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 왕 움마의 루갈자가시는 수메르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가 어떤 중요한 변화를 도입했다는 증거는 없다. 24년 후, 루갈자가시 제국은 북부 도시 아카드에서 온 셈족 통치자 사르곤 대왕(BC 2325-?)의 군대에게 멸망하였고 이제 모든 수메르인은 아카드 왕의 지배하에 통합되었다. 사르곤은 군사독재의 원형을 세상에 남겼다. 사르곤은 무력으로 수메르 도시 국가들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 전체를 정복하여, 타우루스 산맥에서 페르시아만까지, 그리고 아마도 지중해까지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그의 50년 치세 동안 사르곤은 적어도 34번의 전쟁을 치렀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5,400명이며 아카드어로 구루쉬라고 불렸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사르곤 군대는 그 시대 가장 큰 상비군이었을 것이다.
사르곤은 재위 내내 메소포타미아를 습격한 산악 민족과 반란으로부터 제국을 지키기 위해 보냈다. 그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달래야 했다. 처음에 그는 땅이 필요할 때 대가를 치르며 수메르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더 강력한 행동을 취했다. 그는 도시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저항의 중심지를 제거했으며 수메르에 아카드 총독들과 군대를 주둔시켰다. 여전히 수메르를 평정하지 못하자 땅을 몰수하여 수메르인을 추방하고 아카드인을 그 땅에 정착시켰다. 사르곤은 수메르인을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지만 공정성에 대한 개념은 수메르인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의 통치자를 임명하고 사람들이 땅을 소유한다고 생각했다. 수메르인은 신들이 통치자를 임명하고 신들이 땅을 소유한다고 믿었기에 그들이 보았을 때 사르곤은 수메르 통치자를 해임하거나 그들의 땅을 처분할 권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렇게 했을 때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르곤은 정복에서 또 다른 한계를 발견했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지중해 연안으로 향했지만, 북쪽의 아나톨리아로 진군하려 하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모든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사르곤은 군대의 의지에 의존했고,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군대의 충성심 덕분에 사르곤은 제국을 그의 아들 리무시에게 평화롭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리무시는 수메르인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즉위 9년 만에 암살당했다. 그의 형제인 사르곤의 둘째 아들이 뒤를 이었을 때, 그 역시 수메르인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으며 그 또한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나람신이 즉위했다.
나람신은 수메르인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반란이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가자 이러한 위험한 상황은 구티족의 메소포타미아 침공을 부추겼다. 나람신은 구티족을 격퇴하고 반란군을 물리치고, "사방의 왕"(즉, 온 세상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신민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알렸다. 만약 메소포타미아인, 특히 수메르인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신들이 늙고 죽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주장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그들은 땅을 몰수하고 통치자들을 퇴위시킬 권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고 수메르인을 아카드의 통치에 융화시키지도 못했다.
나람신의 37년 통치가 끝나갈 무렵 그는 다시 구티족의 침략을 막아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들을 제국에서 쫓아낼 수 없었다. 그가 죽고 그의 아들은 구티족과의 계속되는 전쟁을 이어받았으며 더군다나 새로운 수메르인의 반란이 일어나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수메르인은 자유를 되찾았고 제국은 붕괴되었으며 아카드인은 그들의 고향 아가데의 경계까지 쫓겨났다. 수메르인은 자유를 만끽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서로 다투며 구티족의 위협을 간과했고, 구티족이 쳐들어와 수메리아를 정복하고 백 년 동안 지배했다. 사르곤과 그의 후계자들은 사라졌지만 남겨진 유산은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후속 통치자들로 하여금 사르곤 제국의 재건을 꿈꾸게 했다.
22세기 중반, 수메르의 영웅 우루크 왕이 구티족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몰아내고, 승리를 이용해 수메르인을 설득하여 그들의 차이를 제쳐두고 왕의 뒤에서 단결하도록 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로 사망하자 후계자인 우르남무는 캠페인을 통해 수메르를 장악하고 아카드를 정복하여,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이 신성한 지위가 그에게 부여한 권한(땅을 장악하고 엔시를 임명할 권리)으로 우르남무는 황폐하고 침체된 땅의 회복에 전념했다. 그는 사원, 성벽, 도로, 항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개 시스템의 재건을 장려했다. 수메르는 다시 한번 번영하게 되었다.
사르곤 군대는 그의 통치를 특징짓는 거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비추어 볼 때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수메르에서처럼 부대는 60진법 체계로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사르곤 군대는 600명으로 구성된 9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각 기르니타(gir.nita) 또는 대대장이 지휘했다. 다른 계급에는 파파/샤 카팀(pa. pa/sha khattim)이 있었는데, 이는 말 그대로 "두 명의 참모로 구성된 직책"으로, 이 장교가 2개 이상의 60명 부대를 지휘했음을 의미한다. 이 계급 아래에는 수메르 시대 이후 변하지 않은 누.반다(nu.banda)와 우갈라(ugala)가 있었다. 그들이 징집병으로 시작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르곤의 병사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 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갖추려면 무기와 병참 기능을 운영하기 위한 고도의 군사조직이 필요했고, 엄청난 기록을 남긴 박식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안배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없다.
사르곤이 도입한 아카드 혁신은 니스쿰(niskum)으로, 아마도 옛날 아가우시 루가이 또는 "왕실 병사들"과 같은 등급의 병사들이다. 니스쿰은 왕의 호의로 땅을 받았고 3개월마다 물고기와 소금을 배당받았다. 이 발상은 로마 공화국의 후기 모델을 따라 충성스러운 군사 전문가 집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투트모세 1세 역시 장교 군단에 아들을 계속 제공하는 한 토지를 소유하는 가문 계층을 만드는 방식의 비슷한 제도를 도입했다. 아카드 제도는 전쟁에서 활용되거나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상당수의 충성스럽고 훈련된 병사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사르곤 군대는 전문가, 민병대, 그리고 이러한 왕실 병사들과 함께 님 병사라고 불리는 경무장 부대와 척후병을 포함하고 있었다. 님(Nim)은 '파리'라는 뜻으로, 빠른 움직임과 함께 이러한 부대가 분산 대형을 이루어 고용되었음을 암시하는 이름이다.
사르곤 시대에 수메르인/아카드인은 합성 궁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무기 혁신에 기여했다. 이 치명적이고 혁명적인 무기는 사르곤의 손자 나람신(BC 2254-2218년)의 통치 기간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람신은 외적을 상대로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벌였다. 룰루비를 상대로 한 그의 승리는 합성 궁으로 무장한 나람신의 모습을 나타낸 암석 조각으로 기념되었다. 이 조각품은 역사상 최초로 합성 궁의 모습을 나타냈으며, 수메르인/아카드인에게서 기원한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비록 수메르 군대가 이전에 일반 활조차도 사용했다는 남아있는 증거는 없지만, 활이 전사 왕의 손에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당시의 주요 무기였음을 암시한다.
합성 궁은 주요한 군사 혁신이었다. 일반 활은 50-100 야드 범위에서 적을 살상할 수 있었지만, 단순한 가죽 갑옷조차 관통하지 못했다. 합성 궁은 일반 활의 두 배 이상 되는 인장력으로 가죽 갑옷과 아마도 이 시기에 생겨났던 청동 갑옷의 초기 원형까지도 쉽게 관통할 수 있었다. 훈련받지 않은 농민 민병대도 합성 궁을 쏘면 적은 일반 활보다 두 배 먼 거리에서 화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무기는 매우 중요하여 향후 1,500년 동안 근동 모든 군대의 기본적인 전쟁 도구가 되었다.
아카드 시대에는 전투차량의 사용이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이를 암시한다. 그러한 차량들은 매우 비쌌다. 수메르에서는 강력한 왕이 속국의 차량을 징발할 수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자비로 유지했다. 그러나 사르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중앙집권화 하자 이 속국들은 사라졌고, 이 차량들은 왕실의 비용이 되었다. 군대의 전문화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왕과 그의 장군들을 수송하는 데 필요한 차량 외에는 전투 차량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많은 보병이 요구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카드 왕들은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엘람 산지와 더 북쪽에 있는 구티족과 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경무장을 하여 기동성이 매우 뛰어난 적들로 산지와 울창한 수풀 협곡에서 싸웠다. 전차는 비교적 평평한 지형에서 경쟁하는 도시 국가들 간의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다. 고국에서 상당히 떨어진 험한 지형에서 사용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서 전투차량의 명백한 결함을 드러냈을 것이며, 이로 인해 군사적 유용성은 저하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제국 국경 안에서 운송업자와 전령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서 전차 도로라고 알려진 정규 경로를 이용했다.
나람신 승전비
가장 유명한 아카드 전쟁 기념물인 석비는 왕과 그의 군대가 자그로스 산맥으로 올라가 룰루부 고지대인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전장의 자연 지형을 양식화된 패널이 아닌 한 장면으로 묘사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지형은 나무로 덮인 여러 능선과 높은 산봉우리를 배경에 보여준다. 비문에는 "룰루부 고지대인의 왕 사투니가 군대와 함께... 전투... [나람신은 그들을 무찌르고] 그들 위에 무덤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이 물건, 석비][승리를 주신] 신에게 바쳤다"(R2:144)고 쓰여 있다. 길게 묶은 머리가 특징인 룰루부 병사들은 완전히 패주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럿이 죽어있고, 목에 화살이나 창이 튀어나온 사람도 있다. 다른 하나는 산에서 떨어진다. 두 명 이상 도망치며 하나는 창이 부러진 채다. 룰루비 왕 사투니는 나람신 앞에 서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반면 아카드 군대는 질서 정연하고 대담하게 전진한다. 6명의 아카드 병사들은 모두 킬트와 투구를 착용했는데, 이는 이전의 수메르 우르 스탠다드와 독수리 석비에 나타난 것과 대체로 유사하다. 그들은 또한 난투를 위한 날이 좁은 도끼를 가지고 있다. 두 명은 전쟁 깃발을 들고, 두 명은 2.5 미터 창의 밑동을 쥐고 연병장의 소총처럼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있다. 다섯 번째 아카드인은 활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여섯 번째 아카드인은 도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웅적인 나람신은 남들보다 두 배 높은 산꼭대기에서 군대를 이끌고 쓰러져 있는 적들의 몸을 밟고 있다. 킬트는 비슷하지만 두꺼운 수염과 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신성을 상징하는 뿔이 달린 왕관을 쓰고 있다. 손에는 도끼, 활, 화살을 들고 있다. 그의 활은 종종 합성 궁의 가장 오래된 표현이라고 한다.
출처 : Weapons and War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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