로마의 동맹인 페르가몬이었다. 이후 파르티아의 세력이 커지면서 메소포타미아 동쪽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추가적인 전쟁이 있은 후, 로마는 148년과 146년에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완전히 합병했다. 피할 수 없는 일에 굴복한 아탈로스 왕조의 마지막 왕은 133년 그가 죽으면서 페르가몬을 로마에 물려주었다. 이 시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국한되었고, 64년 폼페이우스가 이 지역을 로마에 합병했을 때 그 영토는 몇 개의 도시로 축소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계승자들 가운데 오랫동안 로마의 보호를 받고 있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만이 남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 7세는 두 명의 로마인 지도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왕국의 독립을 유지했다. 첫 번째는 48년에 그녀를 왕위에 앉힌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에게서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고,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두 번째는 44년 카이사르가 사망한 이후 로마 제국의 동부를 통치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서부는 옥타비아누스가 통치). 그녀는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낳았고, 37년에 그와 결혼했다. 안토니우스는 34년의 "알렉산드리아 기증"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게는 키프로스가 이집트 왕국으로 회복되었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는 아르메니아(및 명목상 안토니우스가 정복할 계획이었던 메디아와 파르티아)를,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에게는 키레나이카(및 명목상 옥타비아누스가 통제하는 리비아)를, 그의 어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게는 페니키아, 시리아 및 킬리키아를 나눠주면서 로마가 동방에서 지난 40년 동안 획득한 영토에서 그의 그리스 가족을 위한 왕국을 세웠다. 이 영토들은 위의 지도에서 옅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고, 안토니우스의 로마 영토는 훨씬 더 옅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 위 지도에서 또 다른 계승 왕국은 카이베르 고개 주변의 박트리아 왕국 잔재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왕국의 후기 역사는 불분명하며, 이 지도의 시점인 BC 34년에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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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년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 분할

 


이집트의 부와 그의 베테랑 군단의 힘을 배경으로 한 안토니우스의 메디아와 파르티아 정복 야망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성공했다면 그와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을 거의 모두 재통합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 BC 32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을 설득하여 안토니우스의 직위를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원로원의 3분의 1과 집정관 둘 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군대를 집결시킨 그리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협력하면서 그의 군단병들을 소외했고, 그들은 떼를 지어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이전 지도 참조)에서 패배한 클레오파트라는 해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도망쳤고, 안토니우스도 뒤를 따랐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듬해 이집트를 침공했고, 연인들은 자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합병하고 BC 27년에 로마로 돌아와서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부여받아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사실상 모든 그리스 국가는 이제 로마의 속주 또는 로마의 종속국이었다. 다음 몇 세기 동안, (화장보다) 매장과 같은 그리스 문화와 관습이 제국 전역에 퍼졌다. 동방에서 그리스어는 제국 총독, 법정 또는 군대와의 거래를 제외하고는 링구아 프랑카로 남아 있었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그리스 가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황제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통치했던 것처럼 제국을 위해 두 명의 통치자를 두는 발상을 되살렸다. 그는 밀라노에서 통치하는 막시미아누스를 서방에 세운 반면 니코메디아에서 동방을 통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데미 제국은 3세기에 그리스 출신의 통치자와 그리스 도시에 궁정이 있으며 그리스어를 링구아 프랑카로 삼은 최초의 주요 국가로, 위에 옅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633년 - 바실레우스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 체계는 305년 그의 자발적인 은퇴 후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324년 로마 제국은 다시 한 명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있게 되었다. 그는 두 가지 중대한 결정으로 대제로 일컬어진다. 먼저, 그는 제국의 동부에 적절한 수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구 비잔티움 부지에 새로운 로마(곧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알려짐)를 건설했다. 둘째,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395년까지 이러한 결정들은 제국의 본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기독교는 국교가 되었고, 제국은 각각 황제와 궁정, 원로원을 가진 동부와 서부로 영구히 나뉘었다. 다음 세기에 걸쳐 서부 제국은 게르만 침략자들에게 무너졌고, 동부 제국은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533년부터 563년까지 서방의 상당 부분을 동방에서 재정복 했지만,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 한 곳에 황제, 궁정, 원로원이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이득의 절반은 629년까지 상실했고, 슬라브족의 정착으로 발칸반도 대부분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다시 한번 그리스인이 지배하는 곳으로 남겨졌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그리스어를 제국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여 바실레우스 이라클리오스(*)가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헤라클리우스는 사실 클레오파트라 이후 최초의 그리스 바실레우스였으며, 위 지도의 색상은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 지도의 시점 당시, 헤라클리우스는 602년에 침공한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최동단 속주(BC 34년 클레오파트라와 그 자녀들의 왕국과 거의 일치함)를 최근에 탈환했다.

(*) 바실레우스(그리스어 바실레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사용되었을 때, 위에서 왕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부터 로마 황제와 그에 상응하는 페르시아 통치자를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1040년 -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

 


불행하게도 헤라클리우스와 그리스인은 634년부터 651년까지 페르시아로부터 막 되찾은 모든 영토를 아랍인에게 빼앗겼다. 그의 후계자 콘스탄스 2세(641-68년)는 이러한 이슬람 세력에 패배하고 660년에 제국의 재건을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2세기 만에 로마를 방문한 최초의 황제였으며, 이탈리아 남부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에 가까운 오래된 그리스 도시 시라쿠사에 궁정을 열었다. 시라쿠사를 새로운 수도로 만들려는 그의 계획은 668년 그곳에서 암살당하게 만들었고, 30년 내에 모든 아프리카가 아랍인에게 넘어갔다. 다시 한번, 마침내 제국은 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하는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제국의 운명은 754년경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후 서서히 회복되었다. 1040년까지 아나톨리아 전역, 발칸반도, 이탈리아 남부는 비잔틴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아르메니아, 시리아, (1038년 이후) 시라쿠사 지역도 다시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458년 - 마지막 중세 그리스 국가들

 


1040년의 비잔틴 제국은 알렉산드로스와 디아도코이 제국의 전체 존재보다 한 세기가 더 긴 4세기 이상 통치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의 대부분 동안 제국은 두 번의 큰 타격으로 인해 이전 모습의 그늘이었다. 첫 번째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이전 지도에 표시됨)에서 셀주크 튀르크에 패한 것으로, 이후 아나톨리아 전역이 튀르크에 점령되었다. 서부와 해안 지역은 12세기에 서유럽에서 온 십자군의 도움으로 회복되었지만, 이 카톨릭 군대는 항상 그들의 정교회 형제를 의심했다. 두 번째는 1204년의 십자군이 황제가 제위에 앉는 것을 도운 후, 그에게 대항하여 일어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을 때였다. 십자군은 에게해 주변의 제국 중심부를 장악했고, 비잔틴 제국의 뒤를 잇는 세 개의 주요 계승국인 아나톨리아 서부의 니케아 제국, 아나톨리아 북부의 트레비존드 제국, 아드리아 해의 에페이로스 전제 공국이 주변부에 나타났다.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투쟁은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은 니케아에 의해 승리했고, 최종적으로 1340년에 에페이로스를 흡수했다. 트레비존드는 독립을 유지했지만, 그 황제들은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 황제"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1449-1453년)는 오스만 튀르크에게 도시가 함락되는 동안 사망했다. 오스만 제국은 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몇 안 되는 에게해 제도를 소탕하고 1458년에는 콘스탄티노스의 형제 토마스, 디미트리오스가 통치하던 모레아 전제 공국만 남겨두었다. 이 시기에, 모레아는 지성 활동의 온상이었으며, 플라톤의 철학을 홍보하고 심지어 고대 그리스 판테온 숭배로 되돌아가기까지 했다! 트레비존드(붉은색)는 여전히 다비드 "황제" 통치 하에 있었고, 크림 반도(녹색)에는 고티아(Gothia)라고 알려진 혼합 민족 구성을 가진 독립적인 테오도로 공국이 있었지만, 그리스 군주들이 통치했다.

 


지금 - 현재의 그리스 국가들

 


모레아는 1458-60년, 트레비존드는 1461년, 테오도로는 1475년 오스만에 정복되었다. 그 이후 헬라스(그리스)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전쟁(1821-27년)을 승리로 장식할 때까지 350년 동안 그리스 국가는 없었다. 1832년 열강은 바이에른 군주를 왕으로 추대했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권고받은 것처럼 자신을 헬레네스의 바실레우스라고 칭했다. 이 왕국은 모레아와 중앙 그리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리스어 화자의 대다수는 국경 밖에 있었다. 이 시기에 많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어 화자를 재통합하는 메가리 이데아(위대한 이념)를 믿었다. 아나톨리아의 일부, 특히 트레비존드 주변에는 여전히 그리스인이 다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상당한 소수가 있었기 때문에, 메가리 이데아는 사실상 비잔틴 제국의 회복을 의미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전쟁에서 그리스는 이 목표에 근접했지만, 1920-23년의 전쟁에서 새로운 터키 공화국에 패배함으로써 그리스인은 위에 표시된 파란색 지역(1945년 이탈리아가 양도한 로도스도 포함)에 만족해야 했다. 중세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고전 그리스의 중심지인 아테네가 현대 그리스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키프로스에서의 사건들은 1970년대에도 메가리 이데아가 여전히 일부 그리스인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80%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 섬은 1190년 십자군에게 빼앗겼고, 1571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했으며, 1914년 영국에 합병되었고, 1960년에 독립했다. 그리스 군부 통치자들(1967-74년)이 상당한 소수 터키인의 희망에 반하여 키프로스를 그리스와 통합하려는 정치적 압력은 1974년 터키의 섬 침공을 이끌었다. 이로써 키프로스 북부의 3분의 1에 사실상의 터키 국가가 수립되었고, 키프로스 남부의 3분의 2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키프로스 정부 아래에 남게 되었다. 이 국가는 거의 전적으로 그리스인이며, 위에서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트라키아를 더하고 스파르타와 크레타를 빼면 현대 그리스는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 제국과 거의 근접할 것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리스 문명 요약 지도

 


이 지도는 BC 336년부터 현재까지의 이전 10개 지도에서 묘사된 그리스 문명을 요약한 것으로, BC 34년 지도에서 매우 옅은 색조로 표시된 영역(안토니우스가 지배한 로마 지역), 285년 지도에서 나타난 영역(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지배한 지역)은 포함하지 않는다. 짙은 녹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위 지도에서 적어도 절반(즉, 5개)에 나타나며, 옅은 색상은 절반 밑으로 계산된다. "핵심" 그리스 지역인 짙은 녹색 지역은 그리스 본토,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서부, 킬리키아, 시리아(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 하이집트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어 있다. 에게해 제도와 키프로스 섬, 키레나이카, 마그나 그라이키아, 흑해 연안의 일부도 포함된다. 옅은 녹색 지역은 주로 비잔틴 제국의 유럽 및 아프리카 영토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제국보다 상당히 큰, 인도에서 모로코까지 뻗어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 요약 지도

 


이 지도는 고대 그리스 또는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모든 지역을 보여준다. 로마 제국(동방뿐만 아니라 서방)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고려할 때, 고대 그리스 문화의 확산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고대 전체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기간을 헬레니즘 시대와 원수정으로 제한한다면 이 지도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단순히 BC 323년의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AD 116년의 트라야누스 제국의 통합으로만 구성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약 45개의 국가(*)가 위의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 이 집계에는 룩셈부르크가 포함되지만 극소 국가는 포함되지 않으며,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위의 경계 내에 있는 국가만 포함된다.

 

 

 

출처 : Howard Wis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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